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물으며 돌아본 빛나는 시의 언어들 —계간 『문예바다』 2016년 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6년 봄호
『문예바다』 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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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란 무엇인가. 계절의 하나라는 쉽고도 간단한 대답이 있을 수 있다. 누구나 내놓을 수 있는 답이다. 대답이 너무 간단하면 민망해지기 쉽고, 그리하여 그 민망함을 덜어보기 위하여 계절이 봄으로 열리고 겨울로 마감이 된다면 매해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에서 마지막 계절이 겨울이라고 좀더 길게 말을 덧붙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내 기대를 채워줄 대답은 아니란 얘기이다. 그러면 나는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그 질문을 던졌던 것일까. 나는 겨울이란 그 말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하게 빛나게 해줄 대답을 기대하며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언어는 그랬을 것만 같다. 처음 태어나던 순간에는 자신이 지시하는 대상을 환하게 비추면서 언어라는 이름의 빛으로 우리들의 눈을 말할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채워주지 않았을까. 어느 날 두 글자의 말이 나타나, 날씨는 쌀쌀하게 가라앉고 세상 모든 것이 얼어붙으며 나무들은 잎을 모두 털어낸 빈 가지로 한동안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러면서도 가끔 눈발이 날려 우리들을 환호하게 만들어주는 계절을 가리켜, 겨울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별처럼 환하게 빛나며 겨울을 밝혀주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세상의 모든 말들은 태어나던 순간에는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을 환하게 가리키며 별처럼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말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일상이 되면서, 일상이 많은 것을 집어 삼키듯, 그 태초의 반짝이던 빛을 잃어버렸다. 때문에 이젠 말들이 빛나려면 다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나는 물론 일상의 습관으로 빛을 잃어버린 말들이 다시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고 믿고 있다. 내게 있어 그건 시인들이 세상의 말들에 손을 대는 순간이기도 하다. 계간지의 겨울호에서 시를 읽어가던 내가 겨울이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내 기대는 겨울이란 언어에서 발하는 반짝이는 빛을 그 대답으로 듣는 것이었다. 과연 있었을까. 놀랍게도 있었다.

겨울은 서로 닮아서 가운데 그쯤 누가 있지 않으면 분간하기 어렵지 눈이 내렸고 쌓였고 그쳤고 녹기도 했으며 한 자 한 자 오래 걸려 적는 사람처럼 당신처럼 있다 나는 나는 거기까지 오래오래 걸어다녀 온 기분, 그랬다
—유희경, 「겨울은 겨울로 온다」(『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부분

유희경은 “겨울은 서로 닮았다”고 했다. 나는 이를 겨울에는 모든 것이 서로 비슷해진다로 고쳐 읽었다. 잎이 피고 꽃이 피면 완연하게 제 모습을 주장할 나무들이 겨울에는 가지만을 남긴채 서로 비슷해진다. 그러니 겨울은 서로 닮아서 분간을 할 수가 없는 계절이다. 그러나 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이 똑같이 닮았어도 내 사랑을 분간하게 해주는 힘이다. 겨울엔 그게 어렵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닮은 그 가운데 서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간격을 좀더 좁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이 닮은 그 겨울에 오히려 당신이 서 있는 “거기까지 오래오래 걸어다녀온 기분”으로 당신을 확연하게 구분해내며 그 겨울을 넘길 수 있다.
나는 겨울이란 두 글자의 말이 반짝이며 빛을 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개 겨울에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말이 흔했으나 그것은 추위를 이기려면 둘의 체온이 필요하다는 체온의 효용성에 기반한 얘기들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희경이 말하는 겨울에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겨울이 서로 닮아서 세상의 모든 것이 비슷해지고, 그런 이유로 세상의 모든 것을 분간할 수가 없는 계절이지만, 그 비슷함 속에서 우리의 사랑을 구별해내는 힘을 갖게 되는 계절이 또한 겨울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이제 막 새롭게 탄생한 겨울에 관한 태초의 언어였다. 그러니 겨울의 사랑을 말하는 그의 시 속에서 겨울이란 말이 어찌 반짝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겨울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유희경에게서 그 대답을 듣는 것으로 2015년 계간지의 겨울호에서 시를 읽는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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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시작한 이 여정에서 내가 읽은 다음 시는 신철규의 「커튼콜」이다. 커튼콜이란 연극과 같은 무대 예술에서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이 환호와 박수로 공연에 대한 찬사를 보내면 출연자들이 다시 나와서 인사하는 것으로 이에 호응하는 것을 말한다. 제목만으로 보면 이 시의 무대는 어느 연극 공연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바닷가이다. “파도는 금새 의자를 덮칠 것이다”라는 문구나 “재잘거리며 파도와 장난치던 아이들/모래무덤 속에 들어가 누워 있던 사람들”이란 문구가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시간은 노을이 지고 있는 저녁 때이다. 시간대에 대한 짐작은 “하늘과 땅 사이에 칼이 물려 있”고 “석양의 발꿈치가 칼에 닿자 피가 번진다”는 문구에서 가능했다. 시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바다는 여전히 육지로 밀입국을 시도한다
파도는 철조망까지 닿지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을 모래에 묻는다
파도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신철규, 「커튼콜」(『문예바다』, 2015년 겨울호) 부분

그렇다면 왜 커튼콜일까. 시의 내용에 충실하자면 어느 날의 바닷가 풍경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커튼콜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시인은 바닷가에 서 있다. 그 바닷가는 대낮에는 사람들로 들끓었으나 저녁이 되면서 “누군가 사람들을 지워 버”린 듯 텅비어 버렸다. 그리고 그 바닷가로 파도가 계속 밀려들었다 밀려가고를 반복한다. 파도는 마치 커튼콜 때 손에 손을 잡고 나오는 배우들처럼 길게 띠를 이루며 몰려온다. 텅빈 바닷가는 막이 내린 무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얀 거품을 띠처럼 이루며 밀려오는 바다는 손에 손을 잡고 나와서 인사를 하는 커튼콜의 배우 같지 않았을까. 그 순간 그 바닷가에서의 하루가 마치 종일 진행된 한편의 연극같지 않았을까.
시는 바닷가에서 바다가 아니라 연극 한편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시가 가진 전환의 힘으로 그때 바닷가에서의 하루는 얼마든지 바닷가의 풍경이 아니라 한편의 연극으로 바뀔 수 있다. 당연히 커튼콜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김영미의 「사이클」은 신철규와는 반대로 접근해야 한다. 신철규의 시가 바닷가의 풍경을 연극 무대로 올려놓고 있는데 반하여 김영미의 시가 시작되는 곳은 이미 영화 속이다. 이런 경우 시의 독자들은 난감할 때가 많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엔 그 시의 상황을 공유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소년이 자전거에
에로틱을 싣고 달린다

덜렁거리는 에로틱
떨어지려는 에로틱

소년은 멈춰 에로틱을 다시 묶는다
—김영미, 「사이클」(『문예바다』, 2015년 겨울호) 부분

김영미는 주를 통하여 이 시의 시작이 일본의 영화 감독인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경우 영화는 시의 현실이 된다. 바닷가라는 장소와 비교하면 그 현실에 대한 공유의 폭은 급격히 줄어든다. 오직 영화를 본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현실이며,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그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 영화 속에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영화 밖의 사람들에겐 짐작이 불가능하다. 이 시에선 ‘에로틱’이란 말이 그렇다. 영화 밖, 즉 이 시의 현실 바깥에 선 사람들에게 에로틱이란 말은 말 그대로의 에로틱이다. 에로틱이란 말은 느낌이다. 대상에서 어떤 선정적 느낌을 가질 때 대상은 에로틱한 물체가 된다. 그러므로 시에서 소년은 에로틱이라는 느낌을 싣고 달리는 중이 된다. 느낌을 싣고 달리다니.
그러나 자리를 시의 현실 바깥에서 시의 현실, 즉 영화 속으로 옮기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현실 속에서 에로틱은 느낌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물질적 대상이 된다. 영화, 다시 말하여 시의 현실은 그것이 영화속 등장인물인 가수 릴리 슈슈의 앨범 제목이며, 좀더 구체적으로 소년이 자전거에 싣고 달리는 것이 앨범 재킷의 포스터로 만든 커다란 홍보용 판넬이란 것을 알려준다. 그 판넬의 이미지는 사실 그렇게 에로틱하지도 않다. 시의 현실, 그 속에선 소년이 그냥 그 판넬을 싣고 달리고 있을 뿐이다.
김영미의 시에서 우리들은 시의 현실, 그 바깥에 있을 때와 안에 있을 때 시 속의 말이 그 경계를 사이에 두고 느낌와 물질 사이를 오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시인이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독특한 경험임에는 틀림없다.
김영미의 경우와 비슷한 예를 송승언에게서도 볼 수 있다. 시의 제목은 「테레민」이다. 테레민이 무엇인지 시의 제목을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지금은 찾으면 다 나오는 시대이다. 몰라도 쉽게 알 수가 있다. 테레민은 러시아의 물리학자 레온 테레민이 발명한 전자악기이다. 악기의 양쪽으로 두 개의 안테나가 있고, 이 안테나에서 발생하는 전자기장을 손으로 간섭하여 소리를 낸다. 나는 웹에서 동영상을 찾아 그 연주도 보고 또 들어보았다.
송승언의 「테레민」은 “너를 들으며 너를 생각해”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나는 테레민을 지우고 이 구절을 읽어본다. 그러면 너의 얘기를 들으며 너를 생각해라는 달콤한 얘기로 전환될 여지가 커진다. 듣기에는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인터넷을 이용하여 테레민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그러자 너의 자리를 테레민이 구체적으로 차지하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테레민 연주를 들으며 테레민이 무엇인가를 골똘이 생각하고 있는 시인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큰 변화를 몰고 온다. 어떤 음악의 연주와 연주 악기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연주를 들으면 연주되고 있는 음악을 생각해야 하는데 이 경우는 그렇질 않다. 연주를 들으며 악기를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악기가 낯설 경우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익숙한 악기, 가령 예를 들어 연주되는 악기가 피아노나 바이올린과 같이 널리 알려진 낯익은 악기라면 아무도 연주를 들으며 악기를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그 경우 우리는 악기로 연주되고 있는 곡에 집중한다. 그런데 악기가 낯설면 연주 자체에 집중을 하지 않은채 악기에 주목을 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연주인데 악기의 낯섬과 그것이 불러온 호기심이 연주에 내주어야 할 우리의 귀를 가로막고 자꾸 악기로 시선을 끌어간다.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 형태가 아닐까. 이는 너의 얘기를 들으며 너를 생각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사고의 형태 같지만 과연 그럴까를 묻는 반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버지는 뭐하시니, 학교는 어디 나왔니, 집은 있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묻는 질문이 연주가 아니라 악기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악기가 아니라 그 사람이 연주하고 있는 그 사람의 음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고 듣는 그 물음과 대답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송승언의 시는 이렇게 마감된다.

…(전략)너를 들으며 너를 생각해 너를 들으며 나를 생각해
—송승언, 「테레민」(『작가세계』, 2015년 겨울호) 부분

나는 “나를 생각”한다는 시인의 말을 연주가 아니라 악기에 몰두하다 문득 그런 자신을 깨닫게 된 순간으로 읽었다. 그 자리에서 말들이 반짝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의 공간이 시인이 서 있는 바닷가, 시인이 보고 있는 영화 속, 혹은 시인이 연주를 듣고 있는 어떤 악기 앞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시의 공간은 공간을 초월한다. 전욱진의 시 「아프리카 커피 자루」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지금 시인의 앞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갈색 자루’가 놓여있다. 자루에는 “아프리카 앵무새가 그려져 있고/자루 안에는 커피콩이 그득하다.” 커피콩은 “연둣빛이 도는 마른 풀 색깔”을 띄고 있다. 그것을 커피콩이 아니라 “생두라고 부르면 흙냄새를 풍긴다.” 나는 처음에는 이 구절은 거꾸로 읽었다. 자루 속의 커피콩에서 흙냄새가 날 때가 있으며, 그렇게 흙냄새가 날 때면 커피콩보다 생두라고 부르는 것이 그 흙냄새에 더 어울린다로 읽은 것이다. 시인은 나와 달리 그 순서를 뒤집고 있다. 왜 시인은 순서를 뒤집은 것일까. 그것은 내 방식이 일종의 순서에 따른 규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흙냄새가 먼저라는 이유를 들어 냄새를 맡고, 그 냄새를 바탕으로 커피콩의 이름을 생두로 규정하려 든다. 시인은 그런 규정이 싫다. 대신 시인은 커피콩을 생두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고, 그리고 흙냄새를 생두의 대답으로 듣고 싶다. 즉 나는 냄새 맡고 규정하려 드나 시인은 불러주고 듣고 싶다. 따라서 시인에게 있어 흙냄새는 냄새가 아니라 사실은 시인이 불러주는 생두라는 이름에 응답하는 커피콩의 언어이다. 규정의 습관에 묶인 나는 그 생두의 언어를 듣질 못한다. 규정의 습관을 버린 시인은 그 생두의 언어를 듣는다. 나는 얼른 내 습관을 버리고 시인의 언어로 바꿔탄다. 그리고 생두라고 불러본다. 흙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지나간다. 덕택에 나도 생두의 언어를 흙냄새로 듣는 아주 희귀한 기회를 갇는다. 이것만으로도 가슴이 들뜰만한 경험이다. 그런데 또다른 경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전욱진은 지금 생두에서 “썩은 콩”이나 ‘조각돌,’ ‘벌레’ 먹은 것들을 골라내는 중이다. 그러다 보면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나오기도 하는”가 보다. 시인은 그 머리카락을 “적도에 사는 여자의 새치”라고 말한다. 그 “새치를 뽑으며” 시인은 “흙냄새 나는 갈색 집을 생각한다.” “커피콩 같은 아이들이 그녀를 기다리는 곳”이다. 시인은 그 생각 속에서 훌쩍 아프리카로 날아간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아프리카 여자를 만나고, 그 품에서 “그윽하게 자란” 그녀의 ‘첫째’ 아이가 된다. 이제 아프리카 여자는 그녀의 엄마이다. 그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오셔서 저녁을 나눠 주고
마른풀을 태워 마시면 내일도 죽지 않는다고 하신다
—전욱진, 「아프리카 커피 자루」(『실천문학』, 2015년 겨울호) 부분

커피콩이 가득 든 “갈색 자루는 먼 곳에서” 오지만 전욱진은 그 아득한 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아프리카로 가고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단순한 기호 식품을 넘어 커피 농장에서 아이들을 위해 일했을 한 아프리카 여자의 아이들 중 하나가 된다. 공간의 제약을 훌쩍 넘어 커피콩으로 맺어지는 이 만남은 시 속에서나 가능하다. 오늘 커피를 마신 우리는 그 커피 한 잔의 힘으로 내일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 커피가 아니라 아이들의 저녁을 위해 오늘 커피 농장에서 일한 엄마의 사랑이며, 시인은 먼 곳에 있는 그 엄마의 또다른 자식이기 때문이다. 시의 놀라운 순간이다. 아프리카의 엄마는 자기 자식을 위해 일했을 것이나 시인은 그 일이 그 엄마는 알지도 못할 아시아의 한 귀퉁이, 한국의 또다른 자식을 위한 사랑이었음을 눈치챈다.
시가 공간을 초월하여 이곳에서 커피콩을 고르면서 아프리카로 훌쩍 날아갈 수 있도록 해주긴 하지만 사실 그때의 우리도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커피잔을 들고 있다. 때문에 너무 오래 아프리카에 머물 수는 없다. 시인을 따라 아프리카까지 갔던 나는 다시 우리가 사는 곳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내가 마주한 것은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우리 삶의 한 단면이었으며, 구체적으로는 그 삶은 여성의 삶이었다. 그것을 펼쳐보인 것은 이민하의 「유리 만담」이다. 그나저나 개그도 아니고 만담이 뭐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담이란 철지난 냄새를 물씬 풍긴다. 때문에 나는 이 시의 제목을 시의 내용이 상당히 철이 지난 듯한 느낌을 풍기는 웃기는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여전한 우리 곁의 현실을 보게 될 것이란 예고로 받아들였다.
시는 “큰소리 내면서 깨지는 건 싫습니다/그러나 큰소리 낼 이유가 없다면 깨질 이유도 없다는 이웃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이웃은 오래 살았으니까/이웃에 귀 기울이면 깨질 일이 없고”라고 시작한다. 제목으로 미루어 보면 깨지는 건 표면적으로는 유리이다. 그러나 시를 모두 읽고 나면 그것이 결혼이나 연애로 맺어진 남녀 사이가 아닐까하는 어렴풋한 짐작이 가능해진다.
유리가 깨지면 우리는 유리가 깨진 책임을 유리에게 묻진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원인을 바깥에서 찾는다. 유리를 향하여 돌을 던진 누군가를 찾는 식이다. 그러나 남녀 사이가 깨진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남자가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말하자면 남자가 유리를 향하여 돌을 던져 유리가 깨지고 그리하여 둘의 사이가 끝났을 때는 이상하게 거의 뒤집어쓰듯 여자가 그 책임을 모두 감당하게 된다. “큰소리 낼 이유가 없다면 깨질 이유도 없다는 이웃의 말”은 그런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의식이다. 이러한 우리 이웃들의 의식은 현실에선 맞은 사람을 향하여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지라며 가해자가 아니라 폭력의 피해자를 손가락질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 이웃들의 세상에선 맞은 자는 두 배로 억울하다. 맞은 것도 억울한데 폭력 사태를 유발한 책임까지 져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목격에 따르면 이 땅에서 여자의 삶이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옆집 남자가 반짝반짝 구두를 닦을 때 옆집 여자는 돌아서서 그릇을 닦”고 “여자는 이불도 햇빛에 널어야 하고 퇴근 후엔 시장도 가야”하는 것이 결혼한 여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고 있는데도 결혼이 깨지면 책임은 여자에게 돌아가는 일이 흔하다. 시인은 묻는다.

그들 중 하나와 웨딩홀에 입장한다면
우리의 삶이란 고양이 발뒤꿈치를 닮아갈까요
—이민하, 「유리 만담」(『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여기서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다. 그러니 결혼식장으로 함께 걸어들어갈 “그들 중 하나”도 그 이웃들의 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경우 결혼을 하면 우리의 삶은, 좀더 구체적으로 여자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인은 “고양이 발뒤꿈치”를 닮아가지 않겠냐고 한다. “고양이 발뒤꿈치”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것을 키튼 힐(kitten heels)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고양이 발뒤꿈치를 영어로 치환하여 키튼 힐을 유추했으며, 그러자 한 여자가 내게 그것이 여자들이 신는 구두 중의 하나이고, 새끼고양이가 걷는 걸음걸이를 보여주는 듯한, 살짝 높으면서도 굽의 높이가 보통 5cm 미만인 힐이라고 말해 주었으며, 대개 그 정도면 여자들이 신고 걷기에 편한 신발에 속한다고 했다. 그러나 시에선 새끼고양이가 아니라 그냥 고양이이다. 그러니 굽의 높이가 좀더 높을 것이다. 아울러 고양이가 걷듯이 걷는다는 것은 우아해 보일지는 몰라도 걸음걸이 자체는 매우 힘겨울 수 있다. 우린 고양이가 아니라 직립 보행이 더 자연스러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그런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아해 보이나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고양이 걸음을 걷는 일일 수 있다. 불안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또 묻는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우리 사이엔 무얼 끼워야 하는 걸까요”라고. 시인도 알고 있다. 결혼한 사람들의 사이가 삐걱대며 흔들릴 때가 있다는 것을. 그때 ‘뽁뽁이’ 같은 것이 둘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다. 결혼한 사이에선 아이들이 그 역할을 한다. 그 둘을 묶어 시인은 “가령 뽁뽁이 같은 아기 엉덩이랄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도 여전히 깨지기도 한다. 이제 이웃들은 말한다. “깨지고 나면 별 볼 일 없다”고.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연인들은 끝이 없을 듯 노래 부르”며 결혼이나 연애에 빠져드는 것이 사랑하는 남녀의 현실이지만 정작 그 사랑의 현실적 단면도는 암담할 때가 많다. 특히 둘 사이가 깨졌을 때, 여자 입장의 현실은 더더욱 암담하다. 그런데도 왜 자꾸 이 사회는 여전히 결혼 결혼하면서 결혼을 강요하는 것일까. 이민하가 묻는다. “어둠의 끝까지 쌓이면 우리는 밤하늘이 됩니까”라고. 그 암담한 현실이 쌓이면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라도 닿을 것 같냐고 묻는 것 같았다. 삶이 정말 한편의 만담같다.
이제 마지막으로 황인찬의 시를 살펴보려 한다. 「죄송한 마음」이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난겨울에는 많이 슬펐습니다 식은밥을 미역국에 말아 먹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저는 자주 헷갈립니다/숟가락에 붙어버린 미역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입으로 떼어 먹으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국물에 풀어버려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그리고 말한다.

죄송합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황인찬, 「죄송한 마음」(『문학동네』, 2015년 겨울호)

죄송합니다란 말은 다시 반복된다. 마지막엔 정말이란 말이 덧붙여져 “정말 죄송합니다”로 강조가 된다. 나는 궁금했다. 무엇이 죄송하다는 것일까. “식은밥에 미역국을 말아 먹었”던 것이 죄송하다는 것일까. 그게 죄송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혹시 시인의 죄송이 이 시대가 젊은 세대에게 강요한 어떤 굴종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음에게 무엇을 하든 죄송한 마음으로 살도록 어떤 태도를 강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밥을 하나 먹는데도 죄송한 세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시인은 “더이상은 슬퍼지지 않습니다”고 하면서도 다시 또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한 세대를 그렇게 만든 시대에 그만 내가 슬퍼지고 말았고, 나아가 그들에게 내가 죄송스러워 졌다. 미안하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어서. 무슨 혜택이라도 하나 받으려면 내가 낸 세금으로 받는 것임에도 마치 황제의 시혜품이라도 받듯 굽신거려야 하는 시대이긴 하다. 황인찬의 시 읽기는 그가 죄송하다고 하는데도 그에 대한 나의 미안으로 마무리되었다.

3
계간지의 겨울호에 실린 시들을 읽으며 겨울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시로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시란 오랜 세월에 걸쳐 일상의 소통어로 굳어지면서 빛을 잃게 된 언어에 다시 빛을 불어넣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행복하게도 다시 빛을 반짝이고 있는 언어들을 만났다. 내가 그 언어의 빛들을 돌아보는 동안 한 시인이 오래 전엔 이런 일들이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알려주었다.

태평양전쟁, 유년 시절에 거치고
소년 시절엔 6·25
청년 땐 4·19와 5·16을 맞고 겪으며
매끄러운 삶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번역 책이 별로 없던 시절
집과 동네에서 혀에 굴려보지 못한 거북한 언어로
조이스, 랭보 또는 만젤스탐을 읽다 말고
언 땅에 얼굴 비빈 적 한두 번인가.
—황동규, 「폴 루이스의 슈베르트를 들으며」(『문학과사회』, 2015년 겨울호) 부분

더이상 거북한 언어를 혀에 굴리며 언 땅에 얼굴을 비빌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오래 전에는 우리의 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언어에서 빛을 보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의 말들이 드디어 자연스런 우리의 언어로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었다.
(『문예바다』, 2016년 봄호, 시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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