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며칠 전 비오는 날을 골라
순천만에 가보시라고 했잖아요.
근데 사실 순천만에 가는데 무슨 따로 날이 있겠어요.
그냥 아무 때고 마음이 이끄는 날 가면 되지.
고백하건데 저도 사실 날을 골라 순천만에 간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그냥 가는 날, 비가 왔던 것 뿐이고,
또 가는 날, 비가 그친 뒤, 하늘이 쨍하고 맑았던 것 뿐이죠.
그러니 아무 때나 시간나는 대로 순천만에 가시면 되요.
저는 순천만엔 두번 갔어요.
올해는 서너 달을 부글부글 끓던 여름이 그 계절의 여장을 거두어
슬슬 떠날 차비를 할 때,
그 여름의 꼬리를 붙잡고 순천만을 찾았죠.
그날 아침은 좀 흐렸는데 그 뒤로는 정말 날이 맑았죠.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렀고, 갈대의 초록빛도 비온 뒤끝이라 아주 말끔했죠.
두 해 전 겨울에도 순천만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도 순천만의 해변을 하루종일 걸어다녔습니다.
겨울에 가면 갈대의 색이 여름과는 완연하게 다릅니다.
여름과 겨울에 찾았던 순천만의 추억을 한자리에서 돌아보며
두 계절이 각각 남겨준 서로 다른 갈대의 색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초록은 색이 가득찼을 때의 색이고,
갈색은 색을 비웠을 때의 색이란 느낌이 들더군요.
가득찬 색도 아름답고, 텅빈 색도 아름답습니다.
사실 갈대의 초록을 충만하고 가득찬 색으로 보고,
갈색은 자신을 텅 비워낸 색으로 보는 것은
그리 잘못된 생각은 아닙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머니는 당신을 비워
나를 채워주셨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녀도, 그녀의 어머니가 당신을 비우면서
그녀를 채워준 것이었죠.
그녀는 이젠 자기 색을 비우면서
그 색을 자신의 아이에게 채워주고 있습니다.
색을 채워가는 아이도 아름답지만
색을 비워가는 어머니도 아름답습니다.
갈대야 저 혼자 색을 채웠다 비웠다 하지만
사람은 색을 물려받아 채우고, 또 비우면서 물려주는 것 같습니다.
갈대는 계절의 흐름을 따라 색을 채우고 비우지만
사람은 채우고 비우는 색이 함께 삽니다.
순천만에 가면 갈대밭에서 그렇게 계절마다 색이 채워지고 비워지며
우리 사는 곳에선 집집마다 색이 채워지고 비워지고 있습니다.
2 thoughts on “가득찬 색과 텅빈 색”
그림같은 사진작품이군요.
가득찬 색과 비운 색이란 표현 너무 좋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텅빈 색이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순천만이 워낙 풍경이 좋다보니…
겨울 사진 찍을 때는 밤열차를 타고 내려가는 바람에 해뜰 때까지 순천만의 깜깜한 갈대밭에서 기다리다가 얼어죽는 줄 알았어요.
겨울엔 사진찍기가 쉽지 않은 거 같아요.
아무래도 털모자랑, 장갑을 사야겠어요.
장갑은 한해에 하나씩 잃어버려서 그렇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