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하늘을 나는 꿈을 무던히도 많이 꾸었다.
왜 그렇게 날고 싶었던 것일까.
날고 싶다는 것은 박제된 자의 욕망이다.
지상의 걸음이 불편한 새는
안정된 인간의 보행을 부러워 할지도 모를 일인데
그토록 날고 싶었던 것은
나의 삶이 박제되어 있다는 불편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아마도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스스로를 박제된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제 멋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하면서 사는 삶으로 보였을 테니까.
상대방이 누구이든 말도 별로 가리지 않는 것 같고.
그런데도 뭐가 힘든 것일까.
나는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나의 불만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들면서 체념의 미덕을 뼈져리게 깨달아가고 있지만,
그리고 그 덕에,
대부분의 불만을 체념으로 넘기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불만을 깨끗이 잠재우는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 불만이 외부의 대상을 겨냥하고 있을 때면
더더욱 힘겹기만 하다.
불만이 나를 겨냥하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나를 바꾸어 볼 수도 있겠지만
불만이 외부의 누군가를 겨냥하게 되면
그저 불만만 잔뜩 쌓아갈 뿐 달리 방법이 없다.
대상을 멀거니 바라보며
불만만 잔뜩 축적한채 살아갈 수밖에 없을 때
나는 나의 삶을 박제된 삶처럼 느낀다.
바로 그 때면 불현듯 새가 그립고, 또 부럽다.
박제된 삶의 속박을 한순간에 뿌리치고 싶은 것이리라.
바꿀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있을 때,
그것을 툭툭 털어버리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속편한 태도라고나 할까.
하지만 박제된 자는
자기 자리를 떠날 수도 없다.
그 자리에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자꾸 날자, 날자꾸나를 주문처럼 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