안성호 장편 소설 『달수들』, 오직 그 표지에 대하여 —안성호 장편 소설 『달수들』

소설 『달수들』의 앞표지, 앞표지의 속표지, 그리고 뒷표지

1. 소설의 온라인 서점 입고 전
안성호의 소설 『달수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면이 많은 소설가여서 한권 사보려고 했으나 온라인 서점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다 알라딘에서 일단 선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교보에서 사야 하는 입장이었다. 교보에서 6월말까지 쓸 수 있는 2천원짜리 쿠폰을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이게 2천원이면 막걸리가 두 병인지라 모든 것의 계산을 막걸리값으로 환산하는 나로선 그 두 병의 막걸리 유혹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 이 얘기를 들었다면 안성호는 아, 그참, 내가 술사줄테니 그냥 알라딘에서 사요라고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러면 안성호에게 술을 얻어먹고 막걸리 두 병도 챙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그 경우에도 역시 막걸리 두 병의 유혹은 뿌리칠 수 없게 된다.
처음에는 작가가 책이 나왔다고 하는데 왜 온라인 서점에는 들어오지 않는지가 의아하여 이 놈의 책은 무슨 인천에 배가 들어와야 책이 들어오는 건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까지 하였다. 어쨌거나 그러다 온라인 서점에서 표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쉽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아쉬운 대로 표지만 읽었다.
표지에는 점이 다섯 개 찍혀 있었다. 작가는 이것이 점이 아니라 구멍이라고 우기고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구멍이라기 보다 점으로 보인다. 때문에 나는 표지를 보며 점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어떤 사람은 이 물음에 대해 그거, 연필끝으로 콕 찍어놓은거 아녜요라고 답했다. 그러면 점은 아주 쉽다. 점은 연필끝으로 콕 찍기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대답도 있다. 그 대답에 의하면 점이란 0차원의 기하학적 요소로 일정한 체계의 좌표를 통하여 표시할 수 있는 위치라고 정의가 된다. 이렇게 되면 점이 상당히 어려워진다. 손에 넣는 것 또한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점의 위치를 알려주는 보이지 않는 좌표를 읽어내야 하고, 또 0차원으로 수렴된 우리들의 3차원 세계를 한번 상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이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다.
아직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표지만으로 읽어본 소설 『달수들』의 세계는 점 다섯 개의 세계였다. 그 점이 연필끝으로 콕콕 찍어놓은 것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좌표와 다차원의 세계를 더듬어 찾아가야할 세계인지는 소설을 읽어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후자쪽이라면 좌표란 점을 찾아가는 1차원의 길을 전제로 한다. 과연 나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쉬운대로 처음엔 표지만 읽었다. 점만 읽고 보라색의 의미는 읽지 않았다.

2. 주문은 했으나 아직 소설책을 받기 전
교보의 온라인 서점에서도 주문을 할 수 있게 되어 주문을 했다. 보통 주문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다음 날 배송이 되지만 이 소설책은 주문을 한 그 다음 날로 곧바로 배송이 되는 신속함을 보여주지 않았다. 여전히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온라인 서점에 올라와 있는 소설의 표지 뿐이다. 나는 또 표지만 읽기 시작했다.
사실 운명적으로 두 개의 책이 교차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책과 책이 만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게 있어 안성호의 소설 『달수들』은 마치 운명처럼 리처드 풀린(Richard Poulin)의 책 『그래픽 디자인의 언어』(The language of graphic design: an illustrated handbook for understanding fundamental design principles, 2011, Rockport)와 만났다. 소설책은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온라인 서점에 올라온 책의 표지 뿐이다. 표지는 전면이 보라색으로 덮여 있었고 다섯 개의 노란 점이 찍혀 있었다. 반면 그래픽 디자인의 기본 요소를 설명하고 있는 풀린의 책은 내 손에 들어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책은 첫장을 점에 할애해놓고 있다. 나는 그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점의 얘기를 읽다가 그 설명으로 달수들의 표지에 찍힌 다섯 개의 점을 읽었다. 그렇게 표지를 읽는 것도 가능했다. 아울러 컬러, 즉 색도 풀린의 책 6장에 할애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을 읽고 난 뒤에도 그 설명대로 『달수들』의 보라를 읽었다.
점에 관한 풀린의 얘기중 가장 눈에 들어온 대목은 “점이 정밀한 위치를 가리키는 추상적 개념일 경우, 점은 보거나 느낄 수 없다”는 대목이었다.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선이나 면이다. 점이 움직이면 그 움직임의 궤적을 따라 선이 생기고 우리는 그때 선을 보거나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시각적 요소가 되려면 최소한 선이 되어야 하는데 점은 아직 선이 아니어서 점이 순수한 위치나 지점의 개념이라면 그때의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픽 디자인은 시각적으로 소통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으면 거의 소용이 없다. 때문에 그래픽 디자인에선 보이지 않는 점도 시각화한다. 그래서 우리들이 점을 찍어 점으로 보는 점이 탄생한다.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점을 시각화하여 볼 수 있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그것이 디자인의 세계이다. 『달수들』은 그 점을 무려 다섯 개나 찍어놓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나면 우리 눈에 안보이는 이 세계의 어떤 단면이 다섯 개나 보일 수도 있다.
풀린은 점이 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련의 점은 선을 만들어낼 수 있고, 점이 집단으로 모이면 형태나 결, 색조, 문양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선은 연속된 선이라기보다 가까이 바짝 붙어서 늘어선 점들이 될 수 있다. 선은 그 점들이 흩어지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줄을 지어 늘어선 사람들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아울러 면도 수많은 점들이 모인 것일 수 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모여서 면을 이룬 점이다. 우리는 때로 면을 이루어야 할 때가 있다. 그때가 오면 잠시 점의 정체성을 면에 양보한다. 『달수들』은 점들이 모인 집단적 시위의 현장일 수도 있다.
반대의 얘기도 나온다. “중심을 가진 면에서 면의 중심은 면이 아무리 커도 점으로 표시가 되며” 이런 중심 개념으로 점을 표시했을 경우에는 그 점이 “시각적으로 아무리 커도 점으로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작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내가 『달수들』의 표지에서 점들을 구멍으로 보지 않고 점으로 본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달수들』은 다섯 개의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이 경우 중심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중심이 다섯 개나 되면 그때부터는 균형이 중요하다. 그래야 책이 흔들리지 않는다. 균형이 무너지면 책을 읽는 동안 자꾸 이야기가 불안하게 흔들릴 수 있다. 이 책의 균형 여부는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표지는 잘 균형이 잡힌 느낌이었다.
『달수들』의 표지에서 점들은 아울러 선의 일부로 보인다. 상하와 좌우로 비스듬하게 엇갈리며 교차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제목은 아래쪽으로 희미하게 비치고 있다. 위아래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적당히 가운데를 분기점으로 아래쪽이 수면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 분기점이 그리 명확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 분기점이 분명했다면 점을 찍는대신 아마 선을 그었을 것이다. 우리는 흐릿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물위와 물속을 오가며 소설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우리는 물위에 있는가 하면 물속으로 들어와 있고, 물속에 있는가 싶으면 어느새 물밖으로 나와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선 잠수복이나 수영복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색으로 넘어가 보자. 표지의 전체적인 색조는 보라색이다. 색은 일차적으로 색조로 파악이 된다. 색조로만 보자면 보라는 가시광선의 스펙트럼 가운데서 한쪽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 색이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외선와 맞붙어 있는 경계지대의 색이다. 자외선은 몸에 해롭다. 소설을 읽을 때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르고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색의 또다른 요소로는 명도가 있다. 색의 밝기이다. 『달수들』의 보라는 그렇게 밝지도 그렇게 어둡지도 않다. 엄격한 분석을 위하여 정체를 나만 알고 있는 어느 얼렁뚱땅 과학 실험실에 의뢰하여 측정해본 결과 가장 밝은 경우를 100이라고 했을 경우, 『달수들』의 보라는 그 밝기가 50으로 측정되었다. 『달수들』은 낮에 읽어도 소용없고, 또 밤에 읽어도 소용이 없으며, 낮과 밤이 바뀌는 딱 중간에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보라의 밝기가 딱 중간이었기 때문이다. 조도로 열쇠를 삼아야 하는 소설이 처음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채도가 있다. 색의 탁한 정도를 뜻하는 것으로 회색이 얼마나 색에 섞여 있는가를 뜻한다. 회색이 많이 섞이면 순도가 떨어진다. 순도가 떨어지면 회색분자에 가까워진다. 그렇다고 순색이 반드시 좋다는 뜻은 아니다. 『달수들』의 보라는 그 순도가 100은 아니다. 역시 같은 과학 실험실에 의뢰한 결과 그 값은 정확히 98이었다. 말하자면 2퍼센트의 불순물이 섞인, 그러나 거의 순수에 가까운 보라이다. 따라서 텍스트는 아마도 상당히 순수할 것으로 보인다. 대개 순수는 현실 쪽으로 가까이 가면서 탁해진다. 그렇게 보면 『달수들』은 현실에서 너무 먼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2퍼센트는 현실이 섞인 얘기일 수도 있다. 때로 98퍼센트의 순수가 있어 2퍼센트의 현실을 제대로 감지해 낼 수도 있다.
책이 안오니까 계속 인터넷의 온라인 서점에 올라온 책의 표지만 읽게 된다. 곧 책이 올 것이다. 이제 이 작업의 다음 순서는 드디어 실체로서의 책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단은 표지로 제한될 것이다. 일단 표지로 시작해서 그런지 표지로 무엇인가를 마감하고 싶어졌다.

3. 책을 받고 난 후
책이 왔다. 당혹스러웠다. 점이 작가의 말대로 점이 아니라 구멍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가 미리 구멍이라고 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지의 점 다섯 개를 계속 점이라고 우기며, 표지를 다섯 개의 점에 주목하여 읽었다. 그러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점은 분명 구멍이었다. 그러나 내게서 그것이 위치로서의 점이 아닐까 하는 의혹은 쉽게 지워지질 않는다. 왜냐하면 구멍은 결국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위치로서의 점을, 구멍의 비어있다는 느낌으로 더욱 강화한 또다른 시각적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에게 구멍은 다시 점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제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구멍이기도 하기에 그 위치에서 우리들이 다른 세계로 잠입할 수 있는 일종의 입구가 된다. 입구는 다섯 개이다.
다시 말하여 안성호의 소설 『달수들』은 가시광선의 스펙트럼에서 한쪽 경계로 치우친 보라색의 세계에 서 있으나 다섯 개의 위치에서 그 가시광선의 스펙트럼 가운데로 위치한 노랑의 세계로 잠입할 수 있다. 표지는 그 세계에 곰이 산다고 말해주고 있다. 노랑은 정확히는 노란색의 문양이다. 그 문양은 고흐의 그림에서 접할 수 있는 그만의 붓터치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노란색의 세상은 고흐의 세상이다. 고흐의 세상에선 빛이 깃털이 된다. 말하자면 고흐의 세상에선 태양이 빛난다는 것이 빛의 깃털이 세상으로 나르는 순간이며, 빛이란 깃털만으로 이루어진 새이다. 그러니 『달수들』에서 우리는 가시광선의 한쪽 경계에 자리한 보라의 세계에서 일정 지점을 통하여 깃털만으로 이루어진 새의 세상으로 들어가 곰을 만나게 된다. 곰은 사실 위험한 동물이다. 미리 그 위험에 대비해야할 지도 모른다.
뒷표지엔 점이자 구멍이 딱하나 뚫려있다. 뒷표지에 있으니 출구일 것이다. 입구는 읽는 사람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섯일 수 있으나 출구는 하나이다. 출구가 하나이니 어떻게 책을 읽든 우리는 출구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책이 없던 나는 이틀 동안 책의 내용은 읽질 못하고 책의 표지만을 읽었으며, 책을 받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속을 들여다보지 않은채 표지만 열어 앞표지의 속표지만 읽었다. 그리고는 책을 뒤집어 또 책의 뒷표지만을 읽고 책을 덮었다.
이상하다. 표지만 읽었는데도 일단 책을 한 권 다 읽어본 느낌이다. 하지만 여전히 책은 읽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어쨌거나 책표지를 다 읽었으니 이제 슬슬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안성호, 『달수들』, 문학과지성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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