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아이가 되버린 아이, 시인 — 김중일의 시 「물고기」

시인 김중일은 그의 시 「물고기」에서 “나는 물고기”였다고 고백한다. 아울러 시인은 ‘열쇠’이기도 했다. 시인은 이 둘을 묶어 자신이 “열쇠의 형상을 한 물고기”였다고 말한다.

물속에서 온몸을 비틀어
물의 금고를 열었던
열쇠의 형상을 한 물고기였으니
— 김중일, 「물고기」 부분

자신이 자신을 “열쇠의 형상을 한 물고기” 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시를 모두 다 읽고 나면 그가 열쇠이자 물고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열쇠로서의 그는 두 사람과 관계되어 있다. 하나는 어머니이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보면 그는 어머니가 “잃어버렸던 앙상한 열쇠”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어떤 세계를 시인에게 기대했을 수 있다. 그러나 앙상한 열쇠였다는 대목은 시인이 그 기대를 빗나가 다른 길에 서 있었음을 암시한다. 열쇠와 관련하여 시인이 관계한 또다른 사람은 “한 늙은 극작가”이다. 구체적 언급이 없어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와 관련하여 보면 시인은 그가 “불행 속에 쓴/희극의 첫 막을 열었던 열쇠”였다.
그러나 시인을 열쇠로 가졌던 어머니와 늙은 극작가의 운명은 그리 행복하진 못했다. 어머니의 경우, 열쇠가 된 시인이 “물속에서 온몸을 비틀어/물의 금고를 열었”지만 “금고 속엔 물거품과 백지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늙은 극작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그가 꿈꾼대로라면 희극이 무대에 올려져 그의 불행을 희석화시켜 주어야 했겠지만 사정은 그렇질 못하다. 시인은 극작가에게 있어선 “발밑에 버려진/오래된 극장의 열쇠”였기 때문이다. 오래된 극장이란 구절로 미루어 극장은 오래 전에 버려졌고, 그 극장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도 버려졌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대개는 부모들의 열쇠이다. 그리고 그 열쇠들은 대개 부모들이 원하는 속이 가득한 금고를 열어 부모들을 충족시키고, 부모들이 첫막을 열었던 희극을 극장의 무대에 올려 관객이 된 부모를 한없는 감동으로 충족시켜 준다. 그때 그 열쇠는 그 부모들만의 열쇠이다. 시인은 그런 열쇠가 되질 못한다. 대신 시인은 우리 모두의 열쇠가 된다.
시인은 부모를 버리고 우리 모두의 열쇠가 된 불효자이다. 우리에겐 그의 불효가 말할 수 없이 다행스러울 수밖에 없다. 부모의 기대는 개인적 욕심이 되기 쉽지만 모두의 기대는 욕심이라기보다 이상이나 삶에 대한 근본적 성찰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아이가 시인이 되면 마치 시인의 손을 떠난 시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아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부모는 뼈와 살을 가진 시를 한 편 쓴 것이다.
(2015년 6월 12일)
(인용한 시는 김중일 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창작과비평, 2012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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