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우의 시집 『내가 정말이라면』에서 시 한 편을 골라 읽어보기로 한다. 「비행」이란 시이다. 몇 번을 읽어도 잘 읽히질 않는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는 얘기다. 내가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다음 구절 정도였다.
나무가 비키지 않으면 세상이 나무를 돌아 간다
—「비행」 부분
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를 생각했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나무를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나무가 어떻게 비킬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무가 길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나무를 비켜서 돌아간다는 일반적 표현이 어떻게 하여 시인이 우리에게 내민 구절로 탄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상이 어떻게 새롭게 열렸는가 하는 점이다. 시는 내게 언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여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시의 구절이 열어주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또 하나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이 시의 최초 제목이었다. 이 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제목은 「청춘」이었다. 시인이 제목을 바꾼 것을 보면 청춘과 비행이란 제목이 이 시를 공유할만큼 가까웠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내게 그 두 단어는 접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보였다. 다른 시들을 읽을 때도 유이우의 시를 일목 요연하게 읽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가 지금까지 시라는 이름 아래 읽어왔던 시와 유형이 크게 다르다는 뜻도 된다.
도대체 유이우의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내가 그 답의 실마리로 삼은 것은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었다. 유이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가 시에게 가도록 사람이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인의 말」 부분
그의 말은 시가 시에게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언듯 들으면 시가 또다른 완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뜻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시인이 미완의 작품을 우리에게 내놓고 있다는 소리로 들리진 않는다. 그렇다면 시가 시에게로 간다는 것을 무슨 뜻일까? 나는 이를 시인의 시와 독자의 시로 나누어 이해했다. 시가 또다른 시로 나뉘어져 움직이는 과정은 그 둘밖에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보면 시는 일단 시인의 시로 완성되지만 독자가 시를 읽는 과정에서 또다른 완성을 향해 움직인다. 시인이 관여할 수 없는 과정이다.
내 짐작이 맞다면 유이우는 시가 시인의 시에서 독자의 시가 되는 과정, 즉 독자들이 시를 읽는 과정에서 시가 시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시인이 관여할 수 없는 과정이므로 이때의 방해자는 독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를 읽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독자의 방해란 무엇일까. 혹시 오독을 말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시를 읽을 때 정답이 있을 수 없고, 오독마저도 독자의 권리로 수긍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독자의 권리를 모를 리 없으니 방해를 그런 뜻으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유이우는 비유를 통해 그 방해의 양상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비유 속에서 그 방해는 시인이 좋아한다고 고백한 버드나무의 흔들림을 만져보기 위해 나무에게 손을 뻗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시인의 걱정은 “손이 닿으면 나무는 멈추게 된다” 점이다. 나는 손을 뻗는 행위를 시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내려는 행위로 보았다. 말하자면 해석하는 행위이다. 대체로 우리에게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행위가 아니겠는가. 그런 행위를 방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시를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음악을 들을 때 음악을 해석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대개 흘러나오는 대로 노랫말을 즐기거나 리듬감에 몸을 맡기곤 한다. 시도 그런 식으로 즐길 수는 없을까. 아니, 세상에 해석을 거부하고 시와 노는 것만 허용하는 시가 혹시 있지는 않을까.
다시 처음에 읽었던 시로 돌아가본다. 나는 시를 읽었고 맥락이 잡히지 않자 비교적 용이해 보이는 구절 하나를 골라 해석하려 들었다. 나는 이제 그러한 태도를 버리기로 한다. 그리고 그 구절과 놀아보기로 한다. 그것은 시의 한 구절을 살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을 위해 내게 필요한 일은 내가 사는 아파트의 마당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마당은 곧 통행로이기도 하다. 통행로를 가운데 두고 옆으로 화단과 벽이 있으며 화단에는 나무가 몇 그루 있다. 아울러 벽을 따라 또 몇 그루의 나무가 늘어서 있다. 어느 나무도 내 통행로를 비키지 않은 채 나를 가로막고 서 있지 않았다. 나무들은 모두가 내 통행로의 옆으로 비켜서서 나의 걸음을 방해하지 않는다. 나는 잠시 좌우로 나무가 있는 통행로를 걷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모두 비켜주기 때문에 돌아갈 필요가 없는 세상을 걷는다. 시인이 말한 세상과는 정반대의 변형판이다. 그것이 내게는 잠시 시의 구절을 사는 순간이었다. 정반대로 변형된 시의 세상이 아니라 시의 구절 그대로를 살려면 가까운 산을 찾으면 될 것이다. 등산로에선 나무들이 길을 비키지 않아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두 편의 시를 같은 방식으로 읽어 보았다. 먼저 그 중의 한 편이다.
고양이를 날아보았다
오솔길이 큰길로 달려나간다
셔츠를 알리는 바람
—「옥상 빨래」 부분
유이우의 시에선 시의 제목이 큰 의미를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는 「옥상 빨래」라는 제목의 시라면 누구나 옥상에서 날리는 빨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시를 예상하게 된다. “셔츠를 알리는 바람”이란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 예상은 배반당한다. 시에서 그런 배반은 당혹감을 불러온다. 시의 내용이 연관없는 구절의 나열로 보이면 당혹감은 더 커진다. 도대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혹시 옥상의 빨래처럼 생각나는 구절을 널어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실감나는 느낌을 위하여 시집을 슬쩍 옆으로 돌려 시의 구절들을 가로로 바라보았다. 빨래처럼 널려 있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다른 한 편의 시도 같은 방법으로 읽었다.
구름이 내 위로 걸었다
나는 잠깐 멈추면 되었다
기어코 빗방울이 내 발치로 굴러내렸다
나를 대신하여 잘했다
—「우기」 부분
우기는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를 가리킨다. 시에 구름과 빗방울 얘기가 나오지만 그렇다고 확연한 우기의 풍경을 담고 있지는 않다. 나는 시인이 비가 내리는 시기에 시를 썼을 것이며 시의 구절들을 빗줄기로 삼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구절을 옥상의 빨래처럼 걸어놓았다고 생각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시를 읽고 나선 시집을 옆으로 돌려서 시의 구절들을 빗줄기처럼 세로로 걸어 보았다. 우기란 시인에게는 비가 오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머릿 속에 떠오른 구절들이 빗줄기처럼 시 속에 내걸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를 읽자 재미나기는 했으나 한편으로 독해되지 않는 시를 받아들이기 위해 내가 별짓을 다한다는 회의가 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겐 내 행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근거가 필요했다. 도움이 된 것은 시인이 시들 사이에 끼워넣은 산문들이었다. 모두 「오래전의 기린」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으며 번호가 붙어 있었다. 두 번째 산문이 도움이 되었다.
기린이 지금보다 어린아이였을 때, 기린은 태양 속에 발을 넣어본 적이 있었다. 다리를 들어 발바닥으로 해를 가려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기린에게 전설에 대한 홀림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닌, 그저 공을 차는 듯한 놀이였다. 발바닥으로 해를 가려 해가 없어졌을 때에는 해를 뻥 찬 것 같았고, 다리를 다시 들판에 내려놓아 해가 나타나면, 멀리서 공이 날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오지 않을 공. 더 가까이 오지 않을 공이지만, 기린은 그 기다림을 즐거워했다.
—「오래전의 기린 2」 부분
“태양 속에 발을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표현은 알고 보면 “다리를 들어 발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행위를 가리키며 그것은 “그저 공을 차는 듯한 놀이였다.” 놀이가 “태양 속에 발을 넣”는다는 표현이 되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즉 “태양 속에 발을 넣”는다는 표현을 해석하지 않고 발을 들어 태양을 가리는 놀이를 하며 그 구절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그의 시로 돌아온다. 비교적 그 의미에 쉽게 닿을 수 있는 구절이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스토브가 켜졌다
8월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거실 깨닫기」 부분
집안에선 계절을 깨닫기가 어렵다. 시인은 거실 깨닫기라고 했지만 내게는 그것이 거실의 계절 깨닫기로 보완되었다. 자연은 거실과 달리 계절이 확연하게 확인이 된다. 잎이 나고 초록이 짙어지며 단풍이 들었다가 잎을 털어내는 나무의 변화 덕택이다. 우리의 집안에는 그렇게 확연하게 계절을 알려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주의깊게 관찰하면 그렇지도 않다. 알고 보면 우리는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선풍기를 꺼내고 스토브를 꺼낸다. 말하자면 거실의 계절은 특정 계절에만 사용하는 가전기구로 확인이 된다. 스토브를 꺼냈다는 것을 여름이 다가고 겨울이 다가왔다는 뜻이 된다. 나도 선풍기를 꺼내며 여름을 맞곤 한다. 스토브는 내게선 매년 날씨가 더워질 때쯤 꺼냈던 선풍기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그때면 겨울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잊게 된다. 아마도 이제 여름에 선풍기를 꺼낼 때는 나도 거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파트의 문만 열고 나가면 간단하게 시를 살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발자국을 숨 쉬는
계단이다
—「층계참」 부분
발자국이 계단의 숨이라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내가 계단을 걷는 것만으로 계단은 숨을 쉴 수 있다. 나는 아파트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잠시 계단의 숨이 된다. 조금 빠르게 오르내리자 가쁜 호흡이 되었고, 다시 천천히 걷자 계단의 숨결이 여유를 되찾았다. 계단의 호흡이 내 호흡과 비슷했다.
나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 내가 유이우의 시를 읽었던, 아니 그의 시와 놀았던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의 시와 노는 방법은 시에 따라 다양하게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리듬 위에 올라탄 인디언처럼
흔들어보았던 세계를
스스로 안아주면서
몹시
날아다녔다
—「전해지지 않는/전할 수 없는 말」 부분
유이우는 세계를 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흔들었다. 나는 그가 흔드는 세계를 멈춰세우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시가 시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흔든 세계가 정확히 어떤 세계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안아주면서/몹시/날아다녔다”는 그 세계가 지금까지 우리가 시의 이름으로 경험했던 세계와는 다른, 그래서 당혹스러우면서도, 몹시 재미난 세상이긴 했다.
(『포지션』, 2019년 겨울호, 시집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