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숙자는 그의 시집 『열매보다 강한 잎』에 실린 시,
<물은 한 방울로 태어난다>에서
“한 방울의 물”을 가리켜 “물의 씨앗”이라고 했다.
시인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빗방울도 물방울이니
비오는 날은 물의 씨앗이 자욱하게 날리는 날이다.
시인에게 후둑후둑 거리는 빗소리는 그 씨앗들의 “발자국 소리”다.
물의 씨앗, 그러니까 한 방울 한 방울의 빗방울은 한데 모여 물을 이루고,
그 뒤엔 “걷고, 달리고 소용돌이”치는 물의 운명을 걸어간다.
하지만 난 비가 내릴 때면
잠시만이라도 빗방울에게서 물의 운명을 벗겨주고 싶다.
그 운명을 벗겨주려면 가령 야외에 놓인 탁자 위에선 그게 아주 어렵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지상의 모든 곳이 그렇듯이
그곳 또한 빗방울에겐 물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곳이다.
물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그곳에서
빗방울은 탁자에 떨어지는 순간 으깨지며,
으깨진 빗방울은 둥글고 탐스럽던 제 모습을 잃은채 서로 뒤섞여
부정형으로 몸을 불린다.
몸이 불어나면 빗방울은 이제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흐르기 시작한 물은
탁자의 아래쪽으로 물을 길게 엮어 줄을 내리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지상으로 내려온 물은 등에 등을 밀며 길을 헤쳐 냇물로, 강으로 간다.
그게 바로 빗방울의 운명이다.
세상은 어디서나 그런 물의 운명으로 빗방울을 속박한다.
난 잠깐이라도 빗방울에게서 그 운명의 멍에를 벗겨주고 싶다.
빗방울이 그 운명의 멍에를 벗을 수 있는 곳은, 그러나, 세상에 없다.
하지만 난 운좋게도 빗방울이 그 멍에를 벗는 순간을 본 적이 있다.
그 중 한 곳이 강원도의 주문진항이었고,
또 다른 한 곳은 팔당의 한 작은 연못이었다.
두 날 모두 비가 내렸다.
그 날 내 앞의 빗방울은 세상으로 가지 않고 물의 가슴으로 내렸다.
물의 가슴으로 내린 빗방울은
으깨진 몸을 서로 뒤섞을 필요도 없이 물이 되었지만
그 전에 아주 잠깐 동그라미가 되었다.
방파제가 바람을 막아준 조용한 주문진항의 바닷물 위에서
여기 저기 동그라미가 피었다 지고 있었으며,
빗줄기가 좀더 거셌던 팔당의 연못에선 피고지는 동그라미가 수도 없었다.
너무 많아 일일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빗방울은 세상으로 갔을 때는 맨땅에 헤딩하기가 제 운명이었는데
잠깐이지만 물의 가슴에선 수없이 그려내는 동그라미로
전혀 다른 순간을 살고 있었다.
세상의 속박을 넘어 다른 무엇이 되고 싶은 빗방울의 꿈은
세상이 속박한 빗방울의 운명,
바로 다름 아닌 물 위에서 동그라미로 피고 지고 있었다.
그래, 누군들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우랴.
빗방울이 세상의 속박 속에 물이 되지만
그 물 위에서 빗방울의 운명을 잠시 잠깐 벗어나
동그라미로 피었다 지듯이
우리들 누구나 세상의 속박 속에 묶인 우리의 삶에서
스스로의 꿈으로 피었다 지면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래서 난 이제 비가 올 때면
가까이는 팔당으로, 멀리는 동해나 서해의 바닷가로 나가
빗방울이 그리는 그 수많은 동그라미를 건져올테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사랑해”라고 속삭일 때면
그 말의 한가운데 있는 이응 받침은
빗방울이 그려준 그 동그라미로 사용할테다.
아마 그밖에도 빗방울의 동그라미는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자에도 이응이 들어가 있으니
그녀의 이름을 적을 때도 이응자 하나는
비오는 날 연못에서 건져온 빗방울의 동그라미로 사용할테다.
빗방울 속에 물의 운명이 있고,
물의 운명 속에 동그라미의 자리가 있다.
내 속에 세상이 속박하는 나의 운명이 있고,
그 속박된 운명 속에 내 꿈의 자리가 있다.
11 thoughts on “빗방울”
김동원님 ~안녕하세요
제가 빗방울 그림을 찾다가 귀하의방을 들리게 됐고 여기서 이 귀한 그림을 만났습니다
이 그림을 퍼다가 좋은 곳에서 사용하고 싶어서 글 남깁니다
혹 불편하시다면 멜 주시면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어려우시겠지만 다음 주소로 연락 부탁합니다
sbs3039@hotmail.com
편하게 사용하세요.
들러주신 것 고맙습니다.
으~~~음~~
여전히 형의 글발은 나를 매료시키시네용….
이제 자주 놀러와..제 몸과 마음을 업그레이드 시켜야지~~~
아!!!까옥아…나두 이름에….`ㅇ`이 두개나 이~~~따~~~
동원이형, 누군지 알어?
당신 후배…ㅎㅎ
누군지 알아맞춰봐~~ 난 누군지 안다우~
반가워~~~
내 후배들이 모두 예쁘다는게 특징이었는데,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예뻤던 후배일 거야.
자주 놀러와.
아들 자랑도 가끔 하구.
빗방울 한방울에도 이렇게 깊은 의미를 부여하시다니..^^
전 비를 볼때 소리로 보기때문에 한방울 한방울엔 신경쓰지 않았네요.
이슬비나 가랑비보다는 시원하게 지붕을 두드리는 장대비를 더 좋아하는.^^
사진을 찍다보니, 사진이란게 소리를 담지 못해서 자꾸만 형상에 매달리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빗소리가 참 매력적이죠.
2007년도 멋진 블로그 기대할께요~
대박기원!!로또당첨!!
올해도 행복하세요~
만수무강!!운수대통!!!
만약 로또당첨되면 블로그에만 전념하여
모든 이들에게 풍성한 볼거리, 읽을 거리를 제공하겠나이다.
바둑이님도 2007년은 행복, 즐거움, 기쁨, 웃음, 그리고 여유와 만만이와 함께 하는 해가 되길!
시인의 시와 당신의 사진과 당신의 글이 만나니 글이 참 깊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참 많을 걸 읽어내는구나.
이름에 이응자가 들어가 있어 참 다행이다.
당신 이름에는 이응이 두 개나 있어…ㅎㅎ
풍경이 두 가지인 거 같아.
하나는 그냥 봐주길 바라는 풍경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보는 것을 넘어 무엇인가를 읽어주길 바라는 풍경이 있는 것 같아. 우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데는 익숙한데 풍경을 읽는데는 좀 서툴다는 생각이 들고, 다행이 난 풍경을 보고 읽어내는 재주가 좀 있는 것 같고… 뭐, 그런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