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순, 그의 시는 왜 어려운가 —박상순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을 중심으로 살펴본 박상순의 시세계

박상순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박상순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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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완강하게 저항을 한다. 시가 잘 읽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박상순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을 말함이다. 물론 어느 시집에서도 시를 읽는 일이 수월하진 않으며, 시를 읽는 일 자체가 쉬운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시의 난해를 탓할 수는 없다. 난해는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시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별다른 방법은 없다. 그냥 반복하여 읽어보는 것이 방법의 전부이다. 시를 읽을 때 읽기는 만남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시를 읽으면서 시를 만난다. 시를 처음 읽는 순간은 시와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다. 모르는 사이의 첫만남은 어색하기 마련이다. 단 한 번의 읽기로 시가 곧바로 독해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시와 나 사이에 어색함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번 반복하여 읽었을 때 시가 해명이 되었다면 이제 그 어색함이 가신 것이다. 시가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는 순간이기도 하다. 보통은 읽기가 거듭되면 시집이 어떤 전체적 경향이나 맥락을 드러내게 되고, 그러면 시집에 나타난 시인의 시세계를 어떤 일목요연한 설명 아래 정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박상순에게선 그 도식이 크게 효과가 없었다. 몇 번을 읽어보아도 시집의 맥락을 짐작할 수 없었고 단 한 편의 시를 해명하는 것마저도 상당히 힘이 들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면 시의 난해함에 대한 불만이 시를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이냐는 힐난으로 나타나기 쉽다. 그러나 시에 대해 남다른 사랑을 가져야 하는 나로선 그럴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내게선 그 질문이 박상순의 시는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전환되었다. 전자의 질문이 난해를 시로부터 배척하려고 하는데 반하여 후자의 질문은 난해의 연유를 해명하는 것으로 시와 함께 하려 한다. 만약 이러한 해명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면 난해를 이유로 시를 배척하고 싶은 사람들의 불만 앞에서 시인을 방어해줄 수 있을 것이다. 또 나는 이러한 질문이 박상순의 시세계를 말해주는 뜻밖의 효과를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함께 가졌다. 난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난해에 의해 가려진 시의 세상이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현실에 부딪친 나는 그의 시에 대하여 이렇게 물었다. 그의 시는 왜 어려운 것인가. 다행이 그의 시집 속에서 골라낸 몇 편의 시가 그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2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슬픈 감자 200그램」으로 시작해 본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옆으로 옮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신발장 앞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거울 앞으로 옮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옷장에 숨깁니다.
어젯밤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침대 밑에 넣어두었습니다.
오늘밤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의자 밑에 숨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딱딱하게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알알이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슬픈 감자 200그램」 전문

누군가 슬프다고 하면 우리는 슬픔의 연유를 묻는다. 이 시에서도 우리의 반응은 똑같이 나올 수 있다. 감자가 슬프다고 하므로 감자는 왜 슬플까를 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음은 시의 어디에서도 답을 구하지 못한다. 시의 어느 구석에서도 그 슬픔의 연유를 짐작할만한 실마리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는 슬픔의 연유를 말해주기 위해 쓰여진 시가 아니다. 슬픔의 연유를 들려주고 싶었다면 당연히 시에서 말했을 것이다.
이 시를 읽는 방법으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시인이 감자를 부른 방식 그대로, 그러나 우리의 시각으로 감자를 달리 불러보자는 것이다. 시인은 감자를 “슬픈 감자”라고 불렀으며 크기를 “200그램”으로 아주 구체화했다. 슬픔이란 감정은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사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을 수도 없다. 그런데 박상순의 시에선 감자가 슬픔을 가진 대상이 되면서 그 슬픔이 손에 잡을 수 있는 구체적 대상으로 변환된다. 심지어 그 슬픔은 크기까지 가진다. 200그램의 감자는 성인의 주먹 하나에 이르지 못한다. 그 200그램의 감자가 두 개였다면 개개의 감자는 더더욱 작아진다. 말하자면 200그램의 감자는 중량으로 구체화되어 있지만 사실은 작은 크기의 감자란 얘기이다. 박상순에게선 어떤 슬픔이 작은 감자로 구체화되었다. 슬픔이 손에 쥘 수 있는 크기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시를 읽는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가볼 수 있다. 말하자면 감자를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다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환원시키면 박상순의 “슬픈 감자”는 내게선 작은 슬픔의 덩어리가 될 수 있다.
감자가 작은 슬픔의 덩어리가 되면 감자를 신발장 앞으로, 혹은 거울 앞으로 옮기거나 옷장, 혹은 침대 밑에 넣어 숨기던 이해못할 행위는 슬픔을 덜어내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너무 슬프면 집에 앉아 있어도 슬프고 서 있어도 슬프며 밖에 나가도 슬프고 술을 먹어도 슬프며 밥을 먹어도 슬프다. 슬픔이 도저해지면 슬픔은 우리들이 제어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 된다. 우리 또한 감자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덩어리가 된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박상순의 “슬픈 감자”는 이제 얼마든지 수용이 될 수 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어떤 슬픔의 덩어리라고 하면 매우 추상적이어서 잘 손에 잡히질 않지만 그 슬픔이 감자에 투영되고, 감자가 그 슬픔을 함께 앓아주는 순간, 감자는 슬픈 감자가 된다. 아마도 슬픈 감자는 그렇게 탄생되지 않았을까.
물론 의문은 남는다.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면 어떻게 200그램의 감자처럼 아주 작은 크기로 축소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슬픔이란 자주 그렇다. 내 안에선 나를 모두 채울 정도로 큰데 바깥에서 보면 아주 작다. 뭘 그런 일로 그렇게 슬퍼하냐는 말은 누군가의 슬픔이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 앞에선 아주 작게 축소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슬픔은 안에서는 말할 수 없이 커도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주 작게 비칠 수 있다. 때문에 바깥으로 꺼내 구체적 크기로 형상화하는 순간, 슬픔은 아주 작은 크기로 위축된다. 작은 감자 한 알이나 두 알 정도로까지.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한두 번씩 슬픔을 앓는다. 누군가 슬픔을 앓을 때 그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당연한 일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세월호 사태 때 우리는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본 한 편으로 그 슬픔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보아야 했었다. 감자마저도 나누어 앓는 슬픔을 사람들이 나누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나는 이 시가 어려운 것은 “슬픈 감자”라는 말 때문이라고 보았다. ‘슬프다’와 ‘감자’는 우리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말이지만 우리에게선 그 둘이 결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실험삼아 인터넷에서 “슬픈 감자”를 검색해보면 박상순의 시 제목이 검색 결과의 앞쪽을 모두 차지한다. 그 말은 평범한 듯 보이지만 사실 박상순만의 말이란 뜻이다.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낯선 말이 잘 와닿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또다른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번에는 「요코하마의 푸른 다리」이다.

요코하마의 블루 브리지는 1미터 59센티미터
이렇게 짧은 다리.
개울도 강도 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는 다리.
—「요코하마의 푸른 다리」 부분

시의 첫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사람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요코하마에 길이가 1미터 59센티미터인 블루 브리지라는 짧은 다리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아닐까.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검색을 했다. 그런 것은 없었다. 요코하마에 있는 유명한 다리로 베이 브리지가 있기는 했다. 다리 위에서 보는 경치가 멋지고 길이는 850미터라고 했다. 시인이 다리의 길이가 짧다고 했으니 그 다리는 아니다. 검색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혹시나 하여 일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마침 내게는 요코하마에 살고 있는 아는 일본인 친구가 있었다. 돌아온 답은 그런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곳에 사는 일본인들만 아는 다리도 아니다. 이쯤에서 나는 블루 브리지가 다리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그런 다리가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은 1미터 59센티미터라는 길이였다. 아무런 설명없이, 즉 다리라는 설명없이 그 단위의 길이를 들었다면 나는 무엇을 연상했을까. 키가 아니었을까. 인터넷에서 1미터 59센티미터란 단위로 검색을 했을 때 일본의 아이돌 가수라는 니시노 나나세가 튀어나온 것도 그러한 단위가 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 또다른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혹시 시인의 키가 1미터 59센티미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1미터 59센티미터”는 남녀에 따라 달라지지만 남자의 키로선 작은 키이다. 짧다고 한 것은 혹시 작은 키가 아니었을까.
나는 시인의 체구에 대해선 모른다. 하지만 내 짐작대로 그것이 시인의 키라면 “요코하마의 블루 브리지”는 시인 자신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든지 다른 무엇인가에 비유할 수 있다. 가령 흔들림이 없다면 바위에 비유하는 식이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다리에 비유하는 일은 무리수가 아니다. 심지어 우린 그런 경우의 다리를 말하고 있는 잘 알려진 유명한 노래도 알고 있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의 가사에 나오는 다리가 바로 그런 다리다. 나는 남자로서는 작은 키가 짧은 다리로 전환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왜 하필 “요코하마의 블루 브리지”인 것일까. 우리에겐 세상의 어느 누구도 모르나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있다. 세상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내가 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그 나만의 나는 분명히 있는데도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요코하마의 블루 브리지” 같은 나이다. 그 나만의 나는 내 삶이 한 순간에서 또다른 순간으로 흐르는 다리이기도 하다.
박상순은 그 다리가 “바닥이 푸른 다리”라고 했다. 삶은 색채가 있다. 시인도 시인만의 색채가 있다. 나는 시인의 삶이 색채로 치면 기본적으로 푸른 색을 띄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 삶이 그런 다리라면 내 삶을 스쳐가는 사람은 모두 푸른 물이 들 것이다. 시인이 자신을 “바닥이 푸른 다리”라고 하고 “모두들 푸른 발자국을 찍으며/건너는 다리”라고 했을 때 나는 그런 삶을 읽었다.
다리에 비유된 삶을 시인은 “짧은데 폭마저 좁”아서 “기차도 자동차도 건널 수 없고/두 손을 마주잡고 건널 수도 없지만/큰 배가 건너가는 다리”라고 했다. 그가 쓰는 시를 생각하면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의 이해라는 측면에선 폭이 좁다. 심지어 두 사람의 이해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라는 이름의 큰 배는 그 다리를 건넌다. “텅 빈 배/한 척을 안고/푸른 바다를 건너는 다리”라는 대목은 시인이 말한 그 짧은 다리가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알 수 없는 세계 같지만 그가 고집하는 시의 세상을 생각하면 그것은 시인 자신이 감당해내는 그의 시세계가 된다. 배가 빈 것을 보면 사람으로 채워지는 충만함은 없지만 그러나 세상에는 배를 채우는 사람의 숫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박상순의 시 「새로 단 문밖에는」은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어려운 구석은 하나도 없으나 왜 이런 시를 썼는지를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시를 읽어보자.

오래된 국숫집에서 칼국수를 먹습니다.

오래된 벽을 타고 수증기가 흐릅니다.

새로 단 문밖에는 장맛비가 내립니다.

두 마디 말도 없이 칼국수를 먹습니다.

오래된 벽을 타고 수증기가 내립니다.

새로 단 문밖에는 장맛비가 내립니다.
—「새로 단 문밖에는」 전문

우리가 이 시에서 당황하게 되는 것은 달리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구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는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시가 혹시 텍스트를 넘어 공간이 될 수는 없을까. “새로 단 문밖에는 장맛비가 내”리고 있고, “오래 된 벽을 타고 수증기가 흐”르거나 내려오고 있으며, 시인이 “두 마디 말도 없이 칼국수를 먹”고 있는 어떤 “국숫집” 공간이 시가 될 수는 없을까. 그런 공간이 있다면 공간 자체가 시가 되기에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는 그 공간의 감흥을 시적 언어로 옮기기보다 공간 자체를 시 속으로 옮겨가고 사람들이 그 공간에 들어와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시는 그렇게 묻는 듯하다. 나는 시를 읽으며 그 국숫집 공간으로 들어가 앉았다. 넓게 벌려놓은 시의 행간도 내게는 들어가서 앉을 수 있는 국숫집의 공간으로 보였다. 시가 만들어준 공간에 들어가 앉아야 하니 의미를 찾으려는 기존의 방식으로 읽으려고 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비록 국수를 주문하여 먹어보진 못했지만 시적이라는 느낌을 받기엔 충분했다.
재미나게 읽은 시도 있다.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이 그러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 철문으로 만든 얼굴이 있다.
철문을 뜯어서 만든 얼굴이 있다.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 부분

시의 첫부분을 읽는 순간, 내 반응은 “철문으로 만든 얼굴”이면 철면피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시인은 “처음에는 옥상에, 복도에/다음에는 문밖에, 거리에/이제는, 산에도, 바다에도”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이 쌓여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철면피가 들끓는 세상이다. 이 시를 읽고 있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취재하기 위해 광주로 들어갔던 독일 기자와 그를 광주까지 태우고간 택시운전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 <택시운전사>가 상영되고 있었고, 이 영화를 두고 전두환이 “시민을 겨냥해 사격한 부분은 사실 아니다”며 영화의 묘사가 “정도가 지나치다면 법적 검토도 가능하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보통 때라면 철면피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겠지만 이 시를 읽은 여파 때문인지 나는 자신의 집 철문을 뜯어다 자신의 얼굴을 만든 놈이라고 했다. 박상순의 시는 그 순간 사회적으로 활용되었으며, 나는 철면피 같은 인간들이 나올 때마다 그의 시를 활용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이명박이 그의 대통령 재임 시절 광범위하게 행해진 국정원의 댓글 공작 조사를 두고 이러한 과거 청산이 국익을 해치고 성공하지도 못한다고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명박은 철문 서너 개는 뜯어다 얼굴을 만든 놈이 분명하다고 중얼거렸다. 박상순의 싯구절을 너무 자주 활용하게 된다 싶을 정도로 세상에는 철면피들이 넘쳐난다. 내게 “철문을 뜯어서” 얼굴을 만든 인간들은 대부분 권좌에서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남용한 인간들이었다.
박상순의 시가 갖는 난해의 연유를 묻는 나의 질문은 가장 최근에 나온 시집에서만 그 답을 구하진 않았다. 그의 또다른 시집 『Love Adagio』에서도 나는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Love Adagio」는 내게 읽기의 태도를 바꿔볼 것을 요구했다는 측면에서 흥미로웠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직 덜 마른 목재들이 마르는 소리
—그의 무른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Love Adagio」 부분

제목에 사랑이 있으니 이 시는 사랑에 관한 시일 것이다. 그러나 시의 어디에서도 사랑을 유추하기에 분명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시의 텍스트에서 의미를 추구하지만 과연 모든 시에서 의미가 중요한 것일까. 혹시 시에서 속도가 중요할 때가 있지는 않을까. 가령 음악에서 아다지오는 침착하게 느리게 연주하거나 노래 부르라는 음악적 지시이다. 그걸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곡의 표현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속도는 음악에서 엄청 중요할 수 있다. 시에서도 속도가 중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시에서의 속도란 읽는 속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읽는 속도를 통제할 수 없다. 물론 표기는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시를 텍스트의 의미가 아니라 읽는 속도가 매우 중요한 시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면 나는 제목의 표기에 따라 읽는 속도를 아다지오로 제어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아다지오의 속도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음악의 전문가가 아니다. 내가 아다지오 속도를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다지오 곡들을 들어보는 것이다. 클래식에 큰 기반 지식과 경험이 없는 나는 인터넷에 의존하여 몇 곡의 아다지오 곡을 고를 수 있었고 또 들어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유명한 곡도 있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 삽입되어 널리 알려진 쇼팽의 야상곡 20번도 아다지오곡이었다. 나는 여러 번에 걸쳐 아다지오 곡들을 들었다. 아다지오 곡들은 빠르게 진행되지 않고 느리게 흘러갔으며 대부분의 곡조가 처연했다.
곡들은 내게 시인이 말하는 사랑이 슬프고 처연한 사랑이며, 그런 사랑은 속도가 빠르지 않고 느리다고 말했다. “아직 덜 마른 목재들이 마르는 소리”는 속도로 보면 아주 느린 속도를 보일 것이다. “그의 무른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떨어지는 소리”는 그와 달리 빠른 속도가 만들어내는 소리이다. 지붕으로 추락하여 떨어지는데 속도가 느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랑에선 그 속도가 아다지오의 속도로 느려진다. 아픔은 지붕에 떨어져 추락했을 때처럼 크지만 속도는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사랑으로 보면 실연한 자의 아픔에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나는 아다지오곡을 들으며 이것이 실연하고 상처받은 자의 사랑이란 것을 아다지오 곡들로 인하여 알게 되었다. 음악과 시는 이제 서로 엮여 그 속도가 물기가 말라가는 것처럼 느리며, 아울러 슬프다고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시에선 실연한 누군가의 아픔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 충격과 슬픔을 귀로 들었다. 그것도 아주 느린 아다지오 속도로.
박상순의 두 번째 시집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에 실린 같은 제목의 시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은 네 편으로 구성된 연작시이다. 「요코하마의 푸른 다리」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들 시편을 읽을 때 또다시 궁금해진 것은 정말 마라나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포르노 만화가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답은 시에서 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시 밖에서도 그 답은 구해지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텍스트에 의존하는 기존의 방식으로 시를 읽을 수밖에 없다.
시는 “언제부터인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한 사람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언제부턴가 비가 수평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수직으로 흐르고 지붕은 쓸모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도대체 어떤 경우에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우리들이 성에 눈뜰 때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짐작에는 제목에 나타난 포르노란 말이 한몫했다. 포르노 만화란 우리들이 성의 세계를 체험하는 양식 중 하나이다. 그 세계를 체험하는 시기는 개인마다 모두 다르지만 마치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로 시간이라도 정해져 있는 듯 닥치며 누구도 그 시기를 피해갈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세계를 체험하고 성에 눈뜨면서 우리들은 어린 시절의 세상을 잃는다. 즉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그 세계의 도래와 함께 “한 사람씩 사라지기 시작”하며, 구체적으로 “일곱 살의 나, 여덟 살의 나, 아홉 살의 나”가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인 ‘마라나’를 만나면 그녀를 보게 됨과 동시에 “그녀를 통해 사라지는 세계를” 보게 된다. 이제 어린 시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세계는 충격적이다. 마치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경험과 함께 그 세계는 온다. “비가 수평으로 내리기 시작”하고 “구름이 수직으로”흘러 지붕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충격적 세계이다. 대책없이 그 세계를 감내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는 없다.
사실 마라나와의 만남은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한 세계가 또다른 한 세계와 스치면서 지나치는 순간이다. 시인이 “나; 오고/마라나; 가고//나; 가고/마라나; 가고”라고 말하고, 또 “마라나; 가고/나; 오고”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둘이 스치면서 한 세상이 가고 또다른 한 세상이 온다. 아이의 세상이 가고 어른의 세상이 오는 것이리라.
시 속엔 마라나 이전의 세상에 대한 기억으로 추정되는 부분들이 있다. “아주 어려서 강변에 갔”던 시기의 세상이다. 어릴 때 여자 아이와 놀러갔던 기억이리라. 아마도 물통을 갖고 가서 놀았던 모양이다. 기억 속의 여자 아이는 “물통을 들고” 가고 있고, 기억 속의 나는 “물통을 쓰”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마라나도 “눕지 않았”고, 나도 “눕지 않았”던 그 세상은 아주 어릴 때의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마라나의 세상을 만나고 이제 어른이 된 시인은 이렇게 이렇게 결론짓는다.

마라나; 없음
나; 없음

꽃길; 없음
나; 없음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4]」 전문

우리는 성의 세계에 눈뜨면서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그 이전의 세계에 대한 상실이 된다. 어른이 되면서 그 동안의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마라나의 이후로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때 내게선 그 이전의 내가 없어져 버렸다. 그때 이후로 그 이전의 모든 것은 ‘없음’이 되어 버렸다.
내가 포르노를 성의 세계에 눈뜨면서 그 이전의 세계와 단절하게 되는 경험인 듯 얘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박상순의 「마라나」를 포르노에 관한 시로 읽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냥 이를 이전의 어떤 세계와 단절하게 되는 경험의 비유로 읽었다. 그 이전의 세계는 성의 세계를 알기 이전에 가졌던 아이들의 세계 뿐만이 아니라 전통적 유형의 기존 시세계일 수도 있다. 우리가 성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다시는 어린 시절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듯이 박상순 또한 그가 넘어간 자신의 시세계에서 다시는 전통적 시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에서 만큼은 우리가 애들처럼 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박상순의 첫시집을 들여다본다. 『6은 나무 7은 돌고래』이다. 제목의 그 구절을 만나게 되는 시는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란 시이다. 시는 이것이 “숫자놀이 장난감”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숫자놀이 장난감이라면 갯수를 세지 순서를 짚어가진 않는다. 그러나 1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간 시인은 1은 나라고 말하지 않고 “첫 번째는 나”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 뒤를 잇는 자동차는 두 번째는 자동차가 되어야 하나 시에선 그 두 번째가 “2는 자동차”로 되어 있다. 그러다 “열 번째”에 이르러선 다시 순서를 복원한다. 아마도 10까지 세는 것이나 읽는 것을 배우는 숫자놀이 장난감이었나 보다.
나는 시인이 게임의 규칙을 흔들고 싶어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작은 규칙이다. 원래의 규칙은 10까지 숫자를 익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갯수의 세상을 순서의 세상으로 바꾸려 한다. 방법은 단순하다. 1의 자리에서 하나를 말하지 않고 첫 번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규칙을 바꾸고 싶은 그의 의도를 따르지 않는다. 시인은 “첫 번째는 나”라고 말한 듯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1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숫자를 익혔을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하는 숫자 공부를 “몸통이 불어”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점점 더 많은 숫자를 알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렇게 하여 “아홉까지 배운 날”, 시인은 숫자를 가르치는 사람에게 칭찬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은 날이기도 하다. 시인이 하고 싶었던 것은 숫자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었는데 시인은 아홉까지 세상의 규칙과 타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숫자 공부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던 시인이 자신의 뜻대로 그 순서의 세상을 다시 구현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그가 구축하는 시의 세상이다. 물론 그는 숫자의 세상이 그 규칙을 완강하게 고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시작의 자리에서 그는 갯수의 세상을 순서의 세상으로 바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갯수의 세상이 요구하는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만 마지막 자리에서 다시 또 그가 꿈꾸었던 그만의 규칙을 떠올린다. 시가 순서의 세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부분

만약 그가 갯수의 세상에 아무 저항없이 투항했다면 그는 10개의 숫자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이 그는 갯수의 세상을 순서의 세상으로 바꾸려 한다. 방법은 1의 자리로 뛰어들어 그 1의 자리에서 1이 아니라 “첫 번째”를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가 1의 자리에서 첫 번째를 외친다고 하여 일제히 순서의 세상으로 바뀌진 않는다. 그는 첫 번째가 되어 그 뒤로 올 모든 세상을 순서의 세상으로 바꾸려 하지만 세상은 갯수의 세상에서 변함이 없다. 그리하여 9까지 갯수의 세상이 이어진다. 아마도 완강한 세상의 저항을 체감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완강한 저항 앞에서 그는 순서의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서의 세상을 환기한다. 10이 다시 순서로 채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순서의 세상을 꿈꾸면 10중 여덟은 잃게 되나 둘은 가질 수 있다. 박상순의 시가 잘 읽히지 않는 것은 우리가 모두 갯수의 세상에 익숙한데 그가 순서의 세상을 외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
박상순의 시에 대해 그의 시는 왜 어려운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궁리해 보는 것으로 그의 시세계에 대한 실마리를 잡아보려 했던 나는 그의 시 몇 편을 골라 해명한 뒤끝에서 의아하게도 어느 날 떠났던 도쿄 여행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였다. 나리타 공항에서 내려 도쿄의 도심으로 들어갈 때 나는 낯익은 풍경이 하나도 없는 차창밖을 보며 내가 내 시선이 닿는 일정한 크기의 공간에 갇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내가 인천공항에 내려 서울로 들어올 때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그 익숙함 때문에 어떤 곳을 가도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가본 도시 도쿄에선 나는 시선이 닿는 곳 이상은 전혀 넘어가질 못했다. 나는 막힌 곳이 하나도 없는 도시를 갇혀서 돌아다녔다.
혹시 박상순의 시도 내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래서 처음 방문하는 도시 같은 것은 아닐까. 현실에선 자주 가던 익숙한 곳을 지루해 할 때가 많다. 대개의 사람들은 가봤던 곳을 다시 또 가고 싶어하진 않는다. 물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추억을 되새겨 갔던 곳을 다시 찾는 경우는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새로운 곳으로 여행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시의 여행지에선 반대의 경우가 벌어진다. 다르지만 낯익은 풍경의 여행지만 자꾸 찾는 것이다. 비슷한 유형의 시가 사랑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박상순을 예로 들어 전혀 새로운 여행지를 권하고 싶다. 그 여행에선 심지어 요코하마에 사는 일본인도 모르는 “요코하마의 블루 브리지”를 건너는 재미가 있다.
(『쓺』, 2017년 하권, 평론)

『쓺-문학의 이름으로』 2017년 하권
『쓺-문학의 이름으로』 2017년 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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