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자 시인인 안성호는 내가 시는 읽기가 너무 어렵다고 투덜거리자 시는 이렇게 읽으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가을 볕에 시를 말린 후 담벼락에 탁탁 쳐서 무거운 건 털어내고, 다시 물 2리터 정도에 시집을 넣은 뒤 3시간 정도 끓이고, 그 다음에 베란다에서 말려 읽으면 읽을만 합니다. 붙어 있는 ‘간신히’들만 봐도… 소설은 베개속으로 넣고, 성경은 도배지로…ㅋ
—내가 올린 페이스북 포스팅에 달린 안성호의 댓글
그는 우선 가을볕에 시를 잘 말리라고 했다. 말리면 건조된다. 그러니 일단 시를 잘 말리란 것은 시에 너무 감상적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소리일 것이다. 우리는 시에 대해선 거의 무조건적으로 감상적 태도를 갖곤 한다.
그런 태도를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러고 나면 시에서 재미난 구석들이 눈에 띌 수 있다. 특히 담벼락에 탁탁 치면 무거운 것을 털어내기에 아주 좋다고 했다. 하지만 시를 그렇게 가볍게 재미 위주로 읽으면 그것도 또 문제이다.
그는 그래서인지 다시 물 2리터 정도에 시집을 넣고 3시간 정도 끓이라고 했다. 시에서 감성을 빼라고 한 것은 감성이 시에 대한 독해를 그르치는 그릇된 습관으로 작용할 때가 많으니 그것을 경계하란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시를 읽으려면 감성이 필요하다. 그 감성은 자기 감성일 필요가 있다. 물을 넣고 다시 끓이는 것은 고등학교에서 수험 공부할 때처럼 시의 감성을 일률적으로 강요받던 차원에서 벗어나 스스로에게 맞는 감성으로 요리해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에는 그것을 베란다에서 말려서 읽으라고 했다. 감성은 뜨겁게 끓어오를 수 있다. 너무 뜨겁게 읽으면 혓바닥 덴다. 말려서 읽으라고 한 것은 그 우려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엔 시란 그렇게 읽어도 간신이 읽힌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아니 그럼 여전히 어려운 거잖어. 친절한 척 하더니 결국 시를 쉽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기운다. 아울러 그는 요즘 소설만 써서 그런지 소설에 대한 사랑이 깊다. 소설을 배갯속으로 넣으라고 하고 있으니. 베고 잠들면 세상 사람들의 꿈이 될 것이다. 성경은 더하다. 도배지로 쓰라고 했다. 그러면 집의 골격이 얇은 종이 한장으로 유지될 것이다. 얇은 믿음에 기대어 우리가 산다는 착각을 성경은 가능하게 한다. 난 시하고 소설까지만 가고 도배지는 도배할 사람에게 맡길 생각이다.
그나저나 어느 시를 말리고, 끓이고, 다시 말린 뒤 간신히 읽어볼까나.
(2014년 1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