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얘기이다. 그 세상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사는 세상이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했다. 그 세상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 혐오로 가득찬 세상이란 것이었다. 나도 그 점은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다. 누가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으랴.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언론의 보도와 통계, 그리고 개인의 경험은 수없이 많다. 그러니 그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그녀의 현실이 시의 세상에선 어떠한지 궁금했다. 그녀가 겪는 세상이 시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는지 궁금했다는 뜻이다. 시에선 그녀가 말한 차별과 억압, 혐오가 극복이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방법은 당연히 그녀의 얘기를 듣는 것이었다.
미리 밝혀두어야 할 점이 있다. 그녀라고 칭했지만 그녀는 어떤 개인이 아니다. 그녀는 그녀라는 이름의 집합체이다. 집합체라면 그녀 속에 많은 그녀가 모여 있어야 하지만 사실 그녀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 세 시인의 시 속에 흩어져 있다. 세 시인은 김민정과 임지은, 이소호이다. 모두 자기 세계를 가진 시인들이지만 그 세계의 일부를 그녀의 이름아래 호명한 것은 하나의 주제에 시의 일부를 내줄 때 문학이 만들어내는 또다른 세상의 힘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문학은 그럴 때가 있다. 어떤 주제를 내밀었을 때 그 주제아래 시의 일부를 내주고, 그렇게 하여 만들어낸 집합체를 통하여 시인들의 세계를 하나하나 살펴볼 때와는 또다른 세상과 힘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렇게 하여 흩어져 있으나 하나로 모인 그녀를 만났다.
2
그녀가 가장 먼저 내민 것은 커다란 상자였다. 상자에는 캣콜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캣콜링은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여성을 향해 남성들이 휘파람을 불며 던지는 추근거리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상자에는 캣콜링의 언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시집의 한 페이지를 탁자 삼아 상자 속의 언어를 쏟아놓자 언어가 수북했다. 어떤 것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중에서 눈에 들어온 언어를 임의로 집어든다.
헤이뷰티플 순백의 빅토리아 시크릿
—이소호, 「캣콜링」 부분
‘헤이뷰티플’은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저기, 아름다운 사람이여로 옮겨질 수 있다. 말의 표면은 그런 뜻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나는 동양 여자에게 건네는 어떤 남자의 추근대는 수작이 이 말의 속내용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외국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상적 관심이라면 수작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속옷 패션쇼를 일컫는다. 그러나 그녀에게 여자들이 속옷을 입고 무대를 걷고 그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바라보고 환호하는 것은 집단 캣콜링의 현장이다.
때로 언어는 누군가를 그냥 가리키기만 해도 비하가 된다. 가령 일제 병탄 시기에는 조센징이란 말은 말만으로도 비하가 되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것은 조선인의 일본어 표현이지만 아무도 그 말이 표면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담보한다고 보지 않았다. 같은 연유로 누군가를 ‘치나’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비하가 될 수 있다. 그녀는 치나에 대해 “china. 스페인어로 중국, 혹은 중국인을 뜻하는 여성 명사”라는 주석을 붙여 나의 이해를 도왔다. 그 이해 속에서 주석은 내게 지나가는 동양 여성을 치나라고 부르면 그것만으로 희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캣콜링이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 캣콜링은 “엉킨 바지를 벗”는 행위 뒤에 외치는 ‘룩앳미’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적 희롱이 노골화되는 순간이다. 아예 캣콜링은 ‘퍼킹비취’라는 욕설로 날아들기도 한다.
아마도 그녀의 경험이었을 것이며, 많은 부분은 여행에서 왔을 수 있다. 특히 해외 여행에서 그 경험이 많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때마다 캣콜링의 언어를 하나둘 모았을 것이며, 그것을 상자에 담아두었다. 그것은 시의 이름으로 내 앞에 놓여 있었으나 어지럽게 뒤섞인 순서 때문에 마치 상자 속에 모아놓은 것을 쏟아놓은 느낌이 더 강했다. 모두가 영어였다는 측면에서 세상은 어디를 가나 캣콜링의 세상이었다.
다른 나라 얘기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이 길거리에서 겪었던 일로 그 반문을 막는다. 어느 날, “두 대의 택시가 횡단보도 앞에 나란히 선다.” 시간은 “오후 2시께”였다. 택시는 서서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 “운전석 유리창을 동시에 내리는 아저씨들이/있다.” 그리고 창을 내린 아저씨들은 무슨 말인가를 나눈다. 그녀는 그 순간을 가리켜 “수컷은 그때 그 순간에 잘도 싸기 위해 뭔가/참아주는 의뭉함이 늘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도대체 무엇을 싼 것일까. 아저씨들은 말을 배설했다.
—어디 가냐
—집에 간다
—대낮부터 마누라 너무 조지지 말고
—해수탕 가고 없다 내 마누라
—그럼 디비 자라 딸딸이 졸라 쳐대지 말고
—손님 카드 긁을 힘도 없다 이 씹새끼야
—김민정, 「오늘 하지」 부분
그리고 나서 택시는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제 갈 길을” 갔다. 하지만 아저씨 둘이 떠나기 전에 나눈 것은 말이 아니라 사실은 배설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그 둘을 가리키는 말을 아저씨에서 ‘수컷’으로 바꾼다. 남자에게서 몸의 욕망만 남기고 다른 것을 모두 제거했을 때 남자는 수컷이 된다. 수컷이 되면 말마저도 배설을 한다. 거리는 공개된 공간이다. 공개된 공간에선 누구도 배설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컷이 되면 공개된 공간에서도 배설을 마다 않는다. 그녀가 자신이 사는 세상이 그렇다고 했다.
공공연한 배설의 세상은 더러운 세상이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세상은 더러운데 더하여 무섭기까지 한 세상이다. 세상이 무섭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녀는 무서움을 좋아했었다. “나는 무서움이 할머니만큼 좋았다”고 고백했을 때, 그녀가 말하는 무서움이란 “시체를 파먹는 귀신이나/목소리로 아이들을 홀린다는 장산범”처럼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 무서움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녀는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을 만나게 된다.
그 날 그녀는 “깜깜한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다/내가 걸으면 걸었고 내가 멈추면 멈췄다.” 그러다 “처음 보는 그림자와 아주 가까워졌”고 그녀는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고 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녀는 그 순간 “남자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고 했다. 그녀는 말한다.
할머니, 이제 무서움은 이야기 속에 없어요
다리를 달고 거리를 걸어 다녀요
—임지은, 「무서운 이야기」 부분
그녀는 “남자가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쳐다봤”으며 “다시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그 골목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혹자는 모든 남자들이 그렇게 한적한 골목에서 여자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은 다르다. 한 남자가 어깨를 치고 지나가며 어둔 골목길을 공포의 공간으로 만들고 나면 그 공간에 출현하는 모든 남자가 치한으로 보이게 된다. 모든 남자가 치한이 아닌데도 모든 남자를 치한으로 보이게끔 만든 것은 어깨를 치고 지나간 남자이지 그것으로 인하여 모든 남자를 치한으로 의심하게끔 된 그녀가 아니다.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극복해야 무서운 세상을 안전한 세상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공포스럽게 만든 남자들의 행위 자체가 원천적으로 없어야 한다. 그 행위가 없으면 무서움도 없고 오해도 없다. 그런 측면에서 골목길에서 여자의 어깨를 치고 간 행위는 여자를 공포에 몰아넣을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남자들을 의심하게끔 만든다. 따라서 그런 행위는 이중으로 악질적이다.
그녀에게 세상은 부조리하다. 또 두렵고 무섭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은 바꿔야 한다. 실제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거센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로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오랫동안 그대로 감내해왔다. 무엇이 그녀를 감내하게 했고, 또 무엇이 그녀의 목소리를 일으킨 것일까.
우선 현실의 감내에 관해선 그녀의 어머니가 영향을 미친다. 그녀가 어머니와 관련하여 털어놓은 경험은 다음과 같다.
“다 괜찮다”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분명 엄마의 것인데
콩나물이 엄마 흉내를 내고 있다
—임지은, 「콩나물」 부분
어머니가 콩나물 다듬는 일을 오래하면 콩나물이 엄마 흉내를 낼 지경에 이른다. 사람들은 물을 수 있다.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하지만 사소한 일 같아도 콩나물 다듬는 일을 어머니가 오랫동안 반복하면 그 반복이 역할의 허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즉 콩나물 다듬는 일은 아버지도 할 수 있는데 마치 어머니만 할 수 있는 듯한 허상을 구축한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그 허상으로서의 엄마는 딸에게 고스란히 이전된다. 때문에 콩나물 다듬는 일 자체가 작은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런 허상으로서의 어머니를 딸에게 넘기지 않으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주 함께 콩나물을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머니는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나 때로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콩나물을 다듬 것만으로도 딸을 한 인간이 아니라 엄마로 키울 수 있다.
집안일은 사소한 일 같지만 그 사소한 일이 엄마를 만든다. 그러면 엄마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엄마가 하는 일이 된다. 전자는 남녀가 모두 할 수 있으나 다만 지금 엄마가 하고 있을 뿐이지만 후자는 그 일이 엄마 고유의 일이 되고 만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가스 불에 올려놓은 국이 흘러넘쳐 엄마를 만들었다
—임지은, 「모르는 것」 부분
나는 이 상황을 “가스 불에 올려놓은 국이 흘러넘”쳤을 때 다급하게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를 불렀다고 이해했다. 국을 끓이는 것은 엄마가 할 수 있다. 매일 해왔던 일이므로 능숙할 것이다. 그러나 국이 흘러넘칠 때 불을 끄는 일은 아버지도 해야 한다. 다급한 상황의 위험은 너나 없이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집안일은 사소하질 않다. 집안일을 두고 남녀의 경계를 없애는 일은 집안일이 곧 엄마가 되는 사태를 막아준다. 우리의 집안에선 그동안 그 경계를 없애는 일이 상당히 어려웠다.
엄마가 딸에 대해서만 규제와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은 현실도 그녀를 현실에 맞서 싸우기 보다 감내하는 인간으로 키울 수 있다. 그녀는 묻고 있다.
엄마는 하지 마와 그만해를 섞은 문장이에요?
—임지은, 「궁금 나무」 부분
“하지 마와 그만해”는 규제하고 제한하려 든다. 규제와 제한은 참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부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감내하면서 자라면 딸로서의 그녀는 이미 엄마가 된다. 말하자면 딸은 자라면서 엄마를 잉태한다.
하루 이틀 나는 엄마를 가랑이 사이에 달고 숫자를 센다 사흘 나흘 그렇게 열 달 동안 꾹꾹 밟고 나온 방광으로 질질 엄마를 낳고 엄마를 키우고 엄마를 먹이고 입히는 동안, 아빠는 노랗게 물든 사각빤스 안에 고추를 넣고 밤마다 고무줄놀이를 했다 한 달 두 달
—이소호, 「엄마를 가랑이 사이에 달고」 부분
그녀가 현실을 감내하며 자라게 된 것이 어머니 탓인듯 얘기했지만 더 심각한 것은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폭력을 당연화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힘이고, 힘은 그녀로선 대항하기가 쉽지 않다.
아버지는 제기 위에 온 가족의 손바닥을 두고 못을 쿵쿵 박았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헤어질 수 없단다 가족이니까 아빠는 마지막으로 못 머리를 자르고 영원히 뽑지 못하게 두었다
—이소호, 「경진이네 —5월 8일」 부분
제기 위에 손바닥을 두고 못을 박았다고 했으니 이 관습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관습니다. 어머니가 반복되면서 어머니의 일이 되듯이, 아버지의 폭력 또한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것이다. 어머니의 경우와 달리, 아버지는 반복되면서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짓마저 해도 된다는 허용의 허상이 된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남자의 세상이 되고 만다.
그녀가 그녀의 생각으로 산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할과 허용의 허상이 만든 세상은 그녀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남자의 생각으로 살게 만든다. 세상을 바꾸려면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첫순서이다. 그녀는 어느 날 그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누군가 다급하게 욕실을 두드린다
무슨 일이죠?
문밖에 한 남자가 서 있고
발밑에 그가 하다 만 생각이 쓰러져 있다
급하게 벗어놓은 슬리퍼처럼
너무 커서 신을 수 없는
생각을 일으켜 세우고서야 깨닫는다
그는 어떻게 내 머릿속에 들어온 걸까?
그러자 벼락처럼 끼어드는 생각
나 옷은 입었나?
—임지은, 「생각 침입자」 부분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그녀가 욕실에 들어갔을 때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그 남자의 생각을 “너무 커서 신을 수 없는/생각”이라고 했으니 그녀는 남자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했을까. 먼저 어머니는 잠깐 잊기로 한다.
엄마를 방 안에 넣고 다음 날까지 잊어버린다
—임지은, 「모르는 것」 부분
어머니는 미덕이 많다. 모두 지울 필요는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황이 다르다. 그녀는 아버지는 죽여 없앤 것으로 보인다.
손바닥을 활짝 펼친 우리는 아빠의 뒤통수를 쳤다 침대보로 목을 휘휘 감고, 밀물을 기다렸다 배가 고플 때마다 아빠의 점을 찍었다 주먹으로 매일매일 찍었다 엄마처럼
두꺼비집에 머리를 넣고 재웠다
이제 아빠의 모든 밤은
자고자고자도 밤이다
아빠 입이 뻘로 가득했다
—이소호, 「경진이네 —두꺼비집」 부분
“아빠의 점”이란 “아빠의 미간”에 찍어둔 점이다. ‘복점’이라며 그 점을 찍어 두었다고 했다. 시가 전하고 있는 액면 그대로의 말로 보자면 그녀는 “아빠의 뒤통수”를 치고 침대보로 목을 감았으며 밀물 때를 기다렸다 입이 뻘로 가득해지도록 물속에 방치하여 아빠를 죽였다. 이 일은 아빠가 “밥상을 엎”은 다음에 일어났다. 오해마시라. 설마 아빠를 죽였겠는가. 아빠는 그녀에게 죽은 사람이 된 것이리라. 죽은 사람이 되었으니 더 이상 영향은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겐 남자가 남아 있다. 그녀가 쓴 “1987년 4월 6일”자의 일기에 따르면 그녀의 남자는 “애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좀 문제가 있다. “집 밖에서” 애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옛날이었다면 세상은 그녀에게 참으라고 했을 것이며, 또 세상은 남자는 그럴 수 있다고 그녀의 남자를 비호했을 것이다. 그녀는 더이상 그런 말을 듣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한다.
부엌칼로 불알을 떼고
바지를 내렸다
—이소호, 「마이 리틀 다이어리 —우리 집」 부분
원래는 바지를 내려야 불알을 떼버릴 수 있으므로 이 서술은 순서가 잘못되었다. 그 얘기는 실제로는 상황이 달랐다는 뜻이 된다. 아마도 칼을 들고 불알을 떼버리겠다고 하면서 바지를 내리는 데서 그쳤을 것이다. 미수에 그쳤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바지를 내리기도 전에 불알부터 떼버린 도치된 서술의 문장이 나온 것은 그녀의 마음에서 먼저 불알이 제거된 때문일 것이다. 이제 이것만으로 그녀의 남자는 더 이상 바깥에서 애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또 이 얘기를 들은 세상 다른 여자들의 남자들도 어떤 위협감을 느낄 것이다. 때로 세상은 혹독한 징벌을 통해 바뀐다.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매우 당혹스러운 순간이 있었다. 그녀가 금기시되는 어떤 단어를 사용한 순간이었다. 그 단어는 남자들에게서도 금기시되지만 여자에게 금기시되는 강도가 훨씬 강하다. 여자에게서 그 단어의 사용을 금하는 정도를 생각하면 남자에겐 그 단어의 사용이 허용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남자들은 곧잘 그 단어를 입에 올리곤 한다. 그 단어는 좆이다.
네게 좆이 있다면
내겐 젖이 있다
그러니 과시하지 마라
유치하다면
시작은 다 너로부터 비롯함일지니
—김민정, 「젖이라는 이름의 좆」 부분
서른, 좆도 아닌 나이라지만 그 좆이야말로 슬픔의 심로라
—김민정, 「일요일은 참으세요」 부분
좆도 모르면서 큰 구멍만 탓하던 그날을
내 것이 얇고 가는 줄도 모르던 나를 기리던 그날을, 썼다
—이소호, 「누워 있는 경진」 부분
금기어가 남녀 모두에게 제한되어 있을 때와 달리 여자에게 더욱 강력한 제한을 두고 있다면 그때의 금기어는 말 자체 때문이 아니라 다른 불순한 의도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남자의 여자를 만들려는 의도이다. 즉 금기어를 설정하고 그것을 지키게 함으로써 남자의 세상을 감내하고 수용하는 여자를 만들어내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경우 그녀가 그 금기어를 썼다는 것은 세상이 원하는 남자의 여자가 되길 거부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럼 그녀는 어떤 여자가 되는 것일까. 당연히 그녀는 남자의 여자를 벗어나 독립된 개체로서의 여자가 된다. 때문에 그녀가 좆을 입에 올릴 때 그녀의 입이 거칠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남자들이 만들려고 했던 세상이 전복된다.
3
여자들이 모여서 집회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자들은 참가할 수 없고 생물학적인 여자들만 참가할 수 있는 집회라고 했다. 뉴스는 많을 때는 7만여 명이 모였다고 전했다. 한 몰카(누군가를 카메라로 몰래 찍는 범죄 행위)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몰카범은 여자였다. 세상의 모든 몰카범은 남자인데 단 한 번 뿐이었던 그 여자 몰카범에 대한 수사가 너무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이 오히려 여자들의 분노를 불렀다. 여자들은 모였고, 모이자 힘이 되었다. 힘이 된 집합체로서의 여자는 흩어져 있을 때의 여자와는 파급력을 확연히 달리한다. 이제 누구도 여자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동안의 세상을 바꾸고 여자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힘이 된다. 나는 그 무시할 수 없는 집합체로서의 여자가 시의 세상에도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그녀를 만나 얘기를 들은 이유였다.
흩어져 있으면 개인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들이 하나의 집합체로 모이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도 있다. 힘이 되면 두렵고 무섭게 살아야 했던 그녀의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 실제로 시 속에서 그녀의 말이 거칠어졌고, 그 거친 말이 남자의 여자로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을 독립된 개체로서의 여자로 바꾸어주었다. 현실에서나 시의 세상에서 모이면 힘이 되었다. 집합체로서의 여자로 살면 여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녀가 꿈꾸는대로 세상이 바뀌면 그때부터는 다시 흩어져 살아도 될 것이다. 그때가 비로소 안전하고 좋은 세상일 것이다.
(『애지』, 2019년 여름호, 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