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체감하는 시의 세상 —오규원의 시 세계

『모멘트』 2018년 하반기호 오규원론 게재 페이지
『모멘트』 2018년 하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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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감각으로 세상을 체감한다. 이때 주된 역할을 하는 것은 시각이다. 우리는 세상을 보고 느낀다. 하지만 세상을 본다는 것이 반드시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때로 지식을 통하여 세상을 지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러한 앎이 시각적 체험을 통하여 얻어진 것은 아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경험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구가 둥글다고 했을 때 우리는 습득한 과학적 지식을 통하여 지구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시각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때로 과학적 지식이나 정보를 통하여 세상을 볼 때가 있다.
오규원의 시에서도 그런 예가 있다.

눈물 속에 산소와 수소가
나란히 걸어가고
원자들이
타협적인 눈을 굴리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길」 부분

“산소와 수소” 같은 원자들이 눈에 보일 리가 없다. 그러니 오규원은 물이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는 화학적 지식을 통하여 눈물을 본 것이다. 화학적 지식을 통하여 보게 되면 눈물이 뺨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릴 때 “산소와 수소가/나란히 걸어가고/원자들이/타협적인 눈을 굴리며/어깨동무를” 한 채 행진하는 모습이 보이게 된다. 엄밀하게 보자면 눈물은 물이 주성분이긴 하지만 눈물 속에는 나트륨과 포도당도 약간 들어 있으므로 원자들이 어깨동무를 할 때 나트륨과 탄소도 어깨동무의 대열에 끼어들었을 것이다.
생물학적 지식으로 보자면 우리 인간도 수십 조에 달하는 무수한 세포들의 공동체일 수 있다. 우리가 움직이면 우리 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포들이 일거에 집단으로 이동한다. 우리의 몸이라는 공동체에선 하루하루 수많은 세포들의 죽음과 새로운 삶이 되풀이된다. 우리는 죽으면서 동시에 태어나고 있는 존재가 된다.
지식을 통해 세상을 보았을 때의 미덕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동일한 세상을 전혀 다르게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이 눈물을 흘릴 때 산소와 수소가 어깨동무를 하고, 간간히 그 어깨동무에 나트륨이나 탄소도 끼어들어 함께 행진하는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규원에게 시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혹시 과학적 지식이 새로운 경험 세계를 열어주듯이, 시는 언어가 열어주는 또 다른 체험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체험은 피부 가까이 와닿는 생생한 느낌을 선물한다. 그의 시가 언어를 통한 또 다른 세계의 체험이라면 그 체험은 얼마나 우리의 피부 가까이 와닿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런 점에 주목하여 오규원의 시들 가운데 몇 편을 고르고 그 시들을 살펴보려 한다.

2
과학적 지식의 성과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한 연구를 통해 얻어진다.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세상에 대한 시적 체험을 안겨줄 수 있는 언어들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시는 결과물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과학의 경우처럼 시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은 분명하질 않다. 또 그 방법론을 분명하게 밝혀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비유를 통해 엿보는 것은 가능하다. 시 「분명한 사건」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 방법을 엿보기로 한다.

안경 밖으로 뿌리를 죽죽 뻗어나간
나무들이
서산에서
한쪽 다리를 헛짚고 넘어진 노을 속에
허둥거리고 있다.
키가 큰 산오리나무의 두 귀가
불타고 있다.
—「분명한 사건」 부분

시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안경의 안쪽과 바깥쪽이 달리 보이는 것일까? 시인이 안경의 안과 밖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경의 밖에선 안경의 안에선 보이지 않는, “죽죽 뻗어나간” 나무들의 뿌리가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나무들의 뿌리가 보일 리는 없다. 그러니 안경의 바깥은 눈으로 보는 세상이 아니라 생각으로, 혹은 앎으로 보는 세상이다.
우리는 세상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을 참지 못한다. 안경을 쓰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안경은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세상을 순식간에 선명하게 뒤바꾸어 놓는다. 문제는 세상이 선명하게 보일수록 우리들이 그 선명한 형상에 포박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을 기존에 보던 방식 그대로만 보게 된다.
이 시선의 답습을 벗어나기 위한 오규원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안경의 바깥을 흐릿한 상태로 방치한채 그 자리를 앎으로 채우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뿌리를 죽죽 뻗어나간/나무들”이다.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나무들이 모두 땅속으로 뿌리를 뻗고 있음을 알고 있다. 간단해 보이지만 효과는 크다. 이렇게 하여 시선의 답습을 뿌리치자 “한쪽 다리를 헛짚고 넘어진 노을”과 그 노을 속에 “허둥거리고 있”는 나무가 보였기 때문이다.
노을은 아름다우며 때로 몽환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언어로는 노을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체감되지 않을 수 있다. 엘리어트는 그의 시 『프루프록의 연가』에서 저녁을 가리켜 “마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고 했었다. 나는 오규원의 노을도 같은 맥락에서 보았다. 한쪽 다리를 헛짚고 넘어졌을 때 그 아뜩한 순간의 경험이 노을을 바라보는 시인의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노을이 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나는 나무들의 허둥거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었다고 짐작하며 그 흔들리는 모습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겹쳐 귀가길을 서두르는 모습으로 변이되었다고 생각한다.
안경의 안쪽은 선명하지만 그 세계에 머물면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와 노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그리고 “키가 큰 산오리나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안경의 바깥으로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 “한쪽 다리를 헛짚고 넘어진 노을”과 이제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간이라고 마치 귀갓길이라도 서두르는 듯 “허둥거리고 있”는 나무들이 있는 세상이다.
습관적 언어의 경계를 벗어나면 그렇게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물론 그 풍경의 세상도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동일하다. 하지만 시인이 포착하는 그 세상의 언어는 이 두 세상이 같은 것일까를 묻게 될 정도로 확연히 다르다.

죽은 꽃들을 한 아름 안고
문 앞까지 와서
숙연해지는 들판.
—「정든 땅 언덕 위」 부분

나는 이 구절을 문밖에 들판이 펼쳐져 있고, 들판의 꽃들이 다 진 풍경으로 이해했다. 일상적 언어 속에선 들판은 누워있고 꽃들은 죽어 있다. 그러나 오규원의 언어 속에선 들판이 일어나 꽃을 들고 문 앞으로 온다. 꽃이 죽었으니 찾아온 들판이 숙연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 다른 시를 읽어본다.

당신의 책상 서랍에는
우편 요금에게 미안한 얼굴을 하고
봉투가 앉아 있다.
—「현황 B」 부분

책상 서랍 속에 우표까지 붙여놓고 부치지 않은 편지를 오랫동안 방치해놓고 있는 상황이다. 봉투는 얼굴이 없다. 다만 주소만 적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부치지 않고 방치하면 오규원의 시 세상에선 그 봉투가 표정을 갖는다.

바람이 불고 간 그 이튿날
뜰에 나간 나는
감나무의 그림자가 한 꺼풀 벗겨진 걸
발견했다.
—「그 이튿날」 부분

사실 한 꺼풀 벗겨진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나무이다.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감나무의 잎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나무에 모인다. 하지만 시인의 시선은 감나무 그림자로 옮겨간다. 옮겨갈 때 그냥 옮겨가지 않고 감나무의 잎이 바람에 많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옮겨간다. 그러면 “감나무의 그림자가 한 꺼풀 벗겨진” 것이 보인다.
오규원의 시에서 그의 언어는 그의 시에 갇히지 않는다. 때로 언어가 그의 시를 걸어 나와 우리에게로 오기도 한다.

날마다 아침은
구름 아래로 깔리는
삼월의 뜰에 서 있곤 했다.
—「아침」 부분

우리는 이 시에서 오규원이 이 시를 쓸 때 살던 곳에는 뜰이 있었고 삼월이면 매일 구름이 낮게 뜨는 날이 많았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아침이면 사는 곳의 뜰이 환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뜰이 환해지면 우리에겐 아침이 된 것이나 그에겐 아침이 들에 와서 서 있는 것이다. 오규원의 이 구절은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만의 아침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가령 내가 사는 아파트에선 아래를 내려다보면 골목이 보이고 그 골목이 환해지면서 아침이 온다. 대개 아침 시간이면 골목은 출근하는 사람들의 걸음으로 분주하다. 그러니 나는 날마다 아침은 출근하는 사람들의 바쁜 걸음을 흘려보내며 시월의 골목에 서 있곤 했다는 오규원풍의 아침을 가질 수 있다. 시인이 아침을 삼월의 뜰에 세워 그의 아침을 맞이하자 그 덕택에 우리 모두가 사는 곳에 아침을 세워 우리의 아침을 시인처럼 맞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규원의 시는 때로 시에 우리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를 걸어 나와 우리의 세상으로 온다.
시의 내용이 현실과는 정반대로 어긋날 때가 있다. 현실의 얘기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들은 길을 모두 구부린다
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平野]이
몸을 풀어
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
—「순례 序」 부분

오규원은 들이 “길을 모두 구부린다”고 했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그 들이 평야이기 때문이다. 평야에선 논둑길이 일직선으로 흐르며 논을 반듯반듯하게 구획한다. 길을 구부리는 것은 평야지대가 아니라 산악지대이다. 강원도의 논에선 산의 형세에 맞추어 논둑길이 구불거리며 길을 간다.
내가 받았던 교육은 산악지대의 구불거리는 논둑길을 경지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낙후된 농촌의 사례로 가르쳤다. 반대로 반듯반듯하게 구획된 평야지대의 논을 가진 곳은 경지 정리가 잘되어 기계화가 가능한 문명화된 농촌이다. 나는 강원도 시골에서 자랐고, 졸지에 내가 자란 곳은 문명화되지 못한 곳이 되고 말았다. 문명은 그렇게 세상을 도식화한다. 그 도식 속에선 반듯한 곳이 문명이 되고 구불거리면 낙후된 곳으로 분류된다. 길이 거의 항상 구불거리는 곳에서 자란 나는 한동안 문명으로부터 뒤처진 세계에서 성장했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오규원은 그의 시에서 그 도식적 세상을 뒤엎는다. 현실에는 없으나 그가 구축한 시의 세상에선 평야가 길을 구부린다. 도식주의를 얼마든지 폐기할 수 있는 것이 그 세상이다. 그의 시를 접하고 난 뒤로 나는 도식주의의 폐해에 물들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행운아가 되었다. 산이 논둑길을 구부리던 내가 자란 곳은 문명에선 멀지만 시와는 더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혜택받고 자란 삶을 갖게 되었다.
들이 길을 구부리는 오규원의 세상이 시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세상은 시를 나와 현실로 온다.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저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개봉동과 장미」 부분

이 구절의 현실적 상황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개봉동 입구”에선 구부러진 길가에 장미가 한 송이 피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 도식적 시각으로 세상을 볼 필요가 없다. 시의 세상에서 폐기된 도식주의를 현실에서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된다. 그리고 그 도식적 시각을 버리면 길이 장미 때문에 굽어지고 장미가 그 “길을 저 혼자 가게 하고” 길 밖으로 서는 세상이 펼쳐진다. 언어를 바꾸면 현실이 바뀐다.
도식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세상을 재편하는 일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 간단한 방법도 있다.

낮은 하늘이 몰고 온 나직한 평화는
뒤뜰에 소리 없이 떨어지던 홍시였다.
—「어느 마을의 이야기 —유년기」 부분

뒤뜰에 소리 없이 홍시가 떨어지고 있고 하늘은 낮게 내려앉은 날, “나직한 평화”를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규원은 그런 날, 그 모든 평화를 떨어지는 홍시에 담아서 하늘의 선물로 받아보라고 말한다. 그러면 작은 홍시 하나에 엄청난 평화가 담길 것이다. 평화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도 괜찮은 일이긴 하지만 평화를 홍시에 담아보는 것은 더 괜찮은 일이다. 비교적 간단한 일이기도 하고, 나중에 정말 말 그대로 평화의 맛을 달콤하게 맛볼 수 있기도 하다.
이제 오규원의 시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시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난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한 잎의 女子」 부분

나는 이 시를 사랑에 관한 시로 보지 않고 사랑의 방법론에 관한 시로 보았다. 즉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아니라 사랑은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보았다. 오규원에 의하면 사랑이란 물푸레나무 자체가 아니라 그 나무의 무수한 잎들 중 한 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얼마나 작겠는가. 그러나 오규원에 의하면 그 한 잎에는 솜털이 있고, 맑음이 있고, 영혼이 있고, 눈이 있고, 순결과 자유가 있다.
솜털이 있다고는 했지만 사실 물푸레나무잎의 앞면에는 털이 없다. 털을 보았다는 것은 뒷면을 보았다는 얘기가 된다. 뒷면에서도 잎맥에 털이 있다. 그러므로 그냥 잎을 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자세히 들여다본 것이다. 솜털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맑음은 초록이 한창일 때 잎의 색이 주는 느낌일 것이다. 잎의 맑음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무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리고 잎을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잎과 눈을 마주한 느낌도 들 수 있다. 나무와 달리 잎은 바람에 흔들린다. 가지에서 떨어져 날아가기까지 한다. 움직임을 자유로 본다면 잎은 자유롭다. 그러나 물푸레나무의 잎이 떨어져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고 다른 잎이 되진 않는다. 물푸레나무의 잎은 떨어져도 물푸레나무의 잎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잎은 순결하다. 그렇게 눈여겨보면 잎은 작지만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사랑이란 그렇게 작은 것에 주목하는 일이며, 그렇게 작은 것에 주목하면 우리는 많은 것에 눈뜨게 된다. 오규원에게 있어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살면서 한 여자가 가진 수많은 작은 것들에 눈뜨는 것이다.
오규원에게 있어 사랑은 처음에는 비유를 통해 나타났지만 그 사랑은 현실이 된다. 현실의 한가운데서도 그가 말했던 사랑의 방법론은 변함이 없다.

나는 사랑했네 한 女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 입는 女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女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女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女子, 라면이 먹고 싶다는 女子, 꿀빵이 먹고 싶다는 女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女子, 손발이 찬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레지어를 하는 女子.
—「한 잎의 女子 2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부분

오규원은 사랑을 말하면서 한 여자의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나열한다. 언뜻 보면 쉽게 보이지만 이는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함께 사는 여자의 자질구레한 삶을 떠올려 보려 했으나 세 가지를 꼽기가 어려웠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사는 여자와 남자의 자질구레한 사실들에 대해 적어보려고 해도 몇 가지를 적어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시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시의 구절들은 어느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하나둘 모아져 시가 되었을 것이다.
시가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법론을 말하면 그 시의 사랑은 누구나 활용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여 누구나 자신과 함께 사는 여자를 유심히 관찰하며 그 여자의 자질구레한 습관이나 생활을, 혹은 그녀의 바람을 그때그때 적어둘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우리들은 오규원풍의 사랑 노래를 한 편 가지게 된다. 아마 그것보다 더 괜찮은 사랑의 방법도 없지 않을까 싶다.
대체로 수치는 구체적 삶을 삼켜버릴 때가 많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8백만 명이 최저 임금도 못 벌고 있다는 현실을 전하고 있는 통계 수치는 많은 사람들이 낮은 임금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은 줄 수 있지만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들이 하는 일에 비하여 얼마나 부당한 임금을 받으며 착취당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질적 현실을 생생하게 전하진 못한다. 통계 수치 속에선 구체적 현실이 삭제될 때가 많다. 그러나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하나둘 수치로 짚어갈 때 오히려 현실이 구체적으로 손에 잡힌다.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 부분

시는 동네의 한 구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세고 그것을 시로 삼는다. 의미 없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임금 하나를 기준으로 수치 속에 사람들을 모아 뭉뚱그리는 통계와 달리 시의 수치는 구체적 대상을 하나하나 세어서 완성되기 때문에 수치를 세는 동안 세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산다. 때문에 수치로 세면 동네는 수치 속에 뭉뚱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수치로 구체화된다. 통계 때와는 정반대의 경우이다. 누구나 해볼 수 있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구간을 잘 설정하면 더욱 특별한 의미를 얻게 될 수도 있다. 가령 아이의 등교길을 구간으로 삼는다면 그 등교길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여지가 크다. 다 세고 나서 수치로 정리하고 나면 아이의 등교길이 오규원풍의 등교길이 될 수도 있다.

오후 2시 나비가 한 마리
저공으로 날았다 나비가 울타리를
넘기 전에 새가 한 마리
급히 솟아올랐다 하강하고 잠자리가
네 마리 동시에 천천히
가로질러 갔다 동쪽의 자작나무와 서쪽의
아카시아나무 사이의 이 칠십 평의
우주는 잠시 잔디만 부풀었다
—「뜰의 호흡」 부분

뜰도 숨을 쉴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시의 제목 때문이었다. 오규원은 뜰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 가지 움직임을 관찰한 뒤 그것을 거의 그대로 전한다. 그리고 제목을 통하여 그것을 「뜰의 호흡」이라 일컫는다. 이는 우리의 집안으로 옮겨올 수 있다. 그러면 집은 한집에 사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호흡을 삼을 수 있다. 아침 6시쯤 출근을 위해 몸을 뒤척이는 딸과 그 딸의 출근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아이 엄마가 부엌에서 내는 온갖 소리로 집이 아침 호흡을 시작할 수 있다. 알게 모르게 세상 모든 집들은 사실은 오규원풍의 호흡으로 숨 쉬고 있다.
이제 마무리를 할까 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시는 오규원의 마지막 시집 『두두』에서 골랐다.

아이 하나 있습니다
강가에

아이 앞에는 강
아이 뒤에는 길
—「아이와 강」 전문

강가에 아이 하나가 서 있고, 아이 뒤로는 길이 하나 놓여있다면 그림 같은 풍경이 아닐까. 시는 때로 그림이기도 하다. 다만 언어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 그림에 가닿는 일은 시인이 해야 할 작업이 아니라 읽은 자들의 몫이 될 수도 있다. 가령 내 경우 이 그림 앞에선 아이를 졸졸 따라온 길이 강가에서 몸을 한껏 낮추고 마른 목을 축이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대개 언어는 시인의 몫이다. 그러나 오규원은 때로 자신의 몫인 언어마저 내놓고 대신 그림을 자신의 몫으로 삼았으며, 그 앞에서 언어로 체감하는 시의 세상은 읽는 자의 몫이 되었다.

3
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시의 문제가 아니라 시인의 문제이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단 하나의 정리된 답이란 있을 수 없고 시인들이 모두 각자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인이 찾은 답이 시인의 시 세계가 된다. 오규원도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그만의 답을 내놓고 있다.

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환상밖에는.
—「용산에서」 부분

나는 이를 조금도 근사하지 않지만 시는 우리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었다. 시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입장은 다음과 같이 확장된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버스 정거장에서」 부분

오규원은 “배반을 모르는 시가/있다면 말해보라”고 말한다. 그 얘기는 그의 입장에선 시가 배반을 모르면 시가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그렇다면 배반이란 무엇일까. 배반이란 가지 않은 길을 간 언어가 아닐까. 주민등록증 번호가 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보다 정확히는 아직 시가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의 길로 가지 않은 것뿐이다. 세상의 그 무엇도 시가 가는 길일 수 있다. 실제로 오규원의 시에선 많은 경우 도무지 시가 갈 수 없을 듯 보이는 것들이 무수히 시의 길이 되었다. 우리는 그 길에 들어서면 잠시 그의 언어로 체험하는 시의 세상을 살 수 있었다.
마지막 시집 『두두』에서 오규원은 시인의 말에 이렇게 새겨놓았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시인의 말」 전문

그는 이승의 삶을 마무리하고 난 뒤 전등사가 자리한 강화의 한 숲속에 묻혀 나무가 되었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라고 했지만 그때 우리는 오규원을 송두리째 잃었다. 그때 이후로 마음은 종종 그의 나무를 찾아가 근처를 어정거린다. 곧 먹고 사는 일에 바쁜 몸을 꼬드겨 시간을 내야겠다. 그리고 몸의 손을 끌고 오규원 나무를 찾아가 봐야겠다. 가선 그가 누리고 있는 나무 속의 곤한 잠을 흔들어 방해해 볼 것이다.
(『모멘트』, 2018년 하반기호, 평론)

대상 시집

오규원, 『오규원 시 전집 1』, 문학과지성사, 2002
오규원, 『오규원 시 전집 2』, 문학과지성사, 2002
오규원 시집, 『두두』, 문학과지성사, 2008

『모멘트』 2018년 하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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