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맑은 날

Photo by Kim Dong Won
2006년 9월 6일 순천만의 와온해변에서


날이 흐리면
눈앞에 멀쩡하게 세상이 보이는 데도
마치 먼지낀 엷은 베일 뒤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기분도 좀 몽롱하죠.
이미 잠을 털어버린지 오래인 오후가 되어도
계속 졸린 눈을 부비며 세상을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면 더더욱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마치 뿌연 장막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 같기만 합니다.
그건 시계가 멀리까지 트이고 않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흐린 날은 그냥 사람을 바로 눈앞에 두고 마주 앉아도
그 사람이 흐릿하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맑은 날은 흐린 날과 정반대입니다.
지난 해 9월초에 나는 순천만의 와온해변에서
초수퍼 울트라 캡숑으로 맑았던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그녀의 버릇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난 보통 일이 끝나면
일의 중압감을 털어버린 그 홀가분한 기쁨을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속도감에서 실어서 즐기다가 들어옵니다.
아니면 시때가 맞을 경우, 카메라를 둘러메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집안일과 아이에게 묶여서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일이 끝나면 나처럼 바깥을 나갔다가 오기보다
꼭 집안 청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하는 동안의 바쁜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여기저기 진을 치고
마치 제 집처럼 우리와 함께 살았던 먼지들은
그날 그녀가 진공청소기로 휘두르는 필살의 흡입술 앞에서
줄줄이 손발이 묶여 먼지 봉투 속으로 끌려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빈틈으로 꽁꽁 숨어들어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안심했던 녀석들도
그녀가 일을 끝낸 날엔 결코 안전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그녀가 예리하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때문이죠.
마치 수색작전을 펼치며 전쟁이라도 하듯 그렇게 청소를 하고 나면
그녀의 온몸이 다 땀에 젖을 정도입니다.
물론 그러고 나면 집안이야 말끔해 지지요.
어지럽게 놓여있던 물건들도 모두 정리되어 자리를 잡게 되구요.
난 일이 끝나는 날 왜 그녀가 그렇게 목숨을 걸듯 청소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맑은 날 찍은 순천만의 사진을 보니
그 푸른 하늘과 흰구름으로 엮여진 풍경이
그냥 풍경이 아니라 잘 정리된 풍경이란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니까 흐린 날의 풍경은 같은 곳의 풍경이라도
마치 누군가 어지럽혀 놓은 느낌이 들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맑은 날의 풍경은 어지럽혀진 그 흐린 날의 느낌을 일거에 씻어내고
우리에게 말끔하게 정돈된 느낌의 풍경을 내놓습니다.
하도 말끔하게 정돈이 되어 티끌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투명한 느낌마저 들지요.

그러고 보니 이제 그녀가 마치 온집안을 껍질이라도 한겹 벗겨내겠다는 듯이
그렇게 열심히 청소를 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이미 그 맑은 날의 잘 정돈된 투명한 느낌을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집안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빚어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게 분명하구요.
그거보면 여자들이 집안에서 청소를 하는게 그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건 맑은 날을 제 손으로 직접 빚어내는 일입니다.
날 맑은 날, 순천만에 섰을 때 그랬듯이
아마도 청소를 끝낸 그녀 앞의 우리 집도 그와 느낌이 똑같았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런데 또 한가지 고백을 하자면
내 방은 그렇게 보면 항상 흐림입니다.
거의 난장판 수준이라 만약 심한 결벽증 환자가 내 방에 들어온다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숨이 막혀 질식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가 내 방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풍경에 아주 익숙하여
모든 것이 정리가 되면 그때부터 오히려 혼란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 방은 내가 가끔 치울 때 이외에는 항상 흐림이며,
내가 치운다고 해도 그저 약간의 구름을 걷어내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렇게 하루 종일 흐린 풍경 속에 살다가
바깥으로 도망쳐 맑은 날과 함께 하다 돌아옵니다.
나는 그렇게 하루 종일 흐린 풍경 속에 살다가
그녀가 빚어놓은 맑은 날의 집안 풍경을 슬쩍 함께 누리곤 합니다.

나는 맑은 풍경을 빚어내는 건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건 하늘의 몫이거나, 아니면 그녀의 몫인 것 같습니다.
우리 집은 나 때문에 흐리고, 그녀 덕에 맑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6년 9월 6일 순천만의 와온해변에서

12 thoughts on “날 맑은 날

  1. 젤 많이 어지러져있을때 한번 찍어보여주세요.ㅋㅋ
    사진은 정말 맑은날 찍어야 맘에 들더라구요.
    흐린날은 아예 카메라 들고 나가기도 싫어요.
    맑은날도 잘 찍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1. 그럼 기절한다니까요.
      너절하게 흩어져 있는 명함들, 먹다남은 귤껍질, 눈처럼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컴퓨터 스피커와 허브, 외장 하드, 피사의 사탑처럼 여기저기 쌓여있는 책들, 컴퓨터 뒤쪽으로 거미줄보다 더 촘촘하게 얽혀있는 각종 선들…
      누구나 이 앞에선 빈혈 증세를 일으키게 된다니까요.

    1. 순천은 음식이 정말 맛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 순천에 가면 와온해변의 북쪽, 용산의 아래쪽에서 사진을 찍어봐야 겠어요. 붉게 펼쳐진 그곳의 함초밭이 자꾸 시선을 끌었는데 가까이는 못가봤거든요.

    1. 청소 안하는 이유를 저렇게 글로 쓰니까 뭔가 대단한 것 같은데…
      나도 청소를 해야 하는 이유를 뭔가 대단하게 써야 할 것 같구…
      그런데 요즘은 청소하지 않고 흐림으로 지내는게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그런대로 지낼만 하다우…^^

    2. 그나저나… 나도 그날 같이 순천만에 있어봐서 아는데…
      정말 뽀득뽀득 맑은 날이었거든.
      그런데 그런 맑은 날과 나의 청소를 버무린 당신의 비빕밥 글 솜씨는 과히 놀랄만 하우.

    3. 물걸레질은 못해도 가끔 진공청소기로 먼지는 걷어줘야해.
      너무 청소안하면 목도 깔깔하고… 건강에 안좋아.
      흐린 것도 어느 정도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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