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누리면서 사는 삶이 음악인의 것만은 아니다.
미술을 누리면서 사는 삶 또한 화가의 것만은 아니다.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면서 즐거움을 향유하는 삶 또한
음악과 미술을 누리는 삶이다.
난 여행갈 때면 꼭 MP3 플레이어를 챙긴다.
음악은 내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이다.
만약 내가 여행하는 달이 4월이라면
내 귓전에 흐르는 Deep Purple의 April은
4월 어느 하루의 여행을 더욱 남다른 느낌으로 채색해준다.
그 날은 뭘 보지 않아도
그냥 그 음악과 함께 어디를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감미롭다.
그렇다면 음악과 동행하듯 시를 챙겨가는 여행도 멋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시를 누리는 삶 또한 시인의 것만은 아니며,
바로 그렇게 시를 챙겨가서 즐길 수 있는 삶이
시를 누리는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가령 바다로 간다면 시인 마종기의 「파도」를 챙겨가 볼 일이다.
미련한 파도야
이 해변에 깔린 집채만한 바위들
밤낮 네 가슴으로 치고 울어보아야
하얀 피의 포말만 흩어질 뿐인데.
한 삼백 년은 지나고 나야
네 몸 굴리면서 간지럼 즐길
흰 모래사장이라도 되어줄 텐데.
그때가 되면 누가 너를 기억하겠니.
허리 구부린 채 혼자서 춤출래?
미련한 파도야,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목마른 폭풍만 꿈꾸면 어쩔래?
긴 편지를 쓰고 지우고 다시 또 쓰는
멀리서도 쉬지 않는 파도의 손.
—마종기, 「파도」 전문
어려운 구절은 하나도 없다.
내 얘기는 바닷가에 가서 이 시를 읽으라는 것이 아니다.
시를 누린다는 것은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시를 삶에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이 시엔 바닷가에 가서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구석이 그냥 힐끗 살펴보아도 두 곳이나 있다.
이 시에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파도의 물결은 바다가 바위에게 끊임없이 보내는 편지이다.
파도는 바위에게 쓰고 또 쓴다, 무슨 내용의 편지인가를.
뭐, 애절한 사랑의 편지겠지.
돌돌말아서 오는 것을 보면 두루말이 편지라고 해야할 것이다.
요게 바로 이용할 수 있는 여지가 큰 부분이다.
그냥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멀뚱히 바라보는 것보다는 그녀를 바닷가에 세워놓고 그녀의 발끝을 쫓아 올라오는 파도가 사실은 그녀에게 보내는 자신의 사랑 연서라고 박박 우기는게 훨씬 더 괜찮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바닷가에 오면 항상 너에 대한 내 사랑의 연서를 바다가 두루말이 편지에 담아 해변으로 갖고 와선 모래밭에 좌악 펼쳐놓는다고 우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파도가 쏴아 밀려왔다 밀려가며 펼쳐놓는 바닷가의 파도는 사랑해라는 속삭임을 담고 있는 내 연서의 변주이다.
뭐, 쏴아 쏴아 소리가 나니까 이건 소리나는 편지라고 우겨도 될 것 같다.
이것만이 아니다. 재미난 구석은 또 있다.
흰 모래사장의 파도가 사실은 그곳에서 몸을 굴리면서 간지럼을 즐기는 중이라는 부분이 그 부분이다.
요 부분은 이렇게 슬쩍 바꿀 수 있다.
바로 그 부분을 이용하여 모래 사장의 전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해변에는 원래 무뚝뚝한 한 남자가 살았는데 한 여자가 그 남자를 사랑했다.
어느 날 그 여자가 그 남자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사랑을 고백했는데 그 남자는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 여자가 한을 품고 죽어서 바다가 되었고 남자는 죽어서 바닷가의 커다란 바위가 되었다.
여자는 삼백년 동안 끊임없이 파도로 밀려와 그 바위의 가슴을 치며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했다.
그 바위가 다 부서져 이 해변의 모래가 되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모래가 된 뒤로 바위는 드디어 여자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바다는 모래사장 위로 몸을 굴리면서 모래가 태우는 간지럼에 깔깔거리고 웃으며 하루 종일 닭살 커플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 해변에 오면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들도 서로 간지럼을 태우며 노는 닭살 커플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더라.
뭐, 그 정도면 둘 모두 간지럼 태우며 우리도 놀아볼까나 모드로 가게 되지 않을까.
원래의 시는 사실 그런 내용은 아니다.
시인은 파도의 사랑이 미련하다고 말한다.
바위가 전혀 알아주지도 않는데 끊임없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삼백년 뒤, 그 바위가 모래가 되어 해변가에 몸을 누이면 모래와 몸을 섞으며 놀 수 있지만 그때는 모래가 파도를 기억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시인에겐 그런데도 물결을 두루말이 편지삼아 끊임없이 건네며 사랑을 꿈꾸는 그 미련함이 사랑이다.
그러니 사실 이 시는 사랑에 관한 시이다.
그리고 또 시 속에는 그런 사랑을 달리 활용할 수 있는 여지들이 담겨있다.
난 이런 점에서 사랑을 할 때는 음악이나 미술보다 시가 훨씬 더 실용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시를 누린다는 것은 어찌보면 그냥 하루 쉬었다 오는 해변을 사랑의 무대로 만드는 일이며, 결국은 삶을 좀더 색다르게 향유하는 것이다.
시인들의 도움을 받으면 갈 때마다 똑같은 바다가 전혀 다른 사랑 얘기의 무대가 된다.
그러니 바다에 놀러 가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마종기의 시편 「파도」를 챙겨갖고 가는 것도 좋을 일이다.
(인용한 시는 마종기 시집,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문학과지성사, 2002에 실려 있다.)
8 thoughts on “바다에 갔을 때 — 마종기의 시 「파도」”
마종기 시인은 방사선과 전문의 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은퇴 하셔서 훌로리다에 사신다고 하더군요.
그분의 친척중에는 보리밭을 작곡한 분이 계시답니다.
마종기 시인을 아저씨라고 부른던 분의 아버지 이셨지요.
그 아버지란 분은 대한민국 현대음악의 선봉에 서셨던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조카뻘 되는 분은
한국의 한 명문대를 나와 미국에서 공부하시고 대기업의
고위직책에 계셨던 문학과 예술을 지극히 사랑하시던
분으로 지성이셨지요…지금은 어데서 뭘 하시는지 바람처럼 홀연히
어느날 사이버 공간에서 멀어져 가신 분으로 그리움을
남기고 떠난 분이시지요..그분이 남겨주신 수많은 산문같은
메일들을 한 권의 책으로 보관하고 있지요.
그분의 아저씨인 마종기 시인의 시집들을 교보에서 지난 가을
사들고 트랩에 올라 돌아 왔지요…
1. 이슬의 눈
2.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3. 그 나라 하늘빛
4.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5.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이방에 사는 사람들은 동화가 되어서 사는 사람일지라도
귀소본능이란 것이 어느 삶의 이정표를 넘어가면 모국이란 것을
막연한 그리움으로 가슴에 비수를 꼿지요……..그 이유를 모르는
불현듯이 가끔 다가오는 그리움………먼 이방지대가 되어버린
모국이란 어휘 비록 자신의 양부가 비한국인 일진데도 그리움로
폐부 깊숙이 다가오지요.
빠리로 전화를 걸면 물흐르듯이 흘러나오는 불어로 말하는 한국계
프랑스인………..영어권에 살면 영어로 언어를 흘리는 한국계
이 각기 다른 색채로 조형된 한국계 이방인들 모두를 하나로
연결하여주는 가교는 한민족이란 정체성이지요….정체성으로
참 많이 힘들지요…..나는 누구인가란 질문 즉 자아인식과 발견으로요…
두고 두고 조금씩 조금씩 님의 글을 읽으렵니다….
574 페이지를 읽으려면 1년은 더 걸려야 하겠지만 영혼이 맑은 글의
향기 언저리에 앉아서 모국어를 상실하여 갈 때쯤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며 이렇게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여 주신
단 한분을 기억하렵니다…..
전 마종기 시인을 딱 한번 만난 적이 있었어요.
한 세 시간 정도 얘기를 했었죠.
현대시라는 문학 잡지에 커버 스토리 쓰는 걸 맡아서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었죠.
한국에 한해에 한번씩은 나오신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좋은 얘기 고맙습니다.
나는 마종기 시인이 훌륭한 의사였을거란 생각이 들어.
저렇게 훌륭한 시를 쓰는 의사인데 어찌 훌륭한 의사가 아닐 수 있을까…
의사로서의 생활이 힘들었겠지만 그는 두 가지 직업을 모두 다 잘했을 것 같어.
그런 의사를 많이 만나고 싶다…
의사로서 상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
우리나라에도 저런 훌륭한 의사가 있겠지…
내가 못만나서 그렇겠지…
의사로서는 모르겠고.
시인으로서는 외국에서 생활했다는게 모국어로 시를 써야 하는 시인에겐 독특한 시각을 심어준 것만큼은 틀림없는 거 같아. 일단 우리는 전혀 갖지 못하는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란 걸 갖게 되니까. 우리는 여기서 사니까 그런 그리움은 없잖아. 그 결핍이 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다행으로 보이기도 하고.
닭살커플의 바다의 전설 넘 재밌네요.^^
바닷가에 가보니 여기 저기 ‘○○야 사랑해’랑 하트 그림이 그려있더군요.
그리고 유난히 꼭 껴안고 다니는 연인들하며..
바닷가에선 닭살커플이 얄미워보이지 않고 참 이뻐 보이더라구요.
몇장 찍어올걸 후회했어요. 참 이쁜 연인들이 많았는데.^^
바람아래 해수욕장에선 부츠가 자꾸 모래에 파묻히는지 맨발로
걷던 여친을 나중엔 안아들고 백사장을 걷는 연인도 보았죠.^^
사실 그게 시의 내용을 재구성한 수준이죠, 뭐.
시엔 재미난 표현들이 많아서 시를 자주 접하면 삶을 좀더 즐겁게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