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을 때 가장 당혹스러운 경우가 시를 읽고 나서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라는 느낌이 들 때이다. 시인 송승언의 시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도 처음에 읽으면 그런 느낌이 드는 시의 하나이다. 때문에 이런 시를 읽을 때는 시의 언어 하나하나에 좀더 섬세하게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시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하는 당혹감 속에서 우리 감각의 포충망을 벗어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언젠가 우리는 극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부분
“만날 수도 있겠지”라고 했으니 아직 둘은 만나지 않은 상태이다. 둘은 아는 사이도 아니다. 시인이 “너는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모르는 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둘은 “각자의 연인”까지 있는 몸이다.
그런데 시는 중간부터 좀 이상하다. 서로 각자의 연인과 들어와서 서로를 모르는채 영화를 보는데도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영화를 보면 함께 봐도 함께 본다는 느낌을 갖기 어렵다. 말하자면 우리는 함께 보면서도 각자 본다. 그런데도 시인은 모르는 사이의 사람들과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뭔가 의심스럽다.
정말 둘은 모르는 사이였을까. 나의 의심은 더 깊어진다.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볼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영화가 “우리가 함께 본 적이 있는” 영화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구절도 나의 의심을 더욱 부채질하기에 충분하다. 서로 모르는 사이의 둘이 영화를 봤는데 “우리가 잊힌 시간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은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 모른체 하고 있는 사이이거나 아니면 원래 알던 사이였으나 잊혀진 사이이다. 둘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 영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영화가 눈에 들어오질 않고 잊혀진 서로에게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선 “영화가 뭘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는 채” 앗, 쟤가 그때 내가 사귀었던 그 애 아냐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시인은 분명 처음에는 “각자의 연인에게 보호받으며” 둘이 짝을 맞추어 극장을 들어갔다고 했으나 이제는 “너와 나는 혼자 나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잊혀진 과거의 사이가 현재의 사이를 잠시 갈라놓은 것이다. 둘은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며” 영화가 끝난 “텅 빈 극장의 내부를 보게 된다.” 서로를 찾고 있음이 분명하다. 잊혀진 과거도 서로 잠깐 스치는 순간만으로 순식간에 되살아날 수 있다.
처음 읽을 때,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라고 읽혔던 시가, 의심에 의심을 키우며 들여다 보았더니, 확실히 달리 읽혔다. 사람들이 남의 과거를 캐면서 즐거워하는 이유가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때로 의구심이 시의 재미를 불러다준다.
(2015년 3월 20일)
(인용한 시는 송승언 시집, 『철과 오크』, 문학과지성사, 2015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