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상실과 복원 — 유형진의 시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시인 유형진의 시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를 읽다 보면 같은 구절을 시 속에서 다시 만난다. 나도 다시 반복해본다.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유형진,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부분

보통 이런 구절을 만나면 이 구절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 시를 읽는 우리들의 몫이 된다. 하지만 이 시에선 그럴 필요가 없다. 시인이 그 구절에 대해 “왜?”라고 스스로 묻고 그 구절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스스로의 답에 기대보면 그 구절은 “슬픔은 뿌옇게 흐르고/썩으면 냄새가 고약하니까/나에게 기쁨은 늘 조각조각/꿀이 든 벌집 모양을 기워놓은 누더기 같아”라는 말에서 왔다. 이 말은 시인 스스로의 말이 아니다. ‘여자’의 말이다. 시인이 이 시를 시작하는 자리에서 “우유 사러 갈게, 하고 나갔다가/돌아오지 않은 여자가 있다”고 했을 때, 바로 그 구절에 등장하는 여자이다. 그 여자는 누구일까.
나는 시를 읽을 때 시를 종종 상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인다. 가령 “우유 사러 갈게, 하고 나갔다가/돌아오지 않은 여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실제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여 이 구절의 실제 의미는 내게 있어 어느 날 여자가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미루어 나는 그 여자가 시인의 엄마가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엄마가 어느 날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그것은 남은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 상처는 엄마의 상실이 원인이다.
상처는 극복되어야 한다. 상처를 계속 안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 시는 상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극복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어렸을 때 집을 나가 평생 상처가 된 엄마는, 그가 여자가 아니라 엄마였기 때문에 아이에게 상처가 된다. 그러면 그 상처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유형진은 이 시에서 그 엄마에게 여자를 돌려주고 그 오랜 상처를 극복하고 있다. 나는 이 시에서 엄마가 한번도 엄마로 불리지 않고 끝까지 여자로 불린 것은 드디어, 시인이 엄마에게 여자를 돌려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시인은 여자의 말을 돌려받는다. 돌려받은 그 말은 곧 상처의 치유가 된다. 그 말이 정확히 여자가 한 말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여자의 말이라고 하면서도, “그러나/전혀 기억나지 않는 말/지금 기억나는 말”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마를 여자로 이해하는 순간에 시인이 손에 들게된, 말하자면 엄마가 아니라 여자로서 할 수 있었던 여자의 말로 짐작되는 언어일 수 있다.
여자가 집을 나갔다고 했으므로 사람들이 한가지 궁금해 할 것 같다. 왜 여자는 집을 나갔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처를 극복하게 해준 여자의 말에서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다. 이유는 여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일단 먼저 여자에게 “우유는 슬픔”이었고, 그 이유는 “슬픔은 뿌옇게 흐르고/썩으면 냄새가 고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유가 쏟아져 흐르고 있고, 동시에 방치해둔 우유가 썩는 상황을 생각했다. 치우면 되겠지만 그것이 슬픔이 된 것을 보면 누군가 치울 사람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치우지 않고 방치해둔 것이다. 그게 누구인지는 시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 땅에서는 일하는 여자들이 엄마가 된 뒤로 그런 상황에 처하게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기쁨은 조각보”이며 그 이유가 “나에게 기쁨은 늘 조각조각/꿀이 든 벌집 모양을 기워놓은 누더기 같”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쁨이 누더기가 된 삶은 기쁘기보다 힘겨울 확률이 더 크다. 그것 또한 직장과 가정의 병행, 그리고 도와주는 손길을 찾기 어려운 환경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여자는 그런 경우, 엄마가 되어 여자를 잃는다. 시인 이영주는 이 경우를 나와는 다른 표현에 담아서 읽어냈다. 이영주는 여자를 잃은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훼손으로 보았고, 여자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복원이라고 했다. 이영주의 말을 빌려 쓰면 여자는 엄마가 되면서 종종 여자를 훼손당한다. 엄마가 희생이 당연시되는 종속적 존재라면 여자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는 독립된 인격적 존재이다. 여자는 여자의 훼손이 견딜 수 없어 집을 나갔으며, 시인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엄마를 여자로 복원시켰다.
시인은 “우유 사러 간 여자는 영영 오지 않았다”며 그 후 집안이 어떻게 되었는가로 시를 마무리한다. 그 후로 집안은 “벌집 모양 조각보는 그대로 식탁 한구석에 구겨져 있고/우유는 방 안 가득 흘러 넘쳤다”는 것이 시인의 전언이다. 한마디로 집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얘기로 들린다. 집안을 잘 정리하며 사는 자리에 여자를 버린 엄마가 있었다는 얘기도 된다.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다시 여자를 찾았을까. 어쨌거나 시인은 상처가 되었던 엄마에게 여자를 돌려주며 자신의 상처를 극복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보기엔 상처는 컸지만 다행이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놀라운 시의 힘이다.
(2015년 8월 5일)
(인용한 시는 유형진 시집,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문예중앙, 2015에 실려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