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여는 또 다른 우리의 세상 —윤병무 시집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윤병무 시집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윤병무 시집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1
과학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일상에 대해 관점의 전환을 요구할 때가 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예를 구해 보자면 우리의 눈앞에선 분명 해가 뜨고 있는데 과학은 지구가 돌고 있는 것이며 하루에 한바퀴씩 자전을 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우리의 일상적 관점에서 보자면 지구는 한 자리에 멈추어 있고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하루에 한바퀴씩 부지런히 돌고 있다. 하지만 과학은 태양을 한자리에 주저앉히고 지구를 자전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바퀴씩 돌리는 전혀 다른 관점에 선다. 더 나아가 과학은 지구의 움직임이 이중, 삼중의 움직임이라고 말한다. 하루에 한 바퀴씩 스스로 도는데 더하여 태양의 둘레를 일년에 한 바퀴씩 도는 공전의 움직임을 갖고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은하계를 돌고 있는 태양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과학의 관점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 관점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음을 알고 있다.
과학의 관점을 수용한다고 하여 그 관점의 세상이 우리에게 체감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떠오를 뿐이다. 하지만 눈부신 과학의 발전 덕택에 때로 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몸에 직접 체감될 때도 있다. 1968년의 아폴로 8호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달의 주위를 돌았던 아폴로 8호는 달의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지구의 사진을 찍어 돌아왔다. 지구의 우리가 항상 보아온 것은 해돋이(sunrise)였지만 당시의 우주선에 탑승했던 비행사들은 인류 최초로 지구돋이(earthrise)를 체험할 수 있었다.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 지구를 달의 궤도에서 체감한 순간이었다. 당시 지구가 떠오르는 사진을 찍어 돌아온 우주 비행사 빌 앤더스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달에 갔지만 우리가 실제로 발견한 것은 지구였다.” 우리가 한번도 체감하지 못한 관점의 지구를 처음 본 감격이 그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과학이 열어준 새로운 세상이었다.
새로운 관점으로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측면에서 보면 시 또한 비슷한 측면이 있다. 다만 과학과 달리 시는 시인마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그만의 세상을 연다. 때문에 시인의 수만큼 세상이 새롭게 열릴 수 있으며, 윤병무의 경우에도 그 점은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그의 새 시집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는 그가 자신만의 관점으로 열어놓은 새로운 세상일 수 있다. 독특하게도 그가 연 시의 세상은 과학의 관점마저 수용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주의 은하, 은하의 태양계, 태양계의 지구
지구의 한반도, 한반도의 신도시
동산을 눈 붉은 신발 한 짝이 공전해요
—「기쁜-슬픈 이야기」 부분

아마도 과학이 마련해준 우주의 지형도를 참고하지 않았다면 그의 걸음은 동네의 작은 산을 한 바퀴 돌아본 가벼운 산책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의 세계관을 빌려오면 충혈된 눈으로 한바퀴 돌아본 동산의 산책이 지구 속의 또다른 공전이 된다. 세계가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세상이 바뀐다고 무엇이 달라지긴 하는 것일까. 시인은 “동산 한 바퀴가 태양 한 바퀴면 좋겠”다고 말한다.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일년이기 때문에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 보면 동산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시인만의 일년을 살 수 있다. 시인은 눈이 충혈되어 있었으며 그것으로 보면 무엇인가 안 좋은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걷는 동안 “오른 신은 괜찮다 하고/왼 신은 절망”했다고 말한다. 이는 시인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는 짐작을 더욱 강화해준다. 시간 이외에는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것은 하나도 없다. “서른세 바퀴”를 돌면 삼십삼년의 세월을 밀고 갈 수 있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어떤 절망도 무마가 될 것이며, 시인이 동산을 도는 행성이 되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삶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아주 흔한 우리의 일상을 바라볼 때도 엿볼 수 있다. 가령 그에게 퇴근하는 직장인들은 “내행성 행인”이 된다.

내행성 행인들​이
아침이면 떠날 곳으로 바삐 돌아간다
—「집으로 집으로」 부분

말은 때로 단순한 표현의 차이 이상이 된다. 직장인이라고 하면 이동의 궤도가 집과 직장으로 묶이지만 “내행성 행인”이 되면 “아침이면 떠날 곳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이 느낌을 달리한다. 퇴근길의 걸음에서 행성의 움직임이 동시에 만져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 이 구절의 관점은 달의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행성으로서의 지구를 보았을 때와 동일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과학은 아니어서 결국 시가 돌아보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윤병무도 그렇다. 하지만 때로 시는 과학의 관점까지 시의 이름 아래 녹여내 새로운 세상을 열곤 하며, 그때면 우리의 삶도 다른 세상을 살 수 있다. 윤병무의 이번 새시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이다. 나는 그 점에 주목하며 그의 시집을 살펴보려 한다.

2
윤병무의 시집을 둘러보는 여정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삶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시인이 어떻게 삶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첫순서가 되어야할 것이다. 삶을 기쁨과 슬픔의 두 갈래로 갈라 이해를 한다면 윤병무에게 삶은 슬픔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물론 그의 삶에서 기쁜 일이 왜 없었겠는가. 그는 처음에는 우리에게 “슬픈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기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곧바로 “기쁜 이야기라면, 힘들”다고 말한다. 기쁜 일이 있었으나 ‘화석’이 되었을 정도로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화석이 되면 뼈의 골격만 남는다. 그런 연유로 시인에게 “모처럼 웃었는데 파묻”혀 화석이 된 “기쁜 이야기는 살 한 점 털 한 올”이 없다. “골자만으로 기쁠 수 있으면 기쁘겠”지만 화석이 된 기쁨은 오래전의 일이라는 아득한 거리감만 가져다주기 쉽다. 기쁜 일이 대개 순간으로 우리를 스쳐간다는 얘기도 된다.
“기쁜 이야기”를 말할 때와 달리 “​슬픈 이야기는 어떠세요?”를 물을 때의 시인은 곧바로 “너무 익숙해 싫으세요?”라는 반문을 잇고 있다. 시인의 반문 속에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삶에서 슬픔이 도저할 것이라는 시인의 인식이 엿보인다. 그렇다고 그 슬픔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슬픔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슬픈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콩팥이 걸러낸
눈물보다 깨끗한 액체예요
—「기쁜-슬픈 이야기」 부분

그렇다면 슬플 때마다 우리의 몸이 “눈물보다 깨끗한 액체”로 정화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슬픔을 감내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삶이 지나치게 슬픔으로 가득차면 힘들 수밖에 없다.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큰 문제이다. 윤병무는 생각의 차이로 빚어지는 갈등 앞에서 “생각을 생각하지 않아 괴로운 당신/생각을 생각하며 저는 아픕니다”라고 말한다. “생각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했으니 생각은 있으나 그 생각을 돌아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개 그러한 경우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가 생겨도 바꾸질 못한다. 생각이 습관이나 고집이 되는 경우이다. 그렇게 되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 때문에 괴로워질 수 있다. 시인은 그 생각을 들여다보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생각은 바꿀 수는 없다. 보통은 이런 경우 분노를 불러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가까운 사람이면 분노가 아픔으로 바뀔 수 있다. 그리하여 생각의 차이는 괴로움과 아픔이 된다.

괴로움과 아픔은 둘 다 고통이어도
통각점은 멀거나 가깝습니다
—「생각을 생각하며」 부분

통각점이 멀거나 가깝다는 것은 생각의 차이로 보면 둘이 멀지만 관계로 보면 가까운 사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생각의 차이가 있더라도 관계마저 멀면 안보면 그만일 것이나 가까운 사이라면 안볼 수도 없다. 그러면 “당신의 괴로움은 바깥에 있고/저의 아픔은 안쪽에 있”어 번번히 빗나갈 수밖에 없는 둘인데도 함께 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난감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에는 그런 난감한 상황이 닥칠 때가 있다.
사람들은 살면서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삶이 힘든 것이냐고 말할 때가 있다. 윤병무에게 있어서도 삶은 때로 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벌은 죄를 모르고 받는 벌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모릅니다
그게 네 죄다

그리하여 벌 받았다
징벌이 기니 이승도 길다
—「죄와 벌」 부분

시인은 “죄 없이도 벌은 받는다”고 했으며, “설명할 길 없어 원죄라 했다”고 이해를 한다. 비록 삶을 벌로 이해는 했지만 그는 벌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저 벌 받으려고” “내친김에 신발 끈을 조”이고 있다.
우리가 슬픔을 감내할 수 있다고 해도 삶의 축이 슬픔으로 기울어있고, 또 풀 수 없는 갈등의 관계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 삶이기에 그것이 형벌처럼 느껴진다면 살아가는 일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윤병무는 삶의 힘겨움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삶의 힘겨움을 덜어내주는 또다른 순간들을 바로 삶 자체에서 발굴해낸다. 힘겨워하면서도 삶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그 방법 중 하나는 비교적 간단하다. 바로 햇볕 좋은 날, 물결이 잔잔하게 일고 있는 물가로 가 앉는 것이다. 그러면 햇볕이 물결과 어울려 반짝거린다. 윤병무는 그때의 물결을 일러 「물비늘」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물결은 그 순간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찬란하게 헤엄치고 있는 비늘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반짝거리는 물비늘에서 우리의 삶이 보인다는 것이다.

말을 꺼내고 디딜 곳이 없을 때

명운을 태운 편주의 향방이 아득할 때

낯 비춘 물 근육이 꿈틀거릴 때

낙양을 엎지르고 만취할 때

물비늘은 갈쌍갈쌍 빛살을 삼키네
—「물비늘」 전문

가장 확연하게 피부에 와닿는 구절은 “낙양을 엎지르고 만취할 때”이다. 어느 날 시인이 많이 취한 순간이다. 좋은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안좋은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명운을 태운 편주의 향방이 아득할 때”라는 구절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면 안좋은 일일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그 순간이 사실은 빛나는 순간일 수도 있다. ‘갈쌍갈쌍’은 눈에 눈물이 넘칠 듯이 자꾸 가득하게 고이는 모양을 일컫는다. 일상적으로 보면 삶은 비틀거리고 있지만 사실 그 비틀거리는 삶은 빛을 삼키듯 슬픔을 삼킨 반짝이는 물비늘같은 순간일 수 있다. 물결 없이 조용히 잠자는 수면은 평화롭기는 하겠지만 그런 빛나는 순간은 없다. 때로 풍파처럼 닥치는 삶이 빛나는 순간을 만들 수 있다. 시인은 강가에 앉아 반짝거리는 물비늘에 삶을 비춰본다.
시인이 힘들 때 기대는 존재로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때문에 시인이 기대는 아버지는 기억 속의 존재이다. “술 생각이 간절한” ‘봄밤’이면 더욱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때면 시인은 혼자 술을 기울이고, 혼자 마시는 술이 과해질 때가 있다. 아버지는 술이 과해지려고 하면 “그만—, 하고 말”(「그만—,」)해줄 수 있는 분이다.
시인에게 아버지는 또 흔들림을 회초리로 잡아주시던 분이다. 살다보면 흔들릴 때가 있고, 그러면 그 순간 시인에겐 아버지가 떠오른다. 시인은 “아버지 다시 한 번 종아리 걷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없다. 없는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꽃 피고 지고 열매마저 떨어져야
가지는 쉬이 꺾인단다
쉬이 부러지지 않으면 회초리가 아니란다
—「아버지의 베개」 부분

아버지의 회초리는 아들의 종아리를 때리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때문에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 회초리가 아니다. 그러면 자식의 흔들림을 막기 위한 최소의 폭력이기 보다 그냥 폭력 자체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회초리를 통해 회초리는 때리는 것이 아니라 쉽게 부러지는 것이라고 가르쳐준 분이다. 흔들릴 때마다 더더욱 아버지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생각만으로 시인의 삶을 붙들어준다.
시인에게는 뒷모습을 남겨놓고 떠난 사람이 있다. 당연히 힘들 때 생각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은 넓은 것 같아도 한 사람 이외에는 자리를 허용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누군가를 생각할 때는 균형이 필요하다. 시인의 균형은 섬세하게 이루어진다.

당신이 그리워할 때마다
내 마음은 닳아요
—「뒷모습」 부분

시인은 그리움을 자신의 몫으로 삼지 않고 떠난 사람의 몫으로 쥐어주고 있다. 때문에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리워”한다. 당신을 그리워했다면 그리움마저 시인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움이 시인의 몫이 되면 떠난 사람이 시인의 마음을 점거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워”하면 그리움은 떠난 사람의 몫이 되고, 그 그리움의 마음을 걱정하는 안타까움만이 시인의 몫이 된다. 때로 우리에겐 그런 균형이 필요하다.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을 모두 내주면 안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이 힘겨울 때 가장 큰 위안이 되는 것은 함께 사는 사람이다. 문제는 오래도록 함께 살면 가까이 곁에 있을 때는 오히려 존재가 지워지기 쉽다는 점이다. 서로에게 서로가 숨쉬는 대기처럼 변하고 만다. 항상 숨을 쉬고 살지만 대기를 의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이 되면 오히려 부재가 존재를 일깨운다. 없을 때 그 빈자리를 통하여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윤병무에게선 그 부재의 존재를 깨닫는 방식이 아주 독특하게 이루어진다. 아마도 시인은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나 보다. 샤워를 하러 들어갈 때 같이 사는 사람은 집안에 없었다. 집은 텅빈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 느낌과 함께 시인은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샤워를 하면서 “머리를 헹구는데/수압이 낮아졌다.” 시인은 수압이 낮아지자 그것으로 같이 사는 사람이 돌아온 것을 알아차린다.

당신이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당신이 손을 씻는 것이다
—「수압」 부분

짐작해 보자면 집안에 화장실이 둘이며, 한쪽의 수도를 먼저 틀었을 때 다른 쪽 화장실의 수도를 틀면 먼저 튼 수도의 수압이 떨어지는 증상을 보인다. 생활을 통해 알게 된 집안의 수도 사정이다. 때문에 수압이 갑자기 떨어지면 누군가가 다른 화장실에서 수도를 틀었다는 뜻이 된다. 같은 집안에서 사는 사람들만 알 수가 있는 일이며, 보지 않고도 수압의 변화를 통해 다른 화장실이나 부엌에서 손을 씻고 있는 당신이라 불리는 사람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도록 함께 살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는 “기쁜 상상은 그만두자/당장 눈이 매우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말에선 잠깐의 부재를 통해 자리를 비웠으나 그 자리를 다시 채워준 같이 사는 존재의 충만이 그에게는 기쁨이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런데 왜 시인은 그 기쁨을 상상이라고 했을까. 씻다 말고 나가서 자신의 기쁨을 고백하는 스스로를 상상한 것은 아닐까. 안타깝게도 상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존재를 옆에 두고 있다는 것은 기쁨임에 분명하다. 잠시 외출을 했다 돌아오면, 수압으로도 감지할 수 있는 존재는, 그 존재가 집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위안이 된다. 존재의 부재가 다시 채워지는 순간을 수압으로 확인하며 충만함을 느낄 때, 그런 존재를 옆에 두고 있다는 것은 삶에 큰 위안이 된다.
윤병무가 힘들 때 가장 빈번하게 기대는 자연으로는 달이 있다. 달은 하늘에 떠 있지만 그가 올려다 보면 하늘에서 내려와 달빛을 이불로 내주고 시인과 함께 잠을 자준다.

오늘도 달빛 덮고 잠들어요

오늘은 반달이에요

달도 반은 자야 하니까요

저도 반만 잘게요
—「달 이불」 전문

반달은 반만 밝은 달이 아니라 반반씩 나누어 함께 잠을 자주는 달이다. 힘들면 고립되기 쉽다. 고립감은 잠도 나누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함께 잠을 자도 따로 잠을 자는 느낌이 든다. 반달은 그러한 잠의 고립감을 해소해 준다. 잠을 반반 나누어 함께 자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수 있다.
반달은 또 어느 날 밤, 말을 다하지 못해 시인이 앓아야 했던 목메던 심정이 되기도 한다. 시인은 그날 밤을 일러 “마저 말하려는데”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없었으며, 목이 메면서 “말은 역류”했다고 전한다. 때문에 그날 밤 시인은 “말을 물고/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밤”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날 밤의 하늘에서 “구름이 반달을 뱉”았다. 그 반달을 가리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반달이 절반만 말한다
해에게 빌린 말
—「말의 뒤편」 부분

달빛이 달의 말이라면 사실 그 달빛은 달 스스로 내는 빛이 아니라 햇빛이 반사된 것이다. 달은 말을 하려면 때문에 해에게서 말을 빌려와야 한다. 때문에 반달은 그 말도 절반밖에 할 수가 없다. 달에 관한 또다른 사실이 하나 있다. 공전과 자전 주기가 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달은 한 번 공전할 때 한 번 자전한다. 이를 가리켜 동주기 자전이라 부른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달의 뒷면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언제나 달의 한쪽면만 마주하게 된다. 달이 태양빛을 빌려 말을 한다면 빚지지 않은 말은 달의 뒤편에만 있다. 말에도 뒤편이 있을 수 있다. 시인은 그날 밤 말을 했으나 말의 뒤편을 전하질 못했다. 반달은 반만 말을 하며 말을 거두어야 했던 그날 밤의 시인이 앓았던 목메던 심정을 함께 앓아준다.
때로 봄이 오고 꽃이 핀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들은 풀리지 않던 문제도 때가 되면 풀릴 것이라는 희망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병무에게선 달이 그 위로의 자리에 선다.

올봄에도

​돌고 돌아
꽃보다 먼저 달이 만개했다
—「불기 2563년 춘분」 부분

불기 2563년은 2019년이다. 2019년의 춘분은 3월 21일이었다. 그날은 보름이기도 했다. 매화나 산수유 같이 이른 봄꽃들이 피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지막 추위가” 와 꽃들이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때 달은 보름을 맞아 가득찼다. 시인에겐 달이 만개한 꽃이었다.
그러나 윤병무가 편재한 시의 세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마치 과학의 관점처럼 우리의 일상적 관점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있을 때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사라진 태양계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ㄴ지 모르겠어」 부분

시인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아득한 별이 수명을 다하기 일만 년 전/이만 광년을 내달려와 우리에게 별빛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배경은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행성 지구에서 현재를 살고 있지만 우리가 올려다보는 별들은 모두 과거이다. 가령 별이 지구로부터 이만 광년 떨어진 거리에 있다면 별빛으로 마주하고 있는 그 별의 오늘이 사실은 이만년전의 과거이다. 만약에 그 별이 오늘 사라졌다고 해도 우리는 그 별을 앞으로 이만년 동안 계속 보게 되며, 그 별이 일만년 전에 사라졌다고 해도 우리는 앞으로 일만년 동안은 그 별을 계속 보게 된다. 별이 사라졌다고 해도 마지막 빛이 우리의 지구에 도착하는데는 이만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가 올려다보는 별이 사실은 이미 사라진 별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은 별을 가리켜 밤하늘의 유령이라고 했다.
위치를 바꾸어 멀리 우주에서 우리 지구가 행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태양의 빛을 보고 있다면 이제 그 별의 행성에선 우리 지구의 시간이 아득한 과거가 된다. 만약 이만 광년 떨어진 별의 행성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면 오늘 태양과 우리의 지구가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이만년 동안은 계속 우리를 보게 된다. 이미 사라진 우리가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한때 지구라는 행성에서 밤하늘을
노래할 줄 알았던 직립보행 생물이었는지 모르겠어
공간이 시간을 떠날 수 없듯
시간이 공간을 지울 수 없어서 우리는
당시 생생했던 날들을 재생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때 그곳에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바다가 있었고
그럴 거면 아예 끝장내라고 목 놓다가
이젠 운명을 치워달라며 무릎 꿇었다가
모래톱에 쓴 이름 삼킨 파도를 응망하다가
혼잣말 발자국만 남기고 떠났던 겨울바다
길고 혹독한 빙결만 차곡차곡 쌓여
끝내 세상이 얼어붙었던 대사건이 있기 전의 현장을
우리는 당장인 줄 알고 살아내는지 모르겠어
—「—ㄴ지 모르겠어」 부분

우리가 힘겨워했으나 오래 전에 사라진 과거 어느 순간의 삶이 어느 별의 행성에선 빛으로 반짝일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우리들에게 가장 힘겨운 오늘을 지우고 ‘옛날’과 ‘훗날’만을 남긴다.

당신과 나의 시간이 엇갈려 지나가도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ㄴ지 모르겠어」 부분

오늘을 지우고 옛날과 훗날만을 남기면 옛날은 사라져도 오랫동안 빛으로 반짝이게 되며, 훗날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시간이니 내가 살아가면서 채우면 된다. 우리의 삶 자체가 빛나고 또 채울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그는 「기쁜-슬픈 이야기」에서 동네의 작은 동산을 “서른세 바퀴” 도는 것으로 서른세 해의 시간을 보낸 뒤에 “오래전 사라진 별의 빛을 보여드리겠어요”라고 말했었다. 왜 하필 서른세 번인지는 나도 모른다. 물론 그의 나이 서른세 살 때 어떤 큰 변화가 있었는가 보다는 짐작은 가능하다. 어쨌거나 이제는 그가 말한 “오래전 사라진 별의 빛”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기쁨을 향해 슬픔을” 걷고 “기쁨을 지나 슬픔을 맴돌”던 그 시간의 우리 삶이었다. 그때쯤 우리들 살아낸 모든 삶이었다. 시인의 세상에선 심지어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3
삶은 고단할 때가 많다. 고단한 삶은 힘겹다. 일상적 관점에서 그 고단한 삶을 뒤집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 평생 고단을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윤병무는 고단한 삶을 감내하는 한편으로 묻는다. 우리의 삶이 정말 고단한 것일까. 혹시 지상에 고착된 우리의 시선이 우리를 속이듯이, 우리의 삶이 고단한 것도 일상에 고착된 우리의 시선 때문이 아닐까. 달에서 바라본 푸른 행성 지구처럼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고단한 삶도 푸르게 빛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구의 오늘을 현재로 살아가는 우리는 가끔 불면의 밤을 앓는다. 잠이 오지 않아 이불 밖으로 손을 내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시간을 보내며 그럴 때면 우리의 머리 속에서 온갖 생각이 들끊는다. 하지만 시인의 세상에선 그 불면의 우리가 “침구 밖으로 손을 놓”고 있으며 “생각이 손의 가락을” 타고 있다. 그러다 결국 우리는 불면을 이기지 못해 불을 켜고 만다. 여전히 바깥은 밤이다. ‘아직도 한밤이네’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다시 불을 끈다. 그러나 시인의 세상에선 그 불면의 우리가 다음과 같이 바뀐다.

생각의 손이 전등을 켰다
밖에서 어둠이 지켜보았다
말이 소등했다, 아직 한밤이야
생각은 틀렸고 말은 맞았다
—「불면」 부분

우리의 현실에선 잠이 오지 않는 밤이지만 시인의 세상에선 불면이 별처럼 반짝인다. 윤병무가 연 또 다른 우리의 세상이다.
(윤병무 시집,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문학과지성사, 2019)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