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매력적인가 —사회 변화의 양상과 엮어서 막연하게 짐작해 본 어떤 시인들의 대중적 인기와 그 연유

『포지션』 2016년 봄호
『포지션』 2016년 봄호

1 그들의 매력에 대한 두 가지의 짐작

내가 전해 들은 얘기는 그들의 시집이 잘 팔린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사람들이 시집 부문의 베스트셀러를 떠올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집은 그런 시집이 아니다. 그들의 시집이 잘 팔린다는 것은 잘 팔릴 것 같지 않은데도 잘 팔리고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나는 시는 좋고 뛰어나나 잘 팔릴 것 같지 않은 시집들은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시집들 가운데 어떤 시집이 많이 팔리고 있는지에 대해선 전혀 현실적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말을 전해들은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면 그들의 시가 누리고 있는 대중적 인기를 사회적 맥락에서 짚어줄 수 있겠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나는 그렇게 해주면 그때는 부탁하는 작업을 해볼 수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리하여 시인 다섯 명의 이름이 내 손으로 넘어왔다. 그들 다섯은 황병승, 김경주, 이제니, 송승언, 황인찬이었다. 내게는 자유롭게 내 판단에 의해 이들 이외에 다른 시인을 함께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으나 시집 판매에 대한 정보가 없는 나로선 이들 다섯 시인 이외에 다른 시인을 추가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나의 작업은 이들 다섯 시인의 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터넷을 통하여 이들의 시집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황병승은 2007년 그의 두 번째 시집이 나올 때의 기사에 2005년에 나온 그의 첫 시집이 그 해에 5쇄를 찍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김경주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는 1만부 이상이 판매되었으며, 시집으로서는 이례적인 인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이제니의 두 번째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는 7천부가 나갔다는 기사가 있었다. 황인찬은 첫 시집이 7천부, 두 번째 시집이 두 달만에 5천부 넘게 팔렸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송승언의 첫 시집 『철과 오크』에 대해선 출간 한 달만에 2쇄를 찍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들의 시집이 잘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광랜과 LTE를 자랑하는 속도의 나라에서 그게 무슨 일의 축에나 속하랴. 일단 반가웠다. 그러나 그 반가움은 의아함을 동시에 불러왔다. 이들의 시집이 어떻게 이렇게 많이 팔리지. 그 의아함은 그들 시의 난해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난해가 매력이 될 수는 없다. 읽어도 알 수가 없는 시들을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들의 시집은 잘 팔리고 있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왜 매력적일까? 내게선 두 가지 짐작이 가능했다.
첫째로는 그들에게 난해함의 이면으로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공감의 매력이 있을 수 있다. 나는 그 공감의 매력을 시대와의 호흡이 아닐까 짐작했다. 매력은 시간대로 보면 두 가지로부터 올 수 있다. 시간대가 과거로 향하면 그 매력은 향수에 대한 자극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이들 다섯 시인의 매력이 향수의 시간대와 자극에서 오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들이 시간대의 매력을 갖고 있다면 그 시간대는 오늘이거나 아니면 미래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매력의 시간대가 오늘이라면 그들의 시는 암암리에 우리가 사는 오늘을 가장 피부에 와닿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목소리가 될 수 있다. 아니, 목소리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으나 때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시간대는 여전히 과거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퇴행적 사회에서는 그런 느낌이 더욱 강화되며 그런 사회는 암암리에 우리의 숨통을 조인다. 이들의 시는 난해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그 난해함이 과거가 지배하는 사회에 뚫어놓은 오늘이란 시간대의 숨구멍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강요받으면서도 그들의 시로 인하여 오늘을 호흡한다. 당연히 매력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하여 그 시간대가 미래까지 확장되어 있다면 그들의 시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매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둘째로는 우리 사회가 그들의 난해함을 소화할 수 있는 충분한 독해력을 갖춘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의 시가 난해하다고 해도 그 난해를 읽어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그들의 시집은 얼마든지 팔릴 수 있다. 나는 이에 대해선 시를 읽는 양상의 변화라는 맥락에서 접근했다. 물론 그 양상을 나는 그들의 시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볼 생각이다.
일단 그들의 시대로 가보자.

2 그들의 시대

막연하지만 나는 그들의 시집이 잘 팔리는 이유를 그들의 시가 갖고 있는 그들의 시대에 대한 정서적 교감으로 짐작했다. 그들의 시대는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시대이다. 정서는 설명없이 우리들을 이어줄 수 있는 내면의 공통 분모같은 것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 정서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 그 변화의 진폭은 같은 시대를 두고 공감과 반발로 갈라설만큼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파독 광부와 베트남 전쟁의 시기를 배경으로 부산의 한 집안 가장이 겪었던 삶을 그려낸 영화 <국제시장>은 그 시기의 세대들에게 가슴 뿌듯한 위안이 되면서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 세대 밑에서 성장한 또다른 세대에게는 아버지 세대가 우리를 키우기 위해 이렇게 고생했구나 하는 정서적 공감보다 돈을 벌어다 준다는 이유로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웠던 그 아버지 밑에서 자라느라 우리도 개고생하며 컸는데 이 영화는 도대체 뭐냐는 정서적 반발을 부를 수 있다. 이런 경우 한 세대의 정서적 공감은 다른 세대에겐 정서의 강요가 될 수 있다. 과거의 세대는 위안받는다지만 그러면 오늘의 세대는 어쩌란 말인가. 혹시 팔릴 것 같지 않은데도 잘 팔리고 있는 시인들의 시집들이 오늘의 시대에 대한 정서적 공감의 매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떤 공통의 정서를 내세워 한 세대가 공감하기 힘든 정서를 강요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하자면 우리 사회에선 한 세대가 그 뒷세대는 공감하기도 힘든 정서를 내세워 그들 세대를 질질 끌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노르웨이 사람도 모르는 노르웨이 정서가
소녀를 질 질 질 끌고 다녔네
—황병승, 「세상의 멸망과 노르웨이 정서」 부분

이제 나는 그 답을 듣기 위해 그들의 시에서 그들의 시대를 읽어보려 한다.

2.1 커밍아웃의 시대

황병승의 시로 미루어 보면 그들의 시대는 커밍아웃의 시대이다. 숨겨둔 자신, 아니 억눌린 또다른 자신을 가진 시대가 그들의 시대이며, 그것을 숨겨두지 않고 세상에 드러낸 시대가 또한 그들의 시대이다.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예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황병승, 「커밍아웃」 부분

아마도 세대가 다른 정서로 읽었다면 뒤통수가 진짜라는 얘기는 사람들이 앞의 얼굴과는 다른 또다른 이면의 얼굴을 갖고 있다는 얘기로 일반화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커밍아웃」이란 제목은 그런 일반화를 가로막고 얼굴은 남자, 뒤통수는 여자로 그 해석을 제한한다. 즉 이 고백은 성소수자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겐 이 고백이 파격적으로 보이겠지만 이 고백은 쉽지가 않은 고백이다. 이 고백이 파격적으로 보이면서도 쉽지 않았다는 것은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라는 「여장남자 시코쿠」의 반문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시코쿠가 왜 의심하냐고 묻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 전까지 아무 의심이 없었던 나는 이 반문 때문에 덜컥 의심이 생기고 말았고, 그 의심을 풀기 위해 내가 알고 있는 일본인 친구 두 명에게 일본에 시코쿠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기에 이르렀다. 둘 모두, 시코쿠를 이름으로 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건 일본에 있는 한 섬의 이름이긴 하지만 그것을 이름으로 쓰는 일본인은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의 이름처럼 보이는데 여장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이름의 사람은 일본에는 없었다. 그것은 일본 얘기처럼 가장할 수밖에 없는 우리 곁의 존재였다. 우리 곁에 있는 분명한 존재이지만 마치 있지도 않은 남의 나라 사람의 이름처럼 위장을 해야 했던 사회적 억압이 만져진 순간이었다.
커밍아웃의 시대는 오늘을 살면서도 자신들을 지워야 했던 존재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존의 자리를 요구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민낯을 밝혀보라고 요구한 시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은 지키면서 동시에 공격에 나선 시대이다. 그들의 시대는 말하자면 “엄마는 아름답다 엄마는 맨들맨들하고 착하고 따듯하고 조용하고” 라고 한 세대가 가진 엄마의 정서를 인정하면서 또다른 세대가 갖고 있는 “그런데도 엄마는, 빌어먹을 년이다”(황병승, 「트랙과 들판의 별」)라는 또다른 정서를 함께 까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도발적으로 요구한 시대이기도 하다.

2.2 시차의 시대

1989년에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우리는 드디어 시차의 시대를 살게 되었다. 그 전까지 우리는 시차를 특권의 이름으로 경험할 수는 있어도 자유의 이름으로는 경험할 수 없었다.
시차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여행과 함께 온다. 그것도 비행기로 열시간이 넘는 먼나라로 여행하고 돌아왔을 때 확연하게 그것을 겪게 된다. 우리 몸이 기억하고 있는 아침과 저녁이, 저녁과 아침으로 뒤바뀌면서 원래의 살던 곳으로 돌아왔는데도 몸이 저녁에 일어나고 아침에 잠들려 한다. 물론 여행을 가지 않고도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 삶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차 탓은 아니다. 아마도 잘못된 습관이나 그렇게 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활 환경의 강요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시차는 다르다. 시차는 우리의 몸에서 아침과 저녁을 뒤바꾸는 힘이다. 우리는 여행과 함께 난생 처음 그 힘을 경험한다.
시차가 없었을 때는 어땠을까. 그때는 오늘이 과거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시차를 알고 난 뒤로부터는 오늘이 과거를 그대로 수용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시차는 몸으로 그 차이를 알게 만든다.

우리들이 유년에 날린 종이비행기는 대개 동화의 영역으로 날아갔다기보다는 사실의 이면에서 부유했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대개 동화의 영역에서 종이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은 이쪽의 현실이지만 현실의 영역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게 하는 것은 동화의 힘이라기보다는 어떤 시차의 부력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종이비행기가 우리들의 손끝에서 태어난 이미지를 따라가면서, 천천히 종이의 접선을 따라 만들어지면서, 몸체가 형성되면서, 생기기 시작하는 동력은, 동화의 영역이 아닌 시차의 내적 동력인 ‘부력’에서 오는 것이다…(하략)
—김경주, 「종이로 만든 시차 —에드거 앨런 포의 반올림한 산문풍으로」 부분

시차가 없던 시절의 우리에게 종이비행기는 동화의 세상이었다. 그것을 날리는 것도 동화의 힘이었다. 그러나 시차의 시대에 그것을 날리는 것은 시차가 만들어내는 힘, 바로 부력이다. 우리의 몸에서 아침과 저녁을 뒤바꾸어 놓은 힘이 종이비행기에선 동화의 힘을 부력으로 바꾸어 놓는다. 김경주는 그들의 시대가 바로 그 시차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들의 몸은 종종 저녁에서 아침을, 아침에서 저녁을 감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2.3 1인 가구의 시대

2012년의 통계이긴 하지만 1인 가구가 4가중 한 가구꼴에 이르렀다는 통계가 있다. 그만큼 혼자 사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는 뜻이다. 그동안 가구는 대개 가족의 형태를 띄었다. 그 가족의 아침은 어머니가 부엌에서 그릇들을 달그락거리며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로 시작되는 경우가 흔하다. 방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음식 냄새도 그 아침의 기억으로 한몫할 수 있다. 그러나 1인 가구의 아침은 그와는 확연하게 다를 수 있다. 이제니에게 있어 그 아침은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이다. 가족의 아침 식탁이 옥수수 수프로 채워지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때문에 시의 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혼자 사는군 하고 중얼거렸다. 가족 구성체의 아침이었다면 아침의 탁자는 대화가 전혀 없이 묵묵이 밥만 먹든, 혹은 단란하게 대화를 나누든, 어쨌거나 가족의 풍경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니의 아침은 자신이 먹고 있는 옥수수 수프랑 노는 자리가 된다.

국물도 있어요 국물도 맛있어요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흘리지 마세요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흘리면 슬퍼져요
나는 알갱이처럼 말을 아끼는 사람
—이제니,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부분

나는 혼자서 아침을 먹으면서도 그 아침에 참 잘 논다고 생각했다. 가족 공동체의 아침이라면 이런 아침 풍경의 시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사고의 변화를 부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기로 한다”(이제니, 「음지와 양지의 판다」)는 사고도 그런 변화의 하나로 짐작이 된다. 가족 구성원의 하나일 때는 가족의 이름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이해해야 하는 강요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때문에 이러한 사고가 쉽지 않다. 혼자 살아가는 삶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시의 정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런 사고가 시에 투영되어 있다면 혼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가족으로부터의 독립된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을까.

2.4 교묘한 모순의 시대

시가 시대의 불합리와 모순을 고발하면서 싸운 예는 많았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모순이 매우 교묘해진 시대이다. 모순을 말하고 고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모순의 교묘함까지 전할 수 있을까. 송승언에게서 그 예를 구할 수 있다.

숲의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고 부리에 침묵을 물고 있고
그보다 많은 잎들이 새를 가리고 있고
—송승언, 「철과 오크」 부분

말이 안된다. 시의 구절만으로 보면 시인은 숲 속에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동시에 “많은 잎들이 새를 가리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새가 보일리가 없다. 그러면 새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숲의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물론 보이지 않아도 무수히 많은 새들이 지저귀면 숲 속에 있는 수많은 새들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새들이 “부리에 침묵을 물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로 숲 속의 새들을 짐작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나는 원래의 상황은 시와는 크게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잎이 푸르게 우거진 무성한 숲이 적막에 쌓여 있었다 정도가 시인이 접한 실제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왜 시인은 그 적막한 숲을 보고 그 속에 있는 수많은 새들이 지저귐을 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시의 구절만으로 보자면 그것이 바로 세상이다. 숲의 나무와 무성한 잎들만 보이고 그 숲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수많은 새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세상이란 뜻이다. 새들의 보금자리 같지만 숲과 나무가 새들의 지저귐을 가로막고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 교묘하게 은폐된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송승언의 시에선 그 교묘한 모순이 모순된 어법을 통하여 드러난다.

2.5 이국적 정서의 공존 시대

언젠가 미국으로 이민한 한국인 가정에서 일어난 세대 간의 갈등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아들이 결혼 며칠 전에 부모에게 결혼식 초대장을 내밀며 자신의 결혼식에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부모는 큰 충격을 받고 크게 화를 냈다. 그러자 아들은 결혼 준비란 것이 너무 힘든 일이라 부모님 생각해서 자신이 다 준비한 뒤에 얘기드린 것인데 왜 화를 내는 줄 모르겠다고 했다. 이런 경우 결혼을 둘러싸고 두 개의 정서가 한 가정에 공존한다. 그러나 그것은 먼 남의 나라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질 않다. 한국도 외국인의 체류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여러 정서가 이 나라에서 공존하는 상황이 빈번해지게 되었다. 황인찬의 시 한 편이 그 이국적 정서의 공존 시대를 보여준다.

그것은 함께 공원을 걸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중앙공원의 분수대 앞에 있었다
너는 센트럴파크의 분수대를 지나갔다
—황인찬, 「듀얼 타임」 부분

중앙공원과 센트럴파크는 언어만 다를 뿐 똑같은 것을 가리키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 두 언어는 그 각각의 언어로 대변되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정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예전에는 그 두 가지 상이한 정서의 공존이 미국으로 이민한 한국 가정의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 현실의 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2.6 더 이상 밤하늘의 별은 없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본을 복간한 시집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 그 시집이 지닌 매력의 일부는 향수가 될 것이다. 그 정서는 아득한 과거의 것이다. 우연찮게 이번에 살펴본 다섯 시인 중에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별을 노래한 시인이 있었다. 김경주였다. 그렇다고 시의 제목이 「서시」는 아니었다. 김경주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우엔 “별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고백은 계속 이어진다. “천체 망원경을 구하는 일보다 별을 더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면서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지만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야광별은 문방구에만 가면 많으니까.” 시인은 그 야광별을 천정에 붙여놓고 천체 망원경으로 올려다 보며 자란다. 그리고 시를 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청색 테이프로 붙여주어야지. 그리고 나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렌즈로 비추어 보겠다. 오늘 밤도 야광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김경주, 「곤조GONJO (No. 5)」 부분

물론 폐단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천체는 목마름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갔다”는 시인의 고백은 그들의 정서가 가진 한계이자 폐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폐단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의 시가 그들의 정서를 담은 오늘의 시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오늘의 시가 많은 이들에게는 매력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3 트레킹 시대의 시읽기

나는 그들이 매력이 된 이유 중의 하나가 그들의 시가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말하자면 시집을 산 사람들에게 시가 읽히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에게 난해하고 어려운 시들에 대한 독해력이 생긴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해선 그렇다고 자신있게 답을 할 수가 없다. 내가 말한 이해는 차원을 달리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시에 대한 이해라기보다 시를 읽는 양상의 변화로 이해하고 싶다.
그 양상의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나는 그것을 트레킹 시대의 도래에서 찾고 있다. 맞다. 제주의 올레길로 시작된 바로 그 걷기 열풍을 말하는 것이다. 그 열풍이 번져 나가면서 지리산 주변으로는 둘레길이 생겼다. 서울에선 북한산과 도봉산의 주변을 걷기길이 둘러쌓다. 어느 지방의 어느 지역을 가나 걷기길이 빠짐없이 하나씩 있을 정도로 그 걷기길은 엄청나게 유행이 되었다. 이제 트레킹은 어느 지역에서나 접할 수 있는 아주 일반화된 하나의 양상이 되었다.
트레킹은 산을 오르지 않는다. 등산은 정상을 목표로 하나 트레킹은 산의 주변 일정 구간을 목표로 한다. 모든 구간을 다 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 트레킹 문화가 시를 읽는 양상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짐작하고 있다.
트레킹을 생각하면 한편의 시를 모두 해명해야 하는 작업은 등산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드시 정상을 올라야 하는 것이 산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산은 걸어도 되는 것이었다. 트레킹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시도 마찬가지였다. 난해하고 어려운 시를 모두 독해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트레킹을 하듯 시의 일부 구절과 노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등산은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힘든 싸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트레킹은 거의 모든 수준의 사람들이 산과 놀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의 다섯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시는 난해하고 어렵지만 트레킹을 하듯 그들 시의 짧은 한 구절에서 노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황병승으로 시작해 그들의 시를 가볍게 걷도록 해보자. 황병승은 그의 시 「사성장군협주곡(四星將軍協奏曲)」에서 “그녀의 이름은 으나입니다/으나는 인사의 천재/달에게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으나예요”라고 말한다. 전체적인 시의 내용에 관계없이 이 구절을 읽을 때 누구나 설마 으나일리야 있겠어, 은아겠지라고 반응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시의 짧은 한 구간을 걸은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여기서 좀더 나가면 왜 은아를 소리나는 대로 으나라고 적은 거지. 은아가 맞춤법에 갖혀 있었나. 그래서 은아를 으나라고 적으면서 마치 맞춤법의 족쇄에서 은아를 풀어주고 싶었던 것일까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면 약간의 언덕 구간을 넘은 기분이 들 수 있다. 「어린이날기념좌절어린이독주회」에서 시인이 “우리 아이는요 피아노를 집돼지처럼 다뤄요”라고 전하고 있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나면 그럼, 그 집에서 피아노를 칠 때마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나겠구나. 많이 괴롭겠다고 반응할 수 있다. 시는 어렵지만 트레킹하듯 읽으면 재미날 수 있다.
김경주는 그의 시 「폭설, 민박, 편지 1」에서 “불면은 몸속에 떠 있는 눈들”이라고 했다. 불면을 말하는 어느 구절이 이보다 더 우리들의 공감을 불러낼 수 있을까. 눈을 감고 있는데도 우리들의 감은 눈 속에서 둥둥 떠있는 우리들의 눈을 상상하면 맞어, 그게 바로 잠을 못자고 있을 때의 우리들이야라고 크게 외쳐주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사는게 참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 갖지만 「인형증후군 전말기」는 “생이 나를 가지고 자꾸 딴생각을 한다”는 말로 그런 순간들을 시의 세상에서 잠깐 머물다 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다섯 개의 물체주머니를 사용하는 자연 시간」은 무려 15쪽에 이르는 긴 시지만 가운데 두 쪽을 비우고 오른쪽 하단의 구석으로 “딸깍!/흡연(吸煙) 구역”이라는 짧은 구절을 배치해놓고 있다. 시가 너무 길지? 이쯤에서 담배 한대 피우고 와서 다시 읽어도 돼라는 전언처럼 보인다.
이제니는 그의 시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에서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고 말한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이렇게 반응했다. 아주 척척박사구만.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에선 “오빠가 떠나자 남겨진 다락방은 내 혼잣말이 되었다”라는 구절을 접할 수 있다. 이 구절의 원래 뜻은 오빠가 떠나자 나는 남겨진 다락방에서 혼잣말을 하며 지내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에선 다락방이 곧 나의 혼잣말이 된다. 사람들은 다락방에서 혼잣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락방이 곧 내 혼잣말이 될 때 드디어 시가 시작된다는 것을 이 구절에서 어렴풋이 짐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의 시작은 아주 쉬울 것 같지만 사실은 쉽지 않은 세계이다. 다락방이 곧 말 자체가 되는 변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변환은 생각보다 어렵다. 다락방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는 일반 어법의 세계가 그만큼 완고하다는 뜻도 된다. 트레킹 세계도 약간의 언덕을 가질 때가 많다.
송승언은 그의 시 「여름」에서 “마른 입술을 통해 겨울이 왔다”고 말한다. 우리가 익숙한 세계에선 겨울이 오자 날씨가 건조해지면서 입술이 마르곤 했다이다. 그러나 시인의 세상에선 그 반대이다. 그들의 세상에선 마른 입술이 겨울을 불러온다. 마른 입술은 겨울이 오는 통로이다. 겨울과 입술의 인과관계가 뒤집히는 것이다. 왜 인과관계가 뒤집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이러한 전복을 통하여 그것이 시의 권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될 것이다. 「축성된 삶의 또 다른 형태」에서 우리는 “제 몸을 녹여가면서//촛불이 방을 어둠으로 채우고 있다”는 구절을 만난다. 조금 어렵다. 촛불이 밝혀져 있으면 방은 훤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그러나 빛이 항상 밝은 것은 아니다. 만약 촛불이 밝혀져 있는 방에 누군가 갇혀 있다면 촛불은 그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완고하게 잠긴 문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그러면 방에 갇힌 사람은 촛불이 밝아 탈출이 어렵다는 사실을 더욱 확연하게 알게 된다. 때로 삶은 알아서 더 참담할 때가 있다. 불이 켜져 있어 항상 밝은 것은 아니다.
황인찬의 순서이다. 그는 「소용돌이치는 부분」에서 “간혹 죽은 내가 잠든 나를 깨우기도 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럼 뭐,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던 거네, 뭐. 잠시 시가 즐거워진다. 「종의 기원」에서 그는 어린 날에 할머니가 등목을 할 때 도와주곤 했던 기억 하나를 더듬고 있다. 그 기억은 그 때의 어느 한순간을 “어느 날인가 너무 어린 나는 땅바닥에 물을 쏟아 버렸다 할머니는 너무 어린 나에게 이 망할 것아 말씀하셨다 쏟아진 물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아직도 나는 망하지 않았다”라고 더듬고 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어릴 때 바깥에서 야단맞을 잘못을 저지르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혼을 내면서 또 그래라, 응하고 다그쳤다. 나는 잘못을 혼내면서 왜 또 그러라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반어법이란 표현의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 의문을 풀 수 있었지만 그런 표현 양식을 배우기 위하여 중학교 때까지 대책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 말은 진짜 망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실수에 대한 책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말의 액면에 묶일 때가 있다. 어릴 때는 특히 그렇다.
나도 이러한 시읽기의 방식에 대해 우려가 있을 줄 안다. 그런 것을 본격적인 시읽기라고 할 수 없지 않겠냐는 걱정을 단호하게 기우라고 못박기 어렵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러한 걱정과 우려에 대해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진다. 트레킹을 잘못된 산행 방식이라고 말하긴 어렵지 않겠는가. 산을 올라야지 왜 걸어라는 생각은 과거의 생각일 수 있다. 그 생각으로는 오늘을 설득하기 어렵고, 호응을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속도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면서 아예 산을 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이 다시 산으로 돌아와 산자락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큰 변화이다. 또 크게 반길 일이다.
아울러 시는 사람과의 만남과 같아서 자주 접하는 것이 시의 이해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임을 지적해놓지 않을 수 없다.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어색하다. 두 번째 만남은 그 어색함을 크게 완화시킨다. 난해시는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트레킹을 하듯 한두 구절을 가볍게 취하며 만나다 보면 그 어색함이 누그러들고 그러다 보면 시의 전반적인 이해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것이 내 생각이다.

4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나는 난해하고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사랑받고 있는 시인 다섯 명의 시 세계를 사회 변화라는 맥락과 엮어서 살펴보며 그들의 매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나름대로 짐작했다. 나에게 그들의 매력은 그들의 시 자체이다. 그것은 내게 과거의 시와 대비되는 오늘의 시이다. 시에 있어 우리들은 두 가지로 산다. 하나는 우리 몸에 축적되어 있는 과거의 정서, 바로 향수로 살고, 또다른 하나는 우리 몸에 축적된 적이 없는 이 시대만의 정서, 바로 오늘의 현실로 산다. 시는 과거의 시들이 대다수이다. 과거에 쓰여진 시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서로 호흡하고 있는 시란 뜻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동시에 오늘의 시가 필요하다. 오늘의 정서를 자극하며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인들이 있고, 또 그런 시인들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본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알아보았는지, 또 실제로는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좋다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너무 성급하게 우린
첫눈에 반해버려
—김경주, 「그냥 눈물이 나」 부분

나는 그들이 매력적인 이유를 구구절절이 늘어놓았으나 사실 이유는 없다. 사람들은 그냥 그들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포지션』, 2016년 봄호, 평론)

2 thoughts on “그들은 왜 매력적인가 —사회 변화의 양상과 엮어서 막연하게 짐작해 본 어떤 시인들의 대중적 인기와 그 연유

  1. 트레킹하듯 읽는 시 독법도 재밌네요.
    제겐 이 글이 트레킹 코스 중간중간 달아놓은 팻말처럼 보여 조금 와 닿았지만,
    실제로 시집을 읽는다는 건 팻말 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일이어서
    저마다 트레킹의 재미를 어떻게 맛봤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네요.

    1. 시집이 많이 팔린다고 하니까 반갑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런 난해한 시들이 많이 팔리는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모두 재미난 시들이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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