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시학 —열 편의 시를 통해 살펴본 인간의 감정과 그 양상

『경남문학』, 2020년 여름호

1
오규원은 그의 시속에서 “나는 한 女子(여자)를 사랑했네”라는 고백을 앞세운 뒤, 그 여자를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라 칭한다. 물푸레나무의 한 잎이란 얼마나 작고 미미한 것인가. 그러나 그의 눈에 그 한 잎에는 ‘맑음’과 ‘영혼,’ “순결과 자유”가 담겨 있었다. 때문에 한 여자를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은 여자라 칭했을 때 우리는 그가 한 여자에 대해 가진 사랑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 받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오규원은 동일한 시에서 사랑하는 그녀를 동시에 “病身(병신) 같은 女子”(오규원, 「한 잎의 女子」)라 칭한다. 병신이란 말은 사랑에 어울리기 보다 혐오의 언어가 될 위험이 크다. 하지만 그것은 우려에 불과하다. 시를 읽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병신이란 말이 갖고 있는 혐오의 위험에서 가볍게 비켜가며 사랑 앞에선 어떤 계산도 없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무모해지는 한 여자를 떠올리면서 시인이 그 말에 실어놓은 사랑의 감정을 간파해 낸다. 그리하여 그 말은 우리들이 사랑을 감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새로운 지평을 열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시의 놀라움이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데도 언어의 제약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연다.
나는 이제 인간의 감정과 관련하여 시가 보여주는 이러한 놀라움을 구체적인 시를 통하여 살펴볼 예정이다. 모두 열 편의 시를 골랐다. 대체로 근래에 나온 시집에 실린 작품들이다. 길을 떠나 보기로 한다.

2
살펴볼 첫 시는 김민정의 시이다. 시는 세상 떠난 한 시인에 대한 시인의 슬픔을 담고 있다. 세상 떠난 시인은 허수경이다. 시는 ““빽빽하고 촘촘했던 것들이 슬쩍 의뭉하고 슬픈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간 듯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네가 온통 그러하더라……””라는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인의 시집에 대해 죽은 시인이 생전에 남겨준 말이다.
회상은 죽은 시인의 부재를 알리면서 슬픔이 된다. 그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언니는 왜 내게 슬픔을 온몸으로 입어라 해서 이렇게 날 슬프게 할까……”라는 말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그 슬픔은 말하자면 온몸을 엄습하는 슬픔이다. 아울러 언니라는 말도 시인이 감내할 슬픔이 더욱 클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그 말은 두 사람의 남다른 친밀도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친밀도가 클수록 슬픔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슬픔이 크기 때문인지 회상은 자주 끊기고 끊긴 자리에는 ‘말줄임표’가 반복된다. 이런 연유로 시에선 말줄임표가 아주 빈번하다. 그 자리는 말이 없어진 자리이다. 그러나 시는 “점 점 점 여섯 개”의 그 자리가 말이 부재하는 자리가 아니라 말을 비워 죽은 시인을 채운 자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점 하나에 추억과 점 하나에 사랑과 점 하나에 쓸쓸함과 점 하나에 동경과 점 하나에 시와 점 하나에 언니, 언니 언니야……
—김민정, 「수경의 점 점 점 —곡두 22」 부분

이렇게 보면 때로 슬픔이란 죽은 자의 부재 때문에 오는 것이지만 그 슬픔으로 확인되는 부재를 다시 죽은 자로 채우는 일이기도 하다. 즉 슬픔은 빈자리를 확인하면서 그 자리를 다시 채우는 일이다. 물론 그 자리를 다시 채웠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시인이 “번져서는 더는 쓸 수가 없겠다 언니야…… 침침해서……”라고 말하며 시를 매듭짓고 있기 때문이다. 번지고 침침해진 것은 눈에 고인 눈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채워도 결국은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부재가 가져온 슬픔이란 감정이다.
김민정에게선 슬픔이 산 자의 몫이지만 백무산에게선 정반대이다. 슬픔은 죽은 자의 몫이 된다. 시인은 어느 날 “얼마 전 저녁을 함께 했던 사람”의 부고를 받는다. 시인은 전화기에서 “그가 보낸 보낸 메시지를 뒤져보”고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메시지를 받은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소리일 것이다. 메시지는 ““잘 가셨는지요.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죄송했어요.””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시인은 “떠난 사람이 나였다는 듯”한, 또 “그는 그곳에 있고 내가 멀리 가버렸다는 듯”한, “내 뒷모습에서 떠나는 자의 쓸쓸함을 읽었다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 느낌은 슬픔의 몫을 감당해야할 자를 산 자에서 죽은 자로 뒤집는다.

눈물은 죽은 자가 흘린다
죽은 자의 혼은 언제나 산 사람을 붙들고 운다
두고 가는 발걸음 떨어지지 않아
산사람이 가엾고 불쌍해서 펑펑 운다
죽은 자에게 애도를 받으러 가는 길이다
—백무산, 「잘 가셨는지요」 부분

“산사람이 가엾고 불쌍”한 것은 살아서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 때문이다. 어떤 삶의 무게는 죽은 자가 울어줄만큼 힘겹고 무겁다. 일용직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노동 약자의 삶이 그러할 것이다.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에 따라 때로 죽은 자가 슬픔의 감정을 감내하며 살아있는 우리들을 위로한다.
이원하의 시는 슬픔에 관한 또다른 파격을 보여준다. 나는 놀러가기 좋은 날이란 말은 많이 들어보았다. 그런데 시인은 “울기 좋은” 날을 말하고 있다.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이원하,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부분

우리는 슬플 때 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말하자면 시인은 울기 좋은 날 울어보자고 말한다.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는 날이라고 했으니 구름이 낀 흐린 날이다. 비가 올 것 같아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때이기도 하다. 사람이 없어야 울기에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바람과 진동”도 좋은 울음의 조건으로 덧붙인다. 바람은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역할을 맡으며 진동은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한 번의 발걸음”이 가져다준다. 걸음을 옮길 때 뚝 떨어지는 눈물을 상상하게 된다. 걸음은 천천히 옮겨야 한다. “오 분이면 걸어갈 거리를/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음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걸음이 너무 빠르면 집중력이 흩어진다.
시는 집으로 돌아온 시인의 심정을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바쁘게 빠져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로 전한다.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줄이 쳐져 있을 정도니 상당히 오랜 시간 바깥에서 울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들어가면서도 바쁘게 빠져나가 듯 했다 했으니 쏟아낸 울음이 뭔가 막혔던 마음을 많이 해소시켜준 것으로 짐작된다.
사랑의 감정을 살펴볼 수 있는 시로 넘어가기로 한다. 이은규의 시에서 엿볼 수 있었다. 불행히도 시는 잘 풀려나가고 있는 사랑을 전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끝났는데도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랑이다. “매듭을 잊은 시간”이라는 구절이 그것을 짐작하게 한다. 사랑은 끝났다고 깔끔하게 정리가 되질 않는다. 끝났는데도 자꾸 매달리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시인이 “매듭을 잊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봄을 맞아 시인이 한 일은 어느 하루 ‘상춘객’이 되어 “꽃 보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꽃을 보러 나간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 손끝이 차가운 날씨 속에서 “혼자의 나들이”를 하며 물어물어 ‘청매홍매’를 찾아간다. 청매홍매가 “청실홍실의 상상력”으로 이어질 정도로 시인은 끝난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다. 청실홍실은 혼례에 쓰이는 남색과 붉은색의 명주실을 말하는 것이니 시인이 꿈꾼 사랑의 매듭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전히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는 시인이 그날 매화 앞에서 떠올린 말이 있다. 바로 “누군가 날 생각하면 신발끈이 풀린다는 말”이다. 아마도 누군가 어떤 사람의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의 귀가 간지럽다는 말의 변형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날따라 “신발끈이 자주 풀”렸다. 사랑할 때의 우리들은 작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매달린다. 신발끈이 풀릴 때 시인은 “누군가의 생각을 짐작하겠다”고 말한다. 시인의 마음이 혹시라도 떠난 사람이 아직도 마음이 내게 남아있지는 않은 것일까를 하는 기대쪽으로 기울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말의 뒤에는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말이 곧바로 따라붙는다. 말도 안되는 얘기라는 생각 또한 함께 했다는 뜻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시인이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 가운데 어떤 매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즉 매듭지어지지 않은 사랑의 매듭을 구한 것이다.

언젠가 대신 신발끈을 매주며 함께 있는데도 풀릴 만큼 좋아, 묻고 답하던 날 마지막 꽃에 귀기울이면 그날의 목소리 돌아올 거라 믿습니다 모든 나무에게 꽃이 그렇듯 함부로 피는 사랑이란 없다 잘못 매듭지어진 시간이 있을 뿐
—이은규, 「매화, 풀리다」 부분

시의 제목이 「매화, 꽃피다」가 아니라 「매화, 풀리다」인 점도 눈길을 끈다. 때로 매화는 꽃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신발끈처럼 풀리면서 누군가에 대한 생각을 그 자리에 품는다. 우리들이 사랑의 감정을 가졌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꽃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많은 답이 가능하겠지만 조용미의 시에서 그 답을 들어본다. 다시 물어본다. 누군가 아름다워 보일 때 그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가 보고 있는 누군가가 아름답기 때문일까. 조용미의 답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시인은 “당신은 늘 빛을 등지고 있”고 그것은 “내가 만든 구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당신은 빛을 등지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우며, 때문에 나는 항상 그런 구도 속에서 당신을 보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것은 나의 구도이다. 구도가 바뀌면 당신의 아름다움도 바뀔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의 아름다움은 주관적이 된다.
그러나 시인은 “당신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객관적이다라고 말했다면 사실이 되었을 것이나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했으니 당위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과 그렇다는 다르다. 당위는 요구이나 사실은 요구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사실이라기보다 대상에 대한 요구이다. 사실이 되면 아름다움은 대상 고유의 것이나 당위라면 요구를 들어주었을 때만 아름다움이 충족된다. 시인의 요구는 계속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윤리적이어야 한다”와 “당신은 최종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 그리고 “당신의 아름다움은/빈틈없어야 한다,” 또 “당신의 아름다움은/고독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가 그 요구들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나로부터 발생한다
—조용미, 「당신의 아름다움」 부분

우리는 대개 상대가 아름다워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용미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상대를 아름답게 바라보는 구도와 갖가지 요구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시인이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게 늘/가장 큰 시련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당신이 우리의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을 때가 있고, 또 항상 우리가 원하는 구도에 위치를 잡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감정으로 사랑하는 일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누군가를 마음에 두면 사소한 것도 나누고 싶게 마련이다. 가령 눈이 오면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리는 것도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그 양상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설빈의 시가 그 점을 보여준다.
눈이 왔고, 그래서 시인은 ““밖에 눈!””이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손은 녹아 있었다”고 말한다. 손이 녹아 있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것을 따뜻해진 마음의 결과로 받아들였다. 시인은 “한 번은 밖에서 한 번은 안에서, 눈이 오고 눈은 그쳤다”고 했다. 눈이 그칠 때까지 답신은 오지 않았다. 둘의 관계가 메시지에 즉각 답을 하는 관계는 아닌 것이다. 그 관계는 시인의 감정에 이렇게 영향을 미친다.

창가에 눈
한 송이 내려앉고 있었다
유리창을 긁으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 입김은
그 희디흰 비명을 흐리고 앉아 있었다
—이설빈, 「겨울의 맹세」 부분

창가에 내려앉은 눈 한 송이가 “유리창을 긁으며/무너져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관계가 인간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면 그렇게 된다. 창에 불어서 하얗게 서리는 입김이 “희디힌 비명”이 되는 것도 관계가 감정에 영향을 미친 결과이다. 우리의 감정은 암암리에 우리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 크게 좌우된다. 그 영향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혀 다르게 바꾸어 놓을 정도로 크다.
감정이 항상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감정은 우리의 내면을 미묘하게 흐를 때가 있다. 최정진의 시에서 접할 수 있다. 시인은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인사를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엔 어떻게 될까. 시인은 다음과 같이 된다고 말한다.

마주친 사람도 있는데 마주치지 않은 사람들로 생각이 가득하다
—최정진,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 부분

“그를 보는 것이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외면하는 것이 선행도 악행도 아니”지만 굳이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며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때 그러한 우리의 감정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면을 미묘하게 흐른다. 결국 시인은 “모르는 사람들과 내렸다”고 한다. 미묘한 감정은 결국 시인은 누군가에 대한 외면으로 이끌었다. 가끔 감정은 우리 안의 내밀한 흐름이 되면서 우리들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끈다.
감정은 우리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감정은 때로 우리를 빠져나가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갈 때도 있다. 이른바 감정이입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이지아의 시에서 그 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시인은 어느 날 가판대를 보았고, “마치 물건이 살아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런 것을 생각하자니 껌과 휴지와 빵 들이 가여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상을 가엽게 바라는 그 마음이 시인의 위치를 가판대 속으로 옮기기에 이른다.

가엽다고 생각한 날, 나는 가판대 안에 들어 있었다. 배가 많이 아팠고 손님들이 몰려왔다. 참을 수 없었고 도로를 넘어 뛰어가도 해결할 수 없는 거리와 시간이었다. 어떤 이가 내가 들여 온 물건 중에서 제일 비싼 생과일 음료를 달라고 했다. 나의 하체는 가판대 안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어떤 이는 내 인체의 소리와 냄새와 상황을 알아챘다. 어떤 이는 잔돈을 받아 들고 비닐봉지를 들고 갔다. 코를 막고 걸어가는 게 옆구멍으로 보였다. 어떤 이의 몸에서 오리 깃털이 하나 떨어졌다. 나는 그날 밤, 새벽까지 가판대 안에 있었다. 어떤 이는 취해 가판대 근처로 다시 돌아왔다. 발로 차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서 나와라. 나와. 못 나오지?” 어떤 이는 비틀거리면서 가판대 벽에 오줌을 갈겼다. 날씨는 복합적이고 우리는 공통점이 생기고 우리는 결합된 것 같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라이터 불을 내 옷에 발랐다. 가판대는 폭발했다.
—이지아, 「캔과 경험비판」 부분

시인은 “나는 가판대 안에 들어 있었다”고 말했으나 나는 그것을 실질적 상황으로 보지 않고 이입된 감정의 결과로 보았다. 내게 타인의 경험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감정이입을 통하여 타인에게로 넘어가면 타인의 경험이 나의 직접적 경험으로 뒤바뀐다. 그러면 배가 많이 아픈 생리적 상황을 해결하려고 해도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가판대의 근무 조건과 진상 손님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내 상황이 된다. 손님이 진상 손님인 것은 그가 원하는 “내가 들여 온 물건 중에서 제일 비싼 생과일 음료”가 가판대에선 팔지 않는 물품이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물품을 내놓으라 하는 손님은 진상 손님이다. 열악한 근무 조건과 진상 손님은 결국 시인의 하체를 폭발시키기에 이른다. 하체가 폭발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 폭발은 진상 손님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리 현상이 가판대 안에서 벌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그렇게 감정을 타인에게 보내 타인을 직접 살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감정이입을 통한 직접적 경험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론의 세상으로 시인을 이끈다. 시인이 “당신들이 살고 내가 죽었던 시대”가 지금까지의 시대였다면 그 시대는 끝났으며, “이제부터는 당신들이 죽고 내가 오래 살았으면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이입은 한 세상을 끝내고 다른 세상을 열어줄 때가 많다.
아무도 감정을 기계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로봇이 일상화될 미래의 세계에선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으면 감정의 기계화를 확고하게 부정할 수 없게 된다. 김유림의 시가 우리를 그 세계로 데려간다.

친구가 울었다. 친구의 부인 봇이 함께 울지 않고 머뭇거렸다. 부인 봇은 감정을 낭독했고 친구는 낭독 내내 울었다. 부인, 그만 읽지 않겠소? 그럴 수 없어요. 당신의 감정이 끝나지 않으니까.
—김유림, 「봇의 이야기와 편지」 부분

로봇에게서 감정은 어떤 ‘역할’이다. 슬플 때는 눈물을 흘리는 역할이 로봇의 감정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고정된 역할로 굳어 있지 않다. 글을 시작하는 자리에서 슬픔이란 감정과 관련하여 살펴본 세 편의 시는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로봇의 세상은 그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고정된 역할극으로 뒤바꾸어 놓을 위험이 크다. 김유림은 로봇 세상에서 펼쳐질 감정 이야기를 “편리한 이야기”이며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를 매듭짓고 있다. 먼 미래가 그렇게 바람직한 세상은 아니다.
마지막 순서로 류진의 시를 살펴보려 한다. 시는 시대에 따라 감정이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는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을 불러 “아들아, 이리 와서 앉거라 너도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진실을 알아야겠지”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아들은 “예상대로, 저는 주운 자식인 건가요?”라고 묻는다. 아들은 그 뒤에도 “젠장! 저만 보면 떡볶이를 사주고 남몰래 주방에서 눈물을 훔치던 그 아줌마가 제 진짜 어머니지요?”를 물으며 몇 번을 빗나간다. 그리고 그 뒤에서 어머니는 드디어 자신의 비밀을 아들에게 보여주기에 이른다.
어머니의 비밀은 꼬리였다. 꼬리는 구미호를 연상시킨다. 구미호는 아홉 개의 꼬리를 가졌다. 하지만 구미호의 시대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이제 꼬리는 “네코마타 일족”의 것이다. 네코마타는 일본의 오래된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요괴이다. 시대는 변했고 이제 꼬리는 구미호의 것이 아니라 네코마타의 것이다. 인간과 오래 산 고양이가 네코마타가 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코마타의 꼬리는 두 개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래서 우리 일족은 사람과 대를 이을 수 없어요/당장 헤어지라고 하진 않을 테니, 지금 만나는 그 아이도 조만간 정리하는 게 좋을 게다”라고 말한 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똥꼬에 딱(아래아 딱) 들어맞는 꼬리를 사러가자꾸나”라고 덧붙인 말을 보면 그 꼬리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꼬리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체성이다. 누구나 생물학적 성과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질 수가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이지만 여성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한 네코마타는 생물학적인 종이 아니라 사실은 정체성의 종인 것이다. 인간이 되지 못한 여우의 정체성은 구미호의 시절에는 비애의 감정을 불렀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그것은 드디어 나의 정체성은 찾은 기쁜 일이 되었다.

나는 방에 들어와 책상에 엎드렸습니다
시드는 해를 보면 혀끝에 침이 고이던 일과
무당벌레의 그림자를 엄지로 꾹꾹 누른 일이 떠올랐고
오늘의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기쁨이 몸속에서 점점 퍼져나갔습니다
—류진, 「구미호」 부분

시인은 그동안은 “시드는 해를 보면 혀끝에 침이 고이던 일”의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시인이 가진 종의 정체성이 바로 네코마타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이 몰고온 것은 과거엔 비애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드디어 내 정체성을 찾은 기쁨이 된다.

3
감정은 다양하다. 감정의 양상도 다양하다. 시는 그 감정을 불러다 새로운 지평을 연다. 나는 열 편의 시를 골라 그러한 경우를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그의 부재로 인하여 앓는 슬픈 감정과 그 감정이 만들어낸 빈자리를 죽은 자로 다시 채우는 시의 세상을 살 수 있었다. 또 슬픔의 몫을 죽은 자에게 넘겨 산 자가 오히려 죽은 자에게 위로받은 세상을 시 속에서 만나기도 했다. 날좋은 날 소풍이라도 가도 눈물 쏟기 좋은 날의 외출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랑의 감정은 또 어떤가. 사랑의 감정은 풀어진 신발끈 하나에 헤어진 사람의 마음을 불러들여 그 사소함으로 사랑의 매듭에 이르고 있었다. 상대를 아름답게 느끼는 우리의 감정을 결정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 자신이란 점을 알려준 것도 시이다. 감정은 또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 시는 그 사실도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우리의 내면을 흐르는 교묘한 감정 또한 경험했다. 감정은 때로 나를 벗어나 타인으로 건너가기도 한다. 그때면 타인의 삶이 직접적인 나의 삶이 된다. 시는 먼 미래에 올 로봇의 세상에서 기계적이 되어버린 감정의 세상으로 우리는 안내하기도 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한때 비애의 감정이 운명이었던 삶이 기쁨으로 바뀌는 경험을 안겨주는 시의 세상도 있었다.
인간의 감정은 수많은 시의 소재 중 하나일 것이다. 시는 그 소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불러 감정의 지평을 새롭게 연다. 열 편의 시가 그 사실을 증거했다.
(『경남문학』, 2020년 여름호, 평론)

**글에 인용된 시들은 다음 시집들에 실려 있다.

  • 오규원, 『오규원 시 전집1』, 문학과지성사, 2002
  • 김민정,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문학과지성사, 2019
  •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2020
  •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
  • 이은규,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2019
  • 조용미,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 이설빈, 『울타리의 노래』, 문학과지성사, 2019
  • 최정진,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 문학과지성사, 2020
  • 이지아, 『오트 쿠튀르』, 문학과지성사, 2020
  • 김유림, 『양방향』, 민음사, 2019
  • 류진, 『앙앙앙앙』, 창비, 2020
『경남문학』 2020년 여름호에서 글이 실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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