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미 온갖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온갖 것으로 가득 채워진 그 세상을 산다. 지금의 세상을 모두 비워버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세상을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놀라운 세상이 있다. 시의 세상이다. 시의 세상에선 우리가 사는 기존의 세상이 완고함을 버리고 그 자리를 시에 내준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시인 또한 놀라운 존재이다. 시인은 세상의 어느 것 하나 그 자리에서 밀어내질 않는다. 세상을 그대로 두고 그들이 구축하는 시의 세상을 우리의 세상에 중첩시켜 건설한다. 차주일은 그런 면에서 더더욱 두드러지는 능력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예를 들어보자. 봄이 되면 목련이 핀다. 꽃이 먼저 피고 이어 잎이 난다. 이 순서는 거의 바뀌는 법이 없다. 자연의 질서는 의외로 완고하다. 목련꽃이 필 때, 차주일은 “목련꽃 봉오리가 화선지에 먹물 스미듯 부풀고 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만으로 보면 화선지에서 부푸는 먹물은 목련꽃의 그림으로 오해되기 쉽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울 것은 없다. 그림의 꽃 또한 목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련의 자리에 시인이 먹물을 부풀려 채워넣은 것은 목련의 그림이 아니라 “붓이 한 획을 내려긋기 전/점 하나 힘주어 누르는 저 잠깐”의 순간이며, “꽃 진 자리에서 햇잎이” 나는 순간은 “넓어지는 잎 따라 바람의 획이 굵어”지는 순간이다. 점과 획은 목련의 자리를 채우는 것이 그림이 아니라 글자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시인은 그 짐작을 더욱 구체화하여 목련꽃이 피고 이어 잎이 나는 순간이 시인의 ‘어머니’가 “봄철 내내 궁서체”로 “내리긋기 습자 중”인 글자 ‘ㅣ’라고 밝힌다. 말하자면 목련이 피었다 지고 이어서 잎이 날 때까지의 긴 시간이 차주일에겐 한 점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내리긋는 글자 ㅣ이다. 시인의 세상에선 목련이 꽃과 잎의 그 긴 시간을 글자 ㅣ에 내준다.
더 놀라운 것은 반대의 경우이다. 목련의 꽃과 잎의 시간이 글자 ㅣ가 되면 그것은 곧 글자 ㅣ 또한 목련의 꽃과 잎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글자 ㅣ를 화선지에 내려그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목련의 꽃이 피고 잎이 난다. 하지만 노령의 나이 때문인지 어머니에게선 그것이 쉽지가 않다. 대신 어머니는 글자를 쓰려고 시작을 하려다 멈추는 순간을 반복하고 화선지에는 계속 점이 찍힌다. 시인은 그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당신 몸에서도 봄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어머니
봄철 내내 궁서체 ‘ㅣ’내리긋기 습자 중이다.
한 획 채 내리긋지 못하고
봄 한 철 차마 놓아주지 못하고
목련꽃 봉오리 같은 먹점을 화선지에 가득 채워놓았다.
—「궁서체」 부분
현실의 세상에선 목련꽃이 피지만 시의 세상에선 같은 자리에서 먹물이 부풀며, 또 현실의 세상에선 노령의 어머니가 화선지에 먹점을 가득 찍고 있지만 시의 세상에선 그 자리에서 목련이 꽃봉오리를 잡는다.
차주일의 시에선 이와 같이 세상이 글자나 어떤 말로 채워지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석불 앞에 큰절로 엎드”려 ‘망부석’이 된 사람이 “제 몸보다 큰 제 그림자에 들어 있”을 때면 그는 “뜨거운 마음 하나 갇혀 있는 몸”을 알아 본다. 시인은 그 사람을 “필시 돌아올 회(回)자의 원형”(「回의 완성」)일 것이라고 읽어낸다. 그 순간 돌아올 회자의 바깥 사각형은 몸이 되고, 안의 작은 사각형은 몸 속의 마음이 된다.
“산란을 위해 제 주검을 찾아가”는 회귀성 물고기들이 강물을 거슬러 오를 때 차주일은 “회귀어가 몸통에 지느러미를 수없이 고쳐 쓰며/강물 소리를 열고 있다”고 말한다. 지느러미를 좌우로 흔드는 “회귀어의 몸짓”은 그에게서 “자음이 주도하는 필법”이 되며, 그 필법으로 쓰여지는 글자들을 읽어냈을 때 ‘강물 소리’가 된다. 그 “강물 소리를 받아적는 들판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자음의 필법」)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바람이 흔들고 지나가는 들판이 물결처럼 일렁일 때 그것이 강물 소리를 받아 적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짐작이었다.
차주일에게 있어선 ‘그림자’가 나를 기록하는 하루의 일기이다. 저녁은 “신이 내 일기를 엿보는 시간”이며, 그는 “신이 내 그림자 한 장을 찢으면/오늘 바라본 풍경 앞에 어제라는 색인이 붙”으면서 하루가 정리된다고 말한다. 현실에선 우리가 그림자를 끌고 돌아다니지만 시의 세상에선 우리가 바닥에 그림자를 내려 그 그림자 속에 우리를 촘촘하게 기록하며 돌아다닌다. 시인의 얘기에 따르면 “새벽마다 부여받는 그림자에는/신이 필사해간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차주일에게 세상은 온갖 것으로 이미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글자와 말로 쓰여져 있다. 또 끊임없이 새로운 글자와 말로 쓰여질 수 있다.
세상은 온갖 글자와 말인 한편으로 또 하나의 악보이기도 하다. 이런 구도에서 보면 “무녀 댕기 같은 금줄이 감겨 있는” “고갯마루”의 ‘돌탑’이 ‘음자리표’가 된다. 음자리표가 자리한 그곳은 세상을 기호로 기록되어 있는 음, 즉 악보로 바꾸어 놓는다. 그는 그 앞에서 “낯모르는 사람들이 홀로 찾아와 첫 마음을 모아놓은” 것이 이 돌탑일 것이라고 전하며 “이곳을 지나가려면 금단의 악보를 읽어내야만 한다”고 말한다. “금단의 악보”란 말은 금지의 뜻보다 이곳을 악보로 읽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뜻으로 들리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시인이라면 이곳에 채워진 악보를 읽지 않고는 이곳을 지나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읽었다. 악보를 읽어낸 그는 돌탑 앞에 선 자신에 대해 “음표처럼 붙들린 날 보았다”고 회고한다. 악보의 세상에서 시인은 노래의 한 음이 된다. 지나는 내가 음표가 되는 그 세상에서 ‘금줄’과 “물아래로 이르는 내와 유곡으로 드는 길/시집보내는 길과 상여 나가는 길/해와 달이 머무는 능선과 새들이 드나드는 등고선”은 모두 “돌탑의 오선”이 된다. 시인은 그 악보가 만들어내는 음역대의 노래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략)이 음역에서
풀과 나무가 꽃과 열매를 피우고 맺고
숨을 부여받은 것들 모두 생동하고 있다.
모양과 크기와 색깔과
머무는 시간과 흔들리는 속도와 진동하는 빛깔과
떨어지는 길이와 향의 높이까지 모두
돌탑 음자리표에 박자를 맞추고 있다.
—「풍경의 음자리표」 부분
현실적 풍경으로 보자면 어느 동네의 고갯마루에 돌탑이 하나 서 있고, 냇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으며, 그 공간을 풀과 나무가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차들이 다니는 현대화된 도로를 벗어나 옛길을 찾으면 지금도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차주일에겐 그 풍경이 노래를 예비한 하나의 악보이다.
이러한 예는 고목에서 핀 새로운 가지를 보았을 때도 똑같이 반복된다. 그는 이런 순간을 가리켜 “나만의 노래를 찾아 방황하던 중/속 텅 빈 고목에서 새나는 물소리를 들었어./그간 수많은 형상을 옮겨 쓴 낡은 악보를 버리며/그 어떤 까닭이 햇가지에게/다른 박자를 선택하게 했을까 생각했어”(「또다시 허밍(humming)」)라고 말하고 있다. 고목에 새로 난 나뭇가지가 그에겐 “다른 박자를 선택”한 새로운 악보이다. 차주일에게 있어 세상은 풍경의 자리에 악보를 채워놓고 있다.
세상은 완고하지만 차주일은 그 완고한 세상에 글자와 말, 악보를 채워 시와 세상의 공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공존의 세상에서 우리는 세상을 사는 한편으로 글자와 말, 악보와 음악으로 이루어진 시의 세상을 동시에 살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가 언제나 그렇듯 공존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동시에 시대와 불화하기도 한다. 뜻밖에도 그가 세상과 불화하는 경우는 사랑을 말할 때이다. 그가 살아온 시대의 사랑과 이 시대의 사랑이 많이 다르다는 뜻도 된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는 「사랑」이란 부재가 달려 있다. 그러니 이 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시이다. 시는 “자신을 먹이로 쫓던 새를 찾아가/그 새의 눈물을 빨아먹어야만 살아남는 나방이 있다”는 얘기로 시작된다. 이런 경우 나방은 새의 먹이이기 때문에 “새의 눈물을 빨아먹”으려면 자신을 숨겨야 한다. 그리하여 새는 자신을 숨기기 위하여 ‘날갯짓’을 “천적의 맥박 소리에 맞”춘다. 나방이 날갯짓을 할 때 새는 그것을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로 착각할 것이다. 새의 “잠든 눈까풀을 젖”힐 때 나방은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을 정도의 “정지된 속도로/천적의 눈물샘에 긴 주둥이를 밀어 넣”는다. 나방은 새에게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긴다. 때문에 나방은 “날개로 비행 궤적을 지우는 고요의 종족”이다. 시의 부제가 사랑이므로 이는 곧 사랑의 운명이기도 하다. 사랑은 우리의 일반적 인식 속에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내 마음을 드러내고,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사랑을 말하는 상대를 받아들이는 일이지만 차주일의 인식 속에선 그와 반대이다. 나를 드러내는 순간 사랑은 없다. “천적의 눈물에 침전된 염기를 걸러/제 정낭을 채”우고 “상사 빛 날개를 삼켜 다시 염낭을 채”우는 것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미기록종 나방”과 같은 것이 사랑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서 그 미기록종의 나방이 갖는 운명은 “내가 가위눌린 몸짓으로 썼던 미기록종의 자음들”이 되며, 사랑은 고백된 사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발설되지 못한 사랑을 입을 열어 들여다 봄으로써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차마 소리로 뱉지 못할 자음이 있어
모음만으로 울며 날아가는 궤적을 읽어보아라.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사랑」 부분
차주일에게 있어선 “소리로 뱉”을 수 있는 것이 자음이며, “차마 소리로 뱉지 못할 자음이 있어” 그 자음이 “모음만으로 울며 날아가는 궤적을”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 속에 머물뿐 우리를 나오질 못한다. 사랑은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우리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시는 드러내고 표현하려 들었지만 차주일은 세상에 옮길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오히려 속에 품고 있을 때 온전한 것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사랑은 그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그에게 “사랑 고백이 가능한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가시의 보폭으로//아이스하켄을 박으며 기어오른 장미 한 송이”의 것이며, 그러한 “식물의 관습을 불러 올 수 없는” 것이 사람의 한계이다. 그래서 그는 장미를 앞에 두고 “사랑의 감정에 박힌 중심축 “아!”를/입술로 옮길 수 있을까”를 물으며 ‘사람의 습관’(「아!」)에 회의한다. 나는 그의 회의에서 이 시대의 흔한 사랑과 불화하고 있는 그의 사랑을 보았다.
세상을 비슷하게 묘사하고 표현했다면 그 시는 쓰여진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주일의 시에서 나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형상의 글자와 말, 그리고 악보를 만난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시대의 사랑을 만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쓰여져 있다기 보다 세상을 시로 채우고 있다. 때로는 세상과 공존하며 또 때로는 시대와 불화하며 그의 시가 세상에 채워져 있다.
(『현대시학』, 2018년 5.6월호, 절친 리뷰)
-대상 시집: 차주일 시집,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포지션, 2017
차주일 시인의 사진 몇 장
가끔 차주일 시인과 술을 마신다. 차주일 시인이 아는 시인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이기도 하다. 술자리가 끝날 때쯤 기념삼아 사진을 남겨두기도 한다. 2013년 6월 24일에는 인사동의 완산골에서 모였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차주일 시인이다.
2014년 6월 2일에는 대학로의 한 맥주집에서 차주일 시인을 만났다.
2016년 12월 15일에는 종로3가의 한 술집에서 차주일 시인을 만났다. 지금은 없어진 번지없는 주막이 그곳이다. 바로 옆 모습이 눈에 들어와 사진을 한 장 찍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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