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뒤를 보라 한다 —박세미의 시 「뒤로 걷는 사람」

『모든시』 2020년 봄호, 한 편의 시 한 줌의 시론

우리는 대개 앞으로 걷는다. 그런데 여기 「뒤로 걷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박세미의 시 속에서 그를 만나게 된다.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는 왜 뒤로 걷는 것일까. 뒤로 걸으면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시가 답할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한 발자국씩 넓어지는 것이었다
한 발자국씩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가 걸을 때
옆에서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한 발자국, 사과나무는 불타며
두 발자국, 사과나무는 검게 식으며
세 발자국, 사과나무는 썩은 사과 한 알이 되며
네 발자국,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더러 썩은 사과 한 알이 눈에 맴돌 때면
눈을 감고 이리저리 굴려 녹여 없앴다
그는 최소화된 것들과의 이별에 익숙했다

눈이 오던 어느 날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점이 있었다
그가 한 발자국씩 뒤로 갈 때마다
점은 세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오며 커지더니 다리를 뻗고 손을 흔들며 마침내 웃어 보였다

달려오던 점은 그의 코 앞에서 최대화가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을 안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를 툭 치고는 그의 바로 옆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굽혔다
썩은 사과들이 눈밭에 우르르 쏟아졌다
—박세미, 「뒤로 걷는 사람」(『모든시』, 2019년 겨울호) 전문

시는 첫구절을 통해 뒤로 걸으면 세상을 보는 시각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가를 알려준다. 뒤로 걸으면 눈앞의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그 결과 세상이 “한 발자국씩 넓어지”게 된다. 세상을 폭넓게 볼 수 있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 얘기는 반대로 우리가 앞으로 걸을 때는 세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지만 대신 세상을 보는 시각의 폭이 좁아진다는 점을 시사한다.
시각의 폭이 확대된다고 하면 우리는 그때의 폭을 좌우로 생각하게 된다. 즉 넓게 본다는 것은 시각이 좌우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세미에게 있어 그 폭은 특이하게도 좌우가 아니라 앞뒤로 확대된다. 시인은 이를 ‘이를테면’이라는 가정의 부사를 내세운 뒤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예에 따르면 그가 뒤로 걸을 때 옆으로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 사과나무의 양상이 걸음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뒤로 옮길 때마다 크게 달라진다. 첫 발자국을 옮겼을 때는 불타는 사과나무가 보이고, 두 발자국에선 그 사과나무가 검게 식고 있으며, 세 발자국째에선 사과나무가 썩은 사과 한 알로 축소되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네 발자국째에선 이 놀라운 일이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놀라운 일인데도 그 놀라운 일이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를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뒷편에서 일어나는 일로 생각했다. 뒤로 걷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세상의 이면을 마주하는 일이다. 만약 뒤로 걷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면 어찌되었을까. 그냥 사과나무를 지나쳐 앞으로 갔을 것이며 사과나무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대개 그렇게 산다. 세상의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하나도 모른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나친 사과나무가 불타서 검게 변하고 썩은 사과가 달리고 있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채 산다. 아니 정확히는 알면서도 외면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이면을 보고 나면 그 이면의 세상은 사회적 실천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행동을 요구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은 쉽지가 않다. 행동하려면 우리의 삶을 걸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외면한다. 박세미는 그것을 세상의 이면에 눈을 감는 것으로 보고 있다. “더러 썩은 사과 한 알이 눈에 맴돌 때면/눈을 감고 이리저리 굴려 녹여 없앴다”는 구절이 바로 그때의 우리들 모습이다. 사과 한 알이 작은 것일 수 있다는 점도 우리가 세상의 이면을 외면할 수 있는 이유로 작동한다. 시인은 그런 것에 눈감는 것을 “최소화된 것들과의 이별”이라 칭한다. 우리들이 이렇듯 세상의 이면을 보고도 행동에 나서지 않을 때면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교묘한 논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뒤로 걸으면서 썩은 사과를 보았을 때도 대개는 그 썩은 사과를 사과나무 탓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썩은 사과는 우리들의 탓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사과나무의 썩은 사과는 정말 사과나무의 탓일까. 혹시 그것이 앞만 보고 뒤를 보지 않는 우리들 모두가 불러온 것은 아닐까. 박세미는 그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의문은 “눈이 오던 어느 날/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점”을 통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점으로 보였다는 사실은 그 의문이 처음에는 아주 작아서 우리들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혔다. 하필 그날은 눈이 오던 날이었다. 눈은 세상을 덮어버린다. 그러니 그날이 세상의 이면에서 마주한 사실들을 덮어버리고 외면하려 했던 마음이 컸던 날이었을 수 있다.
시인은 “그가 한 발자국씩 뒤로 갈 때마다/점은 세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오며 커지더니 다리를 뻗고 손을 흔들며 마침내 웃어 보였다”고 했다. 점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리가 있고 손이 있으며 그에게 웃음까지 보였으니 그 점은 사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아울러 그는 뒤로 걷고 있었지만 점인 줄 알았던 그는 앞으로 걷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를 향해 앞으로 걷고 있었으니 보행의 속도는 뒤로 걷는 그보다 더 빨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뒤로 걷는 걸음은 느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것이 그냥 일반적인 걸음걸이였을 수도 있다.
이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뒤로 걷는다는 것이 거꾸로 걷는다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던 사람이 앞으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뒤로 걷고 있는 그 또한 사실은 앞으로 걷던 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뒤로 걷는다는 것은 거꾸로 걷는 것이 아니라 뒤를 보며 걷는다는 것이다. 뒤로 걷고 있어도 그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 점은 그의 앞에 이르고 만다. 시인은 “그는 그것이 자신을 안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어깨를 툭 치고는 그의 바로 옆으로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즉 앞으로 마주한 점의 느낌은 그를 안아줄 것만 같았지만 점은 그 느낌을 배신한다.
시인은 뒤로 걷던 그가 “뒤를 돌아보는 대신/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굽혔다”고 말하고 있다. 뒤로 걷는 사람이 몸을 돌려 그를 지나쳐간 사람을 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앞의 방향이다. 대신 그는 뒤로 걷던 자신의 방향을 그대로 지킨다. 어떻게 되었을까. 점으로 시작하여 그에게 다가온 사람의 뒤가 보였을 것이다. 앞으로 걸어간 사람의 뒤에선 “썩은 사과들이 눈밭에 우르르 쏟아졌다”는 것이 시인의 전언이다. 말하자면 썩은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걸어간 사람이 남긴 것이었다. 앞만보고 달리며 사람을 안아주지 않고 그의 곁을 지나친 사람이 사과를 썩게 한 것이다.
박세미의 시 「뒤로 걷는 사람」은 비유를 통해 세상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보여준다. 처음에 시 속에서 썩은 사과는 사과나무의 탓이었다. 그러나 시는 이를 앞을 보며 걸어간 사람의 책임으로 뒤집는다. 이렇게 시각이 뒤집히고 나면 뒤로 걷는 사람 또한 걷는 방향이 앞으로 걸어간 사람과 같다는 측면에서 썩은 사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앞으로 걸어간 사람의 뒤는 사실은 우리 모두의 뒤이다.
비유가 시의 특징이긴 하지만 비유는 동시에 모호한 측면이 있다. 가령 썩은 사과는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연하질 않다. 시의 놀라운 점은 그 비유가 비유의 모호함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로 건너와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의 현실적 답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박세미의 시도 그런 경우의 좋은 예이다.
사실 내가 이 시를 읽으며 곧바로 떠올린 것은 박정희의 군부독재 시절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 시절은 세계가 기적이라 칭한 놀라운 경제 성장의 시기이다. 박정희는 그 성장을 이끈 영웅이다. 시는 그러한 인식이 앞만 보고 걸어간 사람들의 눈에나 그런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 시절의 이면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박정희 시대는 정권의 안위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처단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군사독재 시절에 불과하다. 뒤로 걷는 걸음은 그 시대의 인권 유린에 대해 눈뜨게 한다. 그 시대의 썩은 사과이다.
박정희 독재 정권의 인권유린을 말해주는 간첩 조작 사건의 하나로 인혁당 사건이 있다.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박정희 군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가 정권을 지키기 위해 고문을 통해 조작한 사건이다. 대법원에서 판결이 나고 18시간만에 8명을 사형에 처해 사법 살인이라 불리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애쓰다 결국 한국에서 추방되었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박정희 정권을 가리켜 악마의 정권이라 칭했다.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경제 성장이라는 박정희 시대의 선물은 악마의 선물이 된다. 경제 성장의 과실이 아무리 달콤하고 풍요롭다 해도 그것이 악마의 선물이라면 어느 누가 그에 선뜻 손을 내밀 수 있겠는가. 시는 박정희의 시대에 독재에 맞서 싸우지 못했다고 해도 최소한 경제 성장을 앞세워 박정희를 찬양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시대의 인권 유린은 박정희만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앞만 보고 달려간 우리들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이 시의 전언이다. 눈밭에 우르르 쏟아진 썩은 사과에 대한 외면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멀리 박정희 시대까지 거슬러 오를 필요도 없다. 아주 가까이서 이 시를 직접 살아보는 것도 가능하다.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 뒤로 걸어보는 것이다. 강남역 사거리로 가면 그러한 경험이 가능하다. 그곳엔 삼성전자가 있다. 앞으로 걷는 사람에게 삼성은 그들의 주장대로 세계 초일류 기업이다. 그러나 삼성으로부터 뒤로 걸어 강남역에 이르면 우리는 사거리의 한가운데 서 있는 철탑의 꼭대기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김용희이다. 삼성의 부당해고에 맞서 2019년 6월에 철탑에 올라 농성을 시작했다. 몸도 제대로 펼 수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2020년 1월이면 벌써 그의 농성이 8개월째에 이르게 된다. 그는 삼성에 노조를 설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어 삼성에서 쫓겨났다. 노조라는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노동탄압의 민낯이 삼성의 뒤편에 놓여있다. 세상의 뒤편을 마주했을 때 그 세상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겐 철탑에 올라 싸우는 혹독한 것일 수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작은 것으로도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 그 작은 것은 김용희의 복직을 외치며 이루어지는 그곳에서의 작은 집회에 참가하여 마음을 나누어주는 일이다.
시간을 맞춰 목요일날 명동을 찾으면 우리는 또한 시를 살 수 있다. 그곳엔 세종호텔이 있다. 겉으로 보면 우리가 그곳에서 마주하는 것은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곳에 자리한 고급 호텔이다. 그러나 목요일엔 그 앞에서 뒤로 걸음하면 해고 노동자들의 목요 집회를 만난다. 호텔측의 부당 전보에 항의하며 시작된 목요집회는 2012년에 시작되어 9년째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된다. 노동자들의 싸움은 힘겨운 것이지만 그것을 목도한 사람은 그보다 훨씬 쉽게 실천에 나설 수 있다. 바로 그 집회에 참가하여 노동자들의 숫자에 머릿수 하나를 보태는 것이 그것이다. 시는 우리가 단순히 시를 읽는데 그치지 않고 시를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시는 비유로 이루어져 있으나 비유에 머물지 않는다. 시는 우리의 현실, 그것도 아주 구체적 현실로 건너와선 우리에게 뒤를 보라 한다. 그것도 뒤로 걸어서 뒤를 보라한다. 단순히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는 앞이 뒤를 내보이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앞은 그만큼 교묘하게 뒤를 은폐하고 있다. 그 은폐된 뒤에 눈뜰 때 우리는 세상의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뒤로 걷는다는 것은 후퇴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전진이다. 그때의 우리는 천천히 걸어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시대에 우리가 책임을 지는 그 걸음에 더 이상의 썩은 사과는 없을 것이다.
(『모든시』, 2020년 봄호, 시평)

글이 실린 『모든시』 202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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