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5월,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간 적이 있었지.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나와,
이곳을 봐도 바다고, 저곳을 봐도 바다가 되었을 때,
뱃전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너무도 투명했어.
그냥 그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었어.
그건 바다 속에 빠져 죽고 싶었다는 얘기는 아니야.
나는 그저 그렇게 바다 속으로 뛰어들면
푸른 투명이 될 것만 같았어.
그렇게 푸른 투명이 되어
제주와 완도 사이를 푸르게 넘실거릴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어느 해, 눈소식이 있던 날,
강변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오대산에 간 적이 있었지.
오대산에 가려면 일단 진부가는 버스를 타야해.
그 다음엔 진부에서 상원사가는 버스를 바꾸어 타고
절까지 한달음에 올라가게 되지.
거기서부터 나는 터덜터덜 적멸보궁까지 걸어 올라갔었어.
눈발은 계속 되었고, 세상이 온통 하얗더군.
오대산 산꼭대기로 가는 길에 발자국 하나 없었지만
난 그 길을 따라 하얀 눈꽃 세상으로 사라지고 싶었어.
그건 눈 속에서 얼어죽고 싶었다는 얘기는 아니야.
나는 그저 그렇게 눈 속을 걷고 걷고 또 걷다보면
나도 세상에 엎드려 흰 눈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어.
그렇게 흰 눈이 되어 세상에 엎드려 있다가
다시 따뜻하게 햇볕이 드는 날,
부신 듯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스르르 녹아
내 흔적 모두 하나 남김없이 거두어
땅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어.
이 달 11일에 전북 김제의 금산사에 갔었지.
절마당에 붉은 단풍이 몇 그루 있었어.
넋을 빼고 한참 바라보니 불타는 듯 하더군.
나는 그 단풍나무 아래 몸을 묻고 싶었어.
그건 멀쩡히 살아있는 몸을 그 아래 생매장하고 싶었다는 얘기는 아니야.
나는 그저 그렇게 단풍나무 아래 몸을 묻으면
나도 붉은 가을이 될 것만 같았어.
그러면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바람을 타고
붉은 가을로 우수수 우수수 날릴 것만 같았어.
생각해보니 나는 가끔 푸른 투명이 되고 싶고,
흰 눈이 되고 싶고,
또 붉은 가을이 되고 싶었어.
4 thoughts on “붉은 단풍 앞에서”
저도 오대산 입구의 거목들 있는곳에서 신나게 눈싸움하던때 그 하얀 담요같은 눈속을 뒹굴고 싶을정도로 좋았는데 다시 가볼 기회가 없네요.^^
근데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 가려면 멀미 않던가요?
저희 가족은 배 타고도 한번 가볼까 하다가 멀미가 무서워 포기했는데.ㅋㅋ
멀미를 전혀 안해서요.
멀미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요.
흔들리면 더 좋아하죠, 재미나다고.
물들겄네…
남쪽은 단풍이 좀더 예쁘게 물들었나봐. 참 예쁘네^^
글을 완성한 순간 이미 충분히 푸른 투명도 되고,
흰 눈도 되고,
붉은 가을도 되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방에 앉아 일하면서도
푸르게 넘실대고,
흰눈으로 누웠다가,
또 붉은 가을로 날리고 있습니다.
내 방문 열었을 때 나는 없고
푸른 투명만 가득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흰눈이 와르르 쏟아져도 놀라지 마십시오.
붉은 단풍이 타고 있어도 놀라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