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오늘의 시 —구현우, 신진용, 양안다, 홍지호의 신작시와 근작시를 중심으로 살펴본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

『포지션』 2018년 여름호

1
네 명의 젊은 시인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구현우와 신진용, 양안다, 홍지호가 그들이다. 젊다는 형용사로 묶인 그들의 출생 연도는 1989년에서 1992년에 걸쳐 있다. 등단은 2014년과 2015년에 이루어졌다. 등단 때 그들의 나이는 22살에서 26살의 진폭을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 시인들의 시를 살펴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오늘의 시를 들여다본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젊은 시인들의 시가 바로 이 시대를 말하고 오늘을 보여주는 시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젊은 시인들이 쓰는 시만이 오늘의 시가 되는 것일까. 오늘, 이 시대에 쓰여지는 시는 모두 오늘의 시가 아닐까. 시인은 나이와 관계없이 모두가 오늘을 함께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시에 과연 오늘과 과거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며 떠올린 것은 태양과 밤하늘의 별이었다. 우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빛의 속도라는 한계 내에서 대상을 보게 된다.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대상의 현재가 아니라 빛이 그 대상을 떠났던 순간, 바로 어느 시점의 과거이다. 지구의 우리들은 현재를 살고 있지만 우리가 보는 태양과 별은 모두 과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주를 올려다보는 순간 우리는 과거에 둘러싸여 살게 된다.
과학은 이를 엄격한 수치로 알려주고 있다. 가령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 20초 전의 과거이다. 빛이 1억5천만 킬로미터라는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날아오는데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 차이 때문에 우리가 보는 태양은 사실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이다. 이 시간의 차이는 대상이 지구에서 멀어질수록 커진다. 목성은 33분 전의 과거이며, 명왕성은 7시간 전의 과거이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 센타우리는 4년 3개월 전의 과거이다. 전파망원경을 통해 은하계 중심에 있는 거대 블랙홀 사지타리우스 A를 보고 있다면 그것은 25,636년 전의 과거이다.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와 겹친다. 안드로메다 은하를 보고 있다면 그것은 250만 년 전의 과거이다. 인간의 진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기이다.(이 부분의 내용은 All About Space 76호에 실린 「시간은 환각인가?(Is time an illusion?)」에서 인용했다.)
시의 세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오늘 발표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모두 오늘의 시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같은 오늘을 살아도 90년대생과 60년대생의 오늘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90년대생에겐 오늘이 말 그대로 오늘이지만 60년대생의 오늘은 과거의 자장 속에 놓인 오늘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거의 자장은 오늘을 과거로 살게 할 정도로 강력할 때가 많다. 그때 60년대생은 오늘을 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들이 젊었던 시절, 바로 여전히 8, 90년대의 과거를 산다. 이런 연유로 오늘의 시는 20대의 젊은 시인들 것일 수 있다. 아니, 오직 그들을 통해서만 엄격한 의미에서 오늘의 시를 만날 수 있다. 내가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이 시대, 오늘의 시를 만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2
젊은 시인 네 명의 시로 오늘의 시를 돌아보는 이 여정은 구현우의 시로 시작하기로 한다. 그의 시 「간밤」은 제목대로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을 전하고 있다. “막차가 떠난 정류장에 앉아있었습니다”라는 첫 구절로 짐작하면 시인은 지난밤에 막차를 놓쳤다. 막차를 놓친 시인은 주변의 상황을 전하며 “검은 차와 검게 보이는 차가 연달아 지나갔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를 어떤 대상에 대한 미세한 구분으로 보았다. “검은 차”는 차의 원래 색상이 검은 경우이지만 “검게 보이는 차”는 어두운 조명의 결과이다. 즉 시인은 원래부터 검은 차와 상황의 결과인 검은 차를 구별하고 있다. 별 것 아닌 듯하지만 이러한 미세한 구별은 대상들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고 그 개별성을 보장한다. 나는 이러한 의식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갈 곳은 있어도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구현우, 「간밤」 부분

이 구절 속에선 “갈 곳”과 “돌아갈 곳”이 구별이 되어 있다.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갈 곳은 몸이 거처하고 있는 곳을 말할 것이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 공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와 비교하면 돌아갈 곳은 마음의 거처이다. 한때 집 없는 것이 설움이던 시절, 집은 몸의 거처이자 마음의 거처였다. 몸을 집에 눕히면 마음도 행복했다는 뜻이다. 당시의 세대는 때문에 집의 행복을 위하여 직장에서의 부당한 대우도 꾹 참고 감내하며 집을 장만했고, 집을 장만하면 너무 감격에 겨워 울기까지 했다. 구현우의 표현을 빌자면 갈 곳과 돌아갈 곳이 같았던 시절이었다.
집을 장만한 세대에게선 그러한 결합이 어느 정도 유지된다. 그러나 그 집에서 태어나 성장한 세대에게선 그 결합이 깨지고 만다. 이유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가정의 불화, 혹은 부모 세대의 권위적인 태도나 보수 편향의 정치의식 등을 예로 꼽을 수 있다. 그리하여 집을 장만한 세대와 달리 그 집에서 성장한 세대에게선 갈 곳과 돌아갈 곳이 분리된다. 갈 곳은 그곳에서 마음 편하게 기거할 수 없으면 더 이상 돌아갈 곳이 못 된다. 몸의 거처가 있으면 마음까지 행복으로 채울 수 있던 세대와 달리 갈 곳과 돌아갈 곳을 구분하는 세대는 마음을 눕힐 수 있으면 아무리 누추하고, 또 나의 것이 아닐지라도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곳일 수 있다. 한 세대는 행복을 집에 귀속시키려 했으나 그다음 세대는 갈 곳과 돌아갈 곳으로서의 거처를 구분하면서 내 집으로 독점하려 했던 행복을 지워버린다. 그 순간, 행복이 지워지지만 동시에 돌아갈 곳을 마련하면 갈 곳에 관계없이 행복해질 수 있다.
거처라는 맥락에서 살펴보면 구현우의 시 「망실」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자기만의 거처에 대한 얘기가 될 수 있다. 시인은 “문 너머에는 나의 방이 있다”며, “그곳에는 나름의 질서로 흐트러지고 절반의 창문으로 환기되는 사적인/시절이 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시인은 지금 그 “자기만의 방”을 잃어버렸다. 시의 제목인 망실이 잃어버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나온 성장기의 방일 것이다. 그 성장기를 지나 우리는 세상으로 나오고 다시는 그 성장기의 방으로 돌아갈 수 없다. 주목할 점은 ‘문밖’의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럴 때 당신의 방이 아닌 당신이 떠오르는지
—구현우, 「망실」 부분

당신의 방은 거처이지만 당신은 존재이다. 방을 잃은 자가 존재를 떠올렸다는 것은 곧 존재가 방의 구실을 겸한다는 뜻이 된다. 당신이 곧 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당신의 방문” 앞에서 “열어달라고 말하며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을 범한다. 그가 열리길 바라는 것은 방문이 아니라 사실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가 방이 되면 잠겨 있는 듯 보여도 이미 존재의 방으로 들어가 있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구현우가 “안으로 생각에 잠겨있을 때의 모습을/밖에서 보면 그것이 당신에 대한 비밀스러운 생각이라는 건 모르는 것처럼”이라고 말했을 때의 그 방이 바로 그러한 방이다.
어쩌면 이전 세대가 범한 오류 중의 하나가 거처를 마련하면서 그 거처를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거처는 열었지만 존재는 열지 못한 것이다. 존재가 열리면 존재는 돌아가 거처할 수 있는 방이 된다. 더 이상 문은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방을 잃었지만 그 망실의 끝에서 “지금 세계의 모든 문 앞에”서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세상은 내 집으로 나만의 거처를 마련하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내게 문을 열어 방이 되어주고, 나 또한 내 존재를 열어 세상의 방이 되어주는 세상일 것이다.
신진용의 「개와 꽃1」은 “우리는 강기슭의 집에 살고 이곳엔 비가 자주 내린다”는 얘기로 시작된다. 시인은 “창 너머에선 불어난 강을 타고 무언가 떠내려온다”고 말하며 “또 죽은 개일까”라고 묻는다. ‘또’라는 말은 죽은 개가 자주 떠내려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홍수에 돼지나 소와 같은 가축이 떠내려올 때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개는 생소하다. 생소한 얘기는 낯설다. 낯설면 얘기가 잘 수용이 되질 않는다. 그러나 한 구절의 낯선 측면을 다른 구절이 풀어줄 때가 있다. 나는 그 대목을 다음 구절로 보았다.

가끔 비가 오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런 날엔 강둑에 늘어선 꽃나무를 따라 걷는다 걷다 보면 개의 것으로 보이는 뼈를 발견하기도 한다

저기, 이 뼈를 나무 아래에 묻어주고 싶어
그렇지만 어느 나무 밑을 파보아도 이미 뼈가 가득할 거야
—신진용, 「개와 꽃1」 부분

나는 이 구절을 오늘의 세상이 보여주는 관계의 변화로 읽었다. 개와 인간 사이의 관계, 혹은 고양이와 인간 사이의 관계는 그러한 변화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과거 개에게 인간은 주인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주인의 위치를 버리고 개의 엄마나 아빠가 되기에 주저함이 없다. 개는 충성스러운 동물이 아니라 삶의 반려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자식을 살피듯 개를 보살피면서 즐거움을 얻는다. 고양이는 한때 쥐를 잡기 위한 실용적 용도의 동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고양이의 사려 깊은 집사가 되려 한다. “개의 것으로 보이는 뼈를 발견”했을 때, 그 “뼈를 나무 아래에 묻어주고 싶”은 마음을 나는 개와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관계의 변화가 오늘 어느 시점에 도달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마리로 읽었다. 이러한 관계의 변화는 앞 부분에 나온 홍수에 떠내려온 죽은 개는 홍수에 떠내려올 정도로 많아진 개가 된다.
개와 인간의 관계가 보여주는 변화된 오늘은 겉으로 보면 바람직해 보이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신진용은 이러한 관계의 변화로 이제 인간들이 과연 개를 사랑하게 되었을까를 근본적으로 묻고 있다. 인간과 개가 반려자로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 과정이 개의 상품화와 함께 진행되기 때문이다. 꽃집을 찾아갔던 시인의 눈에 애견샵의 개들이 눈에 띈 것도 개를 사랑한다면서 개들을 상품화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 때문은 아니었을까.

꽃을 받아 나오면서 애견샵을 지나쳤다
유리문 안쪽에는 너무 많은 개들이 잠들어 있었다
—신진용, 「개와 꽃2」 부분

어디에도 질문은 없었지만 나는 이 시 구절의 뒤에서 개를 사랑한다면서 개를 상품으로 거래하는 사회는 바람직한가 하는 질문을 읽은 듯했다. 그리고 이쯤에 이르면 두 편의 시에서 개와 꽃이 함께 배치되어 있는 것도 예사롭게 보이질 않는다. 마치 개가 아름답고 예쁜 모양으로 인간을 위로했던 꽃의 자리를 대체한 움직이는 꽃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신진용은 관계가 변화된 오늘의 세상을 보여주면서 그 변화가 사랑에 걸맞는 것인가를 동시에 묻고 있다.
구현우와 신진용의 시는 그 지리적 경계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두고 있지만 양안다와 홍지호에선 그 경계가 이 땅을 넘어간 느낌을 준다. 양안다의 시 「Bye Bye Baby Blue」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시는 한 ‘남자’가 “성대가 병들 때까지 떠나간 친구에 대해 노래했는데 당시에는 그 친구가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 없었으나 후에 남자가 죽고 나서야 소녀인 것이 밝혀졌다”는 얘기로 시작된다. 이 얘기는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 “반세기 전의 일이”다. 50년 전의 얘기인 것이다. 과거의 얘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땅의 얘기도 아니다. 시인이 얘기 속의 “그 소녀”가 태어난 곳이 “차를 타고 액셀을 밟고 밟아도 끝없이 농장의 풍경만 펼쳐지는 어느 주(州)”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는 지역을 지칭하는 단위이긴 하지만 우리의 것은 아니다.
시인이 전하는 소녀의 모습은 반항적이다. 반항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만 이국적 느낌이 진하다. “남자 아이들과 농장을 헤집으며, 담뱃잎을 씹어대며, 개를 걷어차면서” 자랐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이국의 과거는 이 땅으로 유입되어 우리의 오늘이 된다. “우리는 소녀를 동경했고 그 소녀는 이미 죽은 지 오래 전이며 우리와 마주친 적도, 얼굴도 알지 못했으나 우리는 소녀의 모든 것에 대해 아는 척 했으며 우리는 소녀가 친구와 그러했듯이 하나의 담배를 돌려 피웠”다는 대목은 그러한 유입의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이 시의 내용을 외국 문화의 유입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오늘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시는 제목마저 영어 그대로 쓰고 있다. 시의 제목은 남자가 소녀를 대상으로 불렀다는 노래의 제목으로 이해가 되었다. 이때 영어는 외국어가 아니라 세계 공용어로 지칭되면서 이 땅으로 들어와 오늘 이 땅에서 쓰이는 또 다른 우리 말의 하나가 된다. 때문에 그것은 영어라기 보다 영어로 된 우리 말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의 세대에겐 영어가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어와 동등한 위치의 표현 언어가 되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언어와 문화의 유입이 문화의 확대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우리는 노래할 대상이 없어서 우리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우리는 우리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데……
—양안다, 「Bye Bye Baby Blue」 부분

그러니까 문화의 유입과 확대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 보다 우리의 상실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상실을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그 상실 뒤에 우리의 ‘시작’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방탄소년단>의 소식은 이미 그 노래의 길이 새로이 열렸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길은 수용하고 따라갈 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다 나를 상실했을 때 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국어의 유입과 관련해선 양안다의 「휘어진 칼, 그리고 매그놀리아」란 시의 제목도 눈길을 끈다. 시는 칼과 꽃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상황을 다루고 있다. 제목에 기대면 그 꽃은 매그놀리아이다. 말하자면 목련인 셈이다. 그러나 시의 어디에서도 시인은 그 꽃을 목련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목련은 꽃에 묻어가는 일상적 정서를 갖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엔 시인이 꽃이라는 말을 통해 구축하려고 하는 느낌을 목련이라는 이름이 방해할 수 있다. 우리의 말이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라는 뜻이다. 매그놀리아는 말하자면 목련이란 말이 불러올 고착된 정서를 차단하며 새로운 정서를 구축해내는 구실을 할 수 있다. 언어가 필터 기능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매그놀리아는 외국어라기보다 목련이란 우리 말이 방해할지도 모를 어떤 정서에 도달하기 위해 시인이 가져다쓴 우리의 새로운 보조 언어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영어는 외국어가 아니라 또다른 우리 말의 하나가 된다.
외국어의 유입은 홍지호의 시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의 시 「존재」 속에선 카페의 이름 속에서 모국과 이국의 이름이 공존하고 있다. 시인은 카페의 주인인 ‘그’를 가리켜 “모국에서의 이름은 존재”이지만 “타국에서 그는 자신에게 존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타국의 사람들은 그를 존, 하고 부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국과 타국에서의 이름이 그가 문을 연 “카페의 이름”이 된다. 시인은 그 이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존재와 존은 같은 사람이지만, 존재와 존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네.
—홍지호, 「존재」 부분

나는 이 구절의 존을 서양의 흔한 이름 중 하나로서의 존(John)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존재의 첫 글자에서 따온 존으로 보았다. 내가 존이란 이름을 이렇게 보게 된 것은 딸에게서 들은 얘기 때문이었다. 딸에게는 메리란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메리란 이름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강아지였다. 나는 강아지처럼 귀여운 친구냐고 물었으나 딸은 그 별명이 미국인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아메리칸이라고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메리는 아메리칸의 가운데 두 자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메리 속에 사실은 아메리칸이 자리 잡듯이 이 시대엔 존 속에 존재가 자리 잡을 수 있다. 이국적 호칭 속에 사실은 모국의 이름이 공존하는 것이다.
한국에선 사실 어느 때부터인가 호칭 속에 전혀 다른 한국어와 이국어가 동시에 공존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한국어를 모르는 타국의 사람들은 짐작할 수가 없는 일이다. 가령 내가 알고 있는 가평의 한 서점은 그 이름이 북유럽이다. 우리가 지역적 공간으로서의 북유럽을 떠올릴 때 그 서점은 북유럽의 영어 표기를 북부 유럽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는 책(Book You Love)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그것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누구나 부를 수는 있지만 아메리칸의 메리에는 딸의 친구들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며, 존재의 존에도 카페의 주인인 그만이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달할 수 없는 세상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만의 세상을 구축해준다.
홍지호는 섣부른 짐작을 차단하는 이런 세상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의 또 다른 시 「존」에서 “나는 존/존은 나의 이름일 뿐만은 아니지요”라고 하면서 그 이름에 대해 “나는 혼란은 아”니지만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이 단순히 존재가 실리지 않는 이국적 호칭에 불과하지는 않다는 소리이다. 이국적 이름으로 존재의 혼란을 사는 시대에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책을 함께 읽으면서 당신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 다른 문장이 된다
같은 문장에서 다른 문장을 발견하면 다른 사람이 되는 거야

그때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지호, 「존」 부분

이름에는 사실 존재가 실린다. 그렇다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존재가 실리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생성될 수밖에 없다.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 다른 문장이 된다”는 말에서 다른 문장은 존재가 실린 문장이 될 것이며, 읽고 또 읽는 행위는 그 존재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가 쌓아가는 시간이 될 것이다. 주어진 하나의 이름에 존재를 담던 것이 그간의 시대였다면 오늘의 시대엔 자신이 정한 이름에 자신들의 존재를 새롭게 담고 그 존재에 도달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이름마저 버리면서 얻는 또 다른 새로운 오늘이다.

3
나는 과거의 사람이다. 과거의 사람은 오늘마저도 과거의 시간대로 살기 쉽다. 오늘을 살면서도 오늘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젊은 시인들은 그런 과거의 사람에게 오늘을 보여주는 유효한 창구이다. 아니 과거의 사람인 나는 젊은 시인들을 통해 비로소 오늘을 볼 수 있다. 네 명의 시인이 보여준 그들의 시는 그런 면에서 내가 과거의 자장에서 벗어나 살아보는 바로 오늘이다.
그 오늘을 정리해보면 구현우에게선 내 집에 뭉뚱그려져 있던 몸과 마음의 거처가 분리되면서 존재들에게 마음의 거처가 되는 세상이 구분되었다. 그 세상은 과거의 세대가 꿈꾸던 내 집 마련의 세상이 아니라 존재가 서로의 방이 되는 세상이었다. 신진용에게선 개와 인간 사이의 변화된 관계가 보였으며 시인은 오늘에서 개에 대한 변화된 의식을 전하면서도 반려견의 상품화를 우려하고 있었다. 양안다에게선 유입된 외국 문화가 가져온 우리의 상실과 그 상실이 열어놓을 또 다른 시작에 대한 기다림이 보였다. 영어는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니었으며 우리 말에 굳어져 있는 정서를 걷어내는 필터 구실을 하고 있었다. 홍지호에게선 이 땅의 우리 말 속에 공존하고 있는 이국이 보였다. 우리는 한국에서 살고 있어도 더이상 한국만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사는 우리들은 이국어를 써도 그 속에 모국어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내가 본 오늘의 세상이었다.
(『포지션』, 2018년 여름호,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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