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어구, 그 너머 —김선재 시집 『목성에서의 하루』

김선재 시집 『목성에서의 하루』

모순의 어구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나란히 공존하기 때문이다. 김선재 시집 『목성에서의 하루』에선 그러한 경우가 빈번하다. 우리는 모순의 어구를 읽지만 시인은 아마도 모순의 어구를 살았을 것이다. 모순의 어구를 사는 시인에겐 그 어구의 현실이 모순이 아니었을 것이다. 언어상으로 보았을 때 어구의 앞뒤가 충돌하고 있다고 해도 그러한 모순이 실제 상황으로 존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모순의 어구를 읽을 때 그 모순이 없는 모순의 현실로 건너가야 한다. 읽는다는 것은 어구의 모순을 빠져나와 그 모순의 현실로 건너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시의 한 구절을 통해 그 과정을 밟아보기로 한다.

신발을 돌려놓으면 누군가 들어왔다 안에도 없지만 밖에도 없는 사람이
—「담장의 의지」 부분

시인은 “누군가 들어왔다”면서도 그 누군가를 가리켜 “안에도 없지만 밖에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들어왔다면 밖에는 없겠지만 안에는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는 사람이라고 한 것일까. 이 구절의 현실적 상황을 이해하려면 어구의 모순을 빠져나가야 한다.
신발을 돌려놓았다고 했으니 신발을 정리한 것이다. 신발을 정리한 것을 보면 집안에서도 현관이다. 누군가 들어와서 신발을 벗고 들어오지 않고 현관에 서 있으면 우리는 말한다. 왜 거기 서 있어? 들어오지 않고. 그 순간 언어만으로 보면 그는 들어와 있으나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현관이란 그런 공간이다. 현관은 분명히 집안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말은 사람이 현관에 서 있을 때는 엄연히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안에서 지운다. 그 순간 그는 아직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안에는 없다. 동시에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니 바깥에서 보면 바깥에도 없는 사람이다. 현관의 사람은 그곳에 서 있으면 “안에도 없지만 밖에도 없는 사람이” 된다. 우리 말은 신발을 벗어두는 공간인 현관을 신발을 벗고 들어온 집안과 구별하며, 때문에 우리 말 속에서 현관은 안도 바깥도 아닌 공간이 된다. 이 모순의 어구는 그러므로 그가 들어오지 않고 현관에 서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쓰지 않았을까. 그것은 우리 말이 지워버린 현관의 그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시 구절을 인용해본다.

얼어붙은 유리창에서 퍼져가던 손가락의 온도, 뜨거운 눈이 내렸고 볼 빨간 아이들은 줄지어 숲 쪽으로 걸었다
—「한낮에 한낮이」 부분

내가 당황한 부분은 “뜨거운 눈”이다. 눈은 차다. 현실적으로 뜨거운 눈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뜨거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내리는 눈을 뜨겁게 바라보고 있었다고 쓰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눈에 뜨거운 마음이 얹혔기 때문이다. 눈을 뜨겁게 바라볼 때는 뜨겁게 바라보는 내 시선과 눈이 분리된다. 하지만 현실에선 내리는 눈에 뜨거운 마음이 충분히 얹힐 수 있다. 그 순간 뜨거운 마음과 눈은 하나이다. 그러한 경우 마음의 상태와 눈이 분리되지 않은 현실을 언어로 옮겨가려면 “뜨거운 눈”이란 말밖에는 다른 적절한 말을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뜨거운 눈”이란 모순의 어구는 그렇게 태어났을 것이다. 언어는 때로 옮길 수 없는 현실을 모순의 언어로 옮길 수 있도록 해준다.
시속에선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질 수 있다. 시인이 눈앞의 현상에 대해 예민하기 때문이다.

바람은 바람의 의지일까 지구의 의지일까 우리의 의지일까
—「오늘 하루 무사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부분

바람이 부는 것을 두고 그것이 바람의 의지인지, 지구의 의지인지, 우리의 의지인지를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을 필요도 없는 일 같아 보인다. 그러나 김선재는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필요 없는 일들이 필요한 날이 있다”고 말한다. 바람에 대한 의문도 바로 그런 날에 던져진다.
시인은 의문은 던졌지만 답은 주지 않는다. 답을 구해 본다. 바람은 대기의 흐름이란 측면에서 보면 그 흐름을 가져오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태풍은 바다의 기온 상승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 경우에 바람은 열에 대응하는 대기의 흐름일 수 있다. 그때의 바람을 가장 원형적 바람으로 볼 수 있다면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의 의지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의 움직임도 바람에 영향을 미친다. 지구의 움직임에 의해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면 이제 바람은 그 의지를 지구에 넘겨주게 된다. 집의 우리는 인공적으로 바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때 바람은 우리의 의지 아래 놓인다. 쓸데없는 것 같지만 대답은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답을 하다 보면 답에 따라 바람이 “하루아침에/다른 얼굴이 되어” 우리 앞을 불어갈 수도 있다.
어구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구 전체가 우리들의 일반적 인식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새들은 연습을 한다 떨어지는 연습, 떨어지려는 연습, 연습을 하다 보면 습관이 됐다 우리는 차례차례 떨어졌다
—「사실과 취향」 부분

우리의 일반적 인식 속에서 새들은 나는 연습을 한다. 떨어지는 연습을 하는 새는 없다. 하지만 이 시의 상황을 어디로 옮겨가느냐에 따라 시는 현실의 실질적 반영이 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취업이 어려워진 젊은이들이다. 젊은이들이 수없이 많은 회사에 취업 원서를 내면서 무수히 떨어져 봤다는 경험담은 이제는 흔한 얘기가 되어 버렸다. 그 정도면 차라리 붙으려고 원서를 내려고 하는 것이 떨어지려 원서를 낸다는 기분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시구절의 말미에 새가 우리로 전환되는 부분도 그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새는 날고 싶다는, 말하자면 우리 안에 내재한 자기 성취의 욕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가 새를 말할 때 그 새에게서 우리를 보는 일일 때도 있다.
모순을 노출하거나 일반적 인식과 충돌하는 어구를 건너가서 만나는 김선재와 이 세상의 관계는 대체로 원활치 못하다. 다른 무엇보다 지구의 삶이 시인에겐 감당 못할 정도로 너무 빠르다.

이곳의 한낮이 쏟아지는 동안
그곳의 이틀이 사라지고
—「목성에서의 하루」 부분

지구 얘기가 아니라 목성 얘기이다. 시에 덧붙여진 주에 따르면 “목성의 자전 속도는 지구 시간으로 약 열한 시간 이내로 태양계의 모든 행성 중에서 가장 빠르다”고 되어 있다. 목성에서 살면 하루가 지구보다 배는 빠르게 된다. 목성에서 살게 되면 속도의 채근을 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목성에선 사람이 살지 못한다. 가스 행성이기 때문에 발붙일 곳이 없다. 그러니 시인이 말하는 목성은 사실은 목성처럼 빠르게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지구 얘기이다. 시인은 속도가 채근하는 행성에서 “나는 여기 없어요 어디에도”라고 말하며 그 속도에 적응하고 있지 못함을 내비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삶이 바닥으로 추락하기 쉽다. 시에서도 그런 추락하는 삶을 시사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닥인 바닥과
바닥을 모르는 바닥

어느 쪽이 될까
어느 쪽이 될래

나는 더도 없고 덜고 없어 앞과 뒤가 없지. 그때도 없고 지금도 없으니까 내일을 모르고 모레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그냥 모르는 사람이 될래.
—「반성의 시간」 부분

“바닥인 바닥”은 말 그대로 밑바닥을 뜻한다. “바닥을 모르는 바닥”은 끝없는 추락의 삶을 가리킨다. 바닥과 추락 가운데서 골라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그다지 유쾌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럴 때 기댈 수 있는 개인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김선재에겐 개인적 관계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느 곳인지 알 수는 없으나 시인은 “당신은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모르고 당신은 아는 곳이었다”고 말한다. 그곳을 걷는 둘은 번번이 빗나간다. “나는 이곳이 끝이라고 말했고 당신은 그곳이 시작이라고 말했다”는 식이다. 둘이 함께 그곳을 잠시 걸었다면 이제 그곳은 둘 모두에게 익숙한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과 시인의 관계는 그렇질 못하다. 조금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는 그곳을 두고 다시 둘이 정반대로 어긋난다.

나는 익숙하고 당신은 낯선 곳이었다.
—「그곳」 부분

처음에는 “나는 모르고 당신은 아는 곳”이었던 곳이 이제는 “나는 익숙하고 당신은 낯선 곳”으로 바뀐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다만 나는 있고 당신은 없는 곳에서 당신은 있고 나는 없는 곳으로 우리는 걸어갔다. 제자리로. 각자의 자리로”라는 것이 시인의 전언이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지면 삶은 힘들어진다. 그러나 의외의 반전이 기다린다. 바닥은 침몰과 추락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만의 세계를 지킨 결과라면 그 바닥이 오히려 시인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있다.

더는 버릴 것이 없는
바닥이 오래 나를 쓰다듬었다
—「언덕들은 모른다」 부분

바닥이 곧 절망인 것은 아니다. “밤새 바닥을 더듬”다 보면, 더더욱 “무엇인가가 되지 않기 위해” 바닥을 살았다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바닥을 기꺼이 감내했다면 그 바닥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 가령 부당한 제안을 거절하여 그 결과로 가난하게 살았다면 바닥까지 내려간 가난이 그래도 그렇게 살아온 삶을 위로한다.
김선재는 묻는다.

우리가 말이 된 적이 있었을까
—「남아 있는 부사」 부분

어떻게 보면 김선재의 시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말을 찾을 시간”(「어떤 날의 사과」)이었을 것이며, 그 시간의 끝에서 시가 쓰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을 찾은 자리에서 우리는 모순의 어구를 넘어 우리의 세상을 다르게 만난다. 현실에선 바닥이 우리가 침몰하고 추락한 자리이지만 그 세상에선 바닥이 우리를 위로한다.
(『포지션』, 2018년 겨울호, 시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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