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에 포박된 우리 — 이수명의 시 「나의 경주용 헬멧」

시인 이수명의 시 「나의 경주용 헬멧」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하얀 해를 몰고 다녔다.

나의 경주용 헬멧을 쓰고

이리저리 도시를 온통 쏘다녔다.
—이수명, 「나의 경주용 헬멧」 첫 절반

여기까지는 쉽다. 경주용 헬멧을 쓰고 여기저기를 쏘다녔다고 했으니 “하얀 해”는 하얀 해라고 불리는 오토바이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다음 절반이 문제이다. 다음 절반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벌이 기어갔다.

나의 경주용 헬멧을 쓰고 벌 같은 것이

무덤 속을 미친 듯이 빙빙 돌았다.
—이수명, 「나의 경주용 헬멧」 나머지 절반

대체로 시를 쉽게 읽는 편인 나는 이를 있는 그대로 읽지 않았다. 나는 이 부분의 “벌이 기어갔다”를 벌이 내가 벗어놓은 경주용 헬멧 속으로 들어가서 기어다녔다로 읽으면서 아주 구체화했고, 그곳을 빠져나오질 못해 헬멧 속을 빙빙 돌고 있었다로 읽었다. 시인은 그게 벌인지 무엇인지는 확신하질 못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벌’이라고 했지만 다음 구절에서 “벌 같은 것”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 시는 “하얀 해”라는 이름의 오토바이를 갖고 있으며, “경주용 헬멧을 쓰고” 그것을 탄 채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도시를 온통 쏘다”니는 나와 내가 벗어놓은 “경주용 헬멧”에 들어가 그 곳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이제 제 무덤이 될지도 모를 헬멧 속을 “미친 듯이 빙빙 돌”고 있는 벌 한 마리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니 당연히 둘은 같은 운명에 묶이게 된다.
다시 말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도 오토바이를 탄 나는 그 속도의 세상에 갇힌 운명이 된다. 빠르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탄 채 빠른 속도로 도시를 누비는 나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헬멧 속에 들어간 뒤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벌과 같은 운명일 수 있다. 벌의 경우엔 헬멧 속에 갇힌 운명이 분명하게 보이지만 다만 나는 갇혀 있으면서도 내 운명을 보질 못한다.
시인이 내게 속삭인다. 당신의 자유가 당신을 가두고 있을 수 있어. 그 자유가 속도일 때는 더더욱 그럴 수 있어. 자유를 속도에서 구하면 오히려 그 속도에 포박된다. 하지만 그러긴 힘들 것 같다. 나는 운전 면허가 없어서 오토바이가 있어도 몰고 다닐 수가 없거든. 당분간 나는 운전면허가 없어 오히려 자유다. 시인은 때로 자유로운 것들을 가두고 자유롭지 못했던 것들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2018년 6월 16일)
(인용한 시는 이수명 시집, 『물류창고』, 문학과지성사, 2018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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