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서 – 김지혜의 시 「강」

Photo by Kim Dong Won
2005년 10월 5일 서울 반포지구 한강변에서


가끔 시를 읽다보면 시가 우리 곁에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널려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내가 자주 걸음하는 익숙한 곳이 시의 현장인 경우가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자주 한강에 나가곤 한다. 주로 사진을 찍으러 나가는 것이긴 하지만 이번에 김지혜의 시집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을 읽다보니 내가 보았던 한강의 풍경이 시인이 어느 시 한편에 그려놓은 풍경과 중첩이 되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사진에 담아 갖고 들어왔는데 시인은 그 풍경을 언어로 옮겨 자신의 시에 담아놓은 셈이다.
사실 한강에 나가는 것이나, 아니면 굳이 한강이 아니라도 가까운 곳의 아무 강이나 바다에 나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또 그럴 때 시인의 시와 함께 동행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인과 동행하여 강으로 나가면 강의 풍경을 남다르게 누릴 수 있다.
오늘은 강으로 나가는 길을 시인 김지혜의 동행을 청해 함께 나가본다.

뚝섬에 내려와 앉아 있다
발을 담그면 나는 그대로 강물이 될 것이다
차츰차츰 젖어들 것이다, 수면 위
저 빛의 인내는 나보다 오래되었고
바닥에 닿지 못하는 빛의 마음이 물결을 일으킨다
흰자위 뒤집으며 거품 몰고 가라앉는 시간은
밀려왔다 밀려가는 저 간절한 파동에 실려
간혹 빛의 표정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저것을 강이라 말할 수 있을까
또 저것을 강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강바닥에 내려와 앉아 있다
바닥이 날 끌어안고 울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김지혜, 「강 – 침윤 1」 전문

한강이 서울을 가로질러 흘러가고 있긴 하지만 사실 서울 사람들에게 한강에 접근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한강변의 남북으로 모두 자용차 전용도로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강으로 나가려면 지하로 뚫린 통로를 찾아내야 한다. 그 통로를 찾아내는 건 그리 쉽지가 않다.
하지만 뚝섬은 지하철에서 내리면 곧장 한강으로 내려설 수 있는 유일한 곳이어서 쉽게 한강으로 걸음할 수 있다. 시인이 지하철을 타고 그곳으로 갔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시인은 지금 뚝섬에서 한강으로 나가 강변에 앉아 있다. 그곳은 나도 자주 가는 곳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가 한강의 최북단에 있는 광진교를 건넌 뒤 뚝섬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시인 김지혜도 어느 날 나와 똑같이 그곳 뚝섬의 한강변에 앉아 있었다. 그때 시인 앞에 펼쳐진 한강의 풍경을 보면 물 위에서 빛이 부서지고 있었으며, 항상 그렇듯이 물결이 일고 있었고, 물결이 밀려왔다 밀려가면서 물 위에 작은 물거품이 약간 떠 있다가 사그라 들고 있었다. 그건 해질녘이나 이른 아침에 한강에 나갔을 때, 내가 자주 접하는 풍경이다. 시인은 지금 그 풍경을 보며 한강변에 앉아 있다.
자신이 뚝섬의 한강변에 앉아 있음을 일러준 시인은 강을 바라보며 “발을 담그면 나는 그대로 강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한강물에 발을 담그기는 매우 어렵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물이 너무 더러워서 이다.
어쨌거나 발을 담그면 발이 시원할 것이란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도 발을 담그면 내가 그대로 강물이 될 것이란 말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강물에 발을 담그면 발이 곧 시원해질 것이란 것으로 치환해 버린다. 이는 그다지 무리한 치환은 아니다. 가령 여름날의 계곡을 생각해보자. 계곡에 발을 담그면 우리의 몸은 곧 시원해진다. 그때의 시원함은 사실은 알고보면 계곡물이 차가워 우리의 더위를 식혀주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계곡과 하나되는 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계곡의 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는 더더욱 계곡물과 하나가 된 느낌이 확연해진다.
우리는 가끔 그렇게 우리가 손을 잡거나 껴안거나, 또는 발을 담그는 그 무엇과 하나가 될 때가 있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 누구와 하나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발을 담갔을 때 강이 되는 경험은 그런 경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강과 하나되면 시원하다. 또 점차로 강물에 젖어들게 된다. 시원함과 젖어듦은 강물과 하나되었을 때, 몸이 감지하는 느낌이다. 물론 그렇다고 물에 발을 담그고 시원함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이 강물과 하나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강에 갈 때 시인과 동행해 보라고 권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보통은 계곡물에 발을 담갔을 때의 시원함을 계곡물과 분리시켜 그것을 내 몸의 시원함으로 즐기는 것으로 끝낸다. 즉 우리들은 주로 시원함에 초점을 맞추지만 시인은 몸의 느낌보다 물과 하나됨에 초점을 맞추고 그 하나됨을 부각시킨다.
우리도 사랑할 때는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으면 그 손의 따뜻함보다는 그와 하나된 느낌에 더 초점을 맞추며, 바로 그 때문에 손잡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할 때 가졌던 그 소중한 경험을 금방 잊어버리고 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시원함의 너머로 넘어가기가 어렵다. 그때 시원함의 너머로 넘어가려면 시인의 도움을 빌리는 것이 좋다. 그 도움을 받으면 계곡물에 발을 담갔을 때 온몸이 시원해지는 일반적 차원을 넘어 내가 계곡과 하나되는 시의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 시의 차원에서 펼쳐지는 풍경이 일반적 풍경과 크게 다른 점은 일반적 풍경 속에선 모든 것이 따로따로 노는데 반하여 시의 차원에선 그 풍경들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가령 물결, 물거품, 수면에서 부서지고 있는 반짝이는 햇볕이 모두 일반적 풍경 속에선 따로 놀지만 시의 나라에선 서로서로 이어져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서로 이어져 있는 시의 나라에선 빛은 강의 바닥에 닿고 싶어한다. 그러나 시인이 앉아서 바라보고 있는 뚝섬의 한강물 위에서 부서지고 있는 빛은 바닥에 닿지를 못한다. 바닥에 닿지를 못하니 그 마음을 채우지 못한 빛이 몸을 뒤척인다. 몸을 뒤척이니 물결이 인다. 그렇지만 빛은 바닥에 닿지 못하고 그냥 시간만 흘려보낼 뿐이다. 바닥에 가라앉고 있는 것은 무심히 흘러가고 있는 시간 뿐이다.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강이지만 그러나 그건 우리들이 익히 보던 강은 아니다. 그 강엔 강의 바닥에 닿고 싶은 빛의 마음이 수면에서 반짝이고 있고, 강의 바닥에 닿지 못한 빛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물결이 인다.
아마도 시인도 우리와 같아서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다 얼마 전에 깨달았다고 한다. 강의 바닥이 시인을 끌어안고 울고 있다는 것을.
나는 시를 다 읽고 난 뒤, 시인이 바라보던 강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환치시켜 놓는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하나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수면 위에서 부서지는 빛이 강의 바닥에 이르고 싶어하던 것처럼. 그렇지만 그 욕망은 잘 충족되질 않는다. 그럼 우리도 몸을 뒤척인다. 몸을 뒤척이며 인생 너무 길다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그 뒤척임을 넘어가려면 강바닥으로 내려가 앉아야 한다. 바닥이 날 끌어안고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까지. 시인 김지혜는 아주 젊은 사람인데 용하게도 그 경지에 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강바닥에 이르렀으며, 강이 자신을 끌어안고 울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는 그의 또다른 시들을 읽어봐야 겠지만(물론 짐작가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실마리가 되는 것이, 처음에는 시인이 뚝섬에 내려와 앉아있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강바닥에 내려와 앉아있다고 말한 사소한 변화라고 본다. 강바닥으로 내려와 앉았다는 것은 강 가까이 위치를 옮긴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바로 곁에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그를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다. 가까이 두고 있으면 그 사람밖에 안보이지만 멀리 두고 보면 그 옆의 다른 남자나 여자들이 함께 보인다) 시인과 함께 강에 가면 그냥 매일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에서도 사랑을 깊이있게 생각해볼 수 있다.
날이 좀 풀리면 한강변에 나가 수면 위에 부서지는 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들어와야 겠다.

6 thoughts on “강가에서 – 김지혜의 시 「강」

  1. 강가에서 수면에서 부수어지는 빛을 보면 그 순간 마음이 겸허해 지는 듯해요
    그래서 많은 사진작가들이 강가에서 이런 사진을 많이 담는 듯 하네요

    나 흐르는 강같이…
    많은 세월 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제대로 울어 보지도 못한 것 같은데
    시인의 강 바닥이 날 끌어 안고 울고 있다는 표현이
    순백의 마음의 물결 같아서…
    그 풍경이 사랑스럽네요^^

    1.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한강엘 나갔어요.
      저녁 때라 강물에 빛이 반짝이고 있더군요.
      그녀랑 갈대밭 너머로 강가를 두고 맥주 한잔하고 들어왔죠.
      전에 이 시를 생각하며 본 강은 뚝섬에서 본 한강이었는데
      오늘은 빛이 반짝이는 강을 올림픽대교 밑에서 보았어요.
      달린 댓글을 따라 들어와 이 글을 읽어보니 오늘보았던 강물의 저녁빛이 생각나네요.
      고맙습니다.
      지나간 것들도 읽어주시고…

    1. 요건 제 전문분야인 걸요.
      사실 이렇게 좋은 시를 소개하려고 이 블로그를 만들었는데… 시는 별로 소개 안하고 너무 사진만 갖고 놀고 있는 것 같아요.

  2. 나도 뚝섬에 같이 앉아봤다고 이해가 훨씬 쉽네^^
    나도 뚝섬에 앉았다가 왔는데 저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역시 시인은 시인이야…^^
    언어도 아름답게 부서지고… 빛도 아름답게 부시지네…

    1. 난 빛이 물결 위에서 부서지는 사진을 참 좋아했어. 이상하게 그런 사진을 많이 찍었지. 보통 그때 내 생각은 빛이 물결에 올라타서 하루의 마지막 순간을 즐긴다는 쪽이었지. 그러니까 난 빛에서 물결과 신나게 노는 즐거움에 주목을 했다고나 할까. 보통 나는 자전거타고 흥겨운 마음으로 강변에 나간 경우가 많아서 그런 거 같아. 보통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이 그 당시의 마음 상태를 많이 반영하거든.
      김지혜는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고 갈등할 때 뚝섬의 강변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나도 싸우고 한강변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경우 평상시 그냥 지나치던 물소리도 달리 들리는 경우가 있어. 삶의 잠언으로 작용을 하지. 나도 잠실의 탄천 아래 자락에서 그런 경험을 한 경우가 있었어.
      검색하다가 알았는데 이 시는 한겨레 신문에 실린 적이 있더라. 그 왜 시집낸 시인들의 시 한편 소개하는 코너에 말야. 그래도 다들 좋은 시는 어떻게 알아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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