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가 무릎으로 보일 때 — 조연호의 시 「귀축(鬼畜)의 말이 우리를 의붓되게 하는 자로서」

시인 조연호의 시 「귀축(鬼畜)의 말이 우리를 의붓되게 하는 자로서」는 제목이 아주 길다. 그 긴 제목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부모는 일기에 나에 대해 더러운 말을 쓰고 잤다

시작은 어려움이 없다. 더러운 말은 제목에 쓰인 ‘귀축의 말’ 그러니까 야만적이고 잔인한 짐승같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 문구는 곧바로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비벼 끈 무릎에 다시 불을 넣고

이 구절은 무릎 대신 담배를 집어 넣으면 아주 평이한 문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비벼 끈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고 라는 문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담배의 자리에 무릎을 집어 넣은 것일까. 나는 시인의 눈에 담배가 무릎으로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구절하고도 연결이 잘 된다. 부모가 일기에 자신에 대해 안좋은 얘기를 적어놓은 것을 읽었다면 담배 한 대 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비벼 끈 담배가 눈에 띄었다. 비벼 끄면서 담배는 무릎처럼 구부러져 있을 수 있다. 순간 시인의 눈에는 담배가 무릎으로 보였다. 부모의 일기를 봤을 때 마치 무릎에 담배를 비벼끈 듯한 느낌을 가졌을 수 있고, 그 느낌이 담배에 겹친 결과였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 이 싯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구절 하나를 쉽게 해결했다고 그 다음 구절이 쉽게 풀리는 것은 아니다. 이 한 구절의 해결이 나머지 부분을 풀어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렇게 생각하면 다음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어떤가. 시가 무지 난해하긴 하지만 읽는게 재미나지 않은가. 난해한 시는 해독하려 들지 말고 재미나게 읽을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좋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이제 다음 구절로 넘어가보자.

돌아가는 팽이의 눈을 생월생시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있다

무슨 말인지 쉽게 와닿지 않는다. 이럴 때는 이게 무슨 뜻인가를 묻지 말자. 나는 이럴 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를 궁금해 한다. 내 경우에는 태어난 날만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사람을 생각했다. 이전 구절과 잇는다면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를 생각하면서 머리가 어지러워진 사람이다. 바로 부모의 일기를 본 시인 자신이다. 내가 품은 궁금증과 그에 대한 답은 이 구절을 이전 구절과 이어준다. 시인은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써놓은 부모의 일기를 보았고, 그래서 피우다가 재떨이에 구겨놓은 담배에 다시 불을 붙여 입에 물었으며, 나는 도대체 왜 낳으신 건가하고 생각으로 머리속에 어지러워졌다. 시는 이렇게 읽힌다.
이제 다음 구절도 해명이 된다. 다음 구절은 이렇다.

머리가 부서진 작은 기독상(基督像)을 암수로 나눠 품고
밤의 무익함을 익충의 길이로 재 보는 것에게도 악명은 있다

기독상은 그리스도상이다. 머리가 부서진 것은 화가 나서 부셔뜨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부셔뜨리고 나서 부서진 몸을 안아주었나 보다. 그리스도는 남자이지만 그 순간 머리가 부서진 기독상은 암수로 나뉘어 몸은 여자가 된다. 익충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곤충이다. 부모의 일기에 화가 난 사람에게 밤은 무익하다. 밤이 화를 푸는데 도움이 안되는 상황이었나보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밤이기에 어떻게든 잠을 자는 것으로 그 분노를 잠시 무마시킬 수 있다. 그것이 밤이 가진 유익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분노는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밤의 악명이 된다. 나는 그런 복잡한 심경이 이 구절에 뒤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음 구절로 넘어간다.

진리 같은 걸 생각하면 살에서는 젖은 깔개 냄새가 났다
그들 역시 종형제(從兄弟)된 자의 외로운 설득에 들떠 있었다
하상(上殤)의 머리를 뚜껑으로 막아 놓고 창밖이
내 안의 벙어리와 귀머거리를 만지도록 허락한다
물체가 입을 열면 청지기들이 울 것이다

진리는 옳은 방향을 알려주지만 우리 몸이 항상 진리의 방향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살에서 “젖은 깔개 냄새”가 나는 이유일 것이다. 별로 좋은 냄새는 아닐 것이다. 부모의 일기를 보고 기분이 상한 자식의 반응은 몸의 반응이 먼저일 것이며 그 반응이 좋을 수는 없다.
그런데 왜 부모는 일기에 자식에 대한 안좋은 얘기를 쓴 것일까. “그들 역시 종형제(從兄弟)된 자의 외로운 설득에 들떠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종형제는 사촌관계인 형과 아우이다. 형제들 사이에 자식 자랑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상은 여덟 살에서 열세 살 사이의 나이에 일찍 죽은 사람을 뜻한다. 아마도 시인의 형제 중에 그런 자식이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죽은 아이가 더 뛰어났다면 부모에겐 아쉬움이 되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형제 아이가 생각나는 것을 억누르면서 벙어리와 귀머거리 심정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밤이라서 세상은 고요하다. 청지기들은 문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시인은 “물체가 입을 열면 청지기들이 울 것”이라고 한다. 물체들의 얘기가 청지기들도 울릴만한 얘기란 뜻으로 들린다. 감정이라곤 하나도 없어보이는 세상의 물체들도 시인의 심정에 동정을 할 것 같은 느낌의 밤이었나 보다.

내 솜씨는 나를 또 한 번 손에 이어 붙이는 것이 고작이지만
죽은 자의 솜씨는 신을 평면으로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엄마는 다른 남자에게 나에 대한 더러운 고백을 하고 잤다
태풍이 오고 이미 온 것이 이미 오고 있다고
각 문마다 적령기를 가르치던 일
헛걸음과 헛걸음 사이 근육이 생긴 여자애들은
개미굴을 쑤시고 태풍이 오고
땅거미가 덧문 밖에 많이도 쏟기던 해를 그냥 지나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의붓되게 하는 자로서 한 조각의 별이 더 얇은 천으로 의붓되리라
하지만 내게 달린 여성은 아주 작아서 버려야 할 신체조차 되지 못한다

‘나’와 ‘죽은 자’의 비교가 나오고 있다. 죽은 자는 아마도 어린 나이에 죽은 그 형제일 것이다. 둘이 갖고 있던 솜씨는 “나를 또 한 번 손에 이어 붙이는 것”과 “신을 평면으로 만드는 것”이다. 둘 다 짐작이 가질 않지만 시인은 그 솜씨에 모두 ‘고작’이라는 부사를 붙여놓고 있다. 둘다 별것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심부름 잘하던 아이와 성화를 잘 그리던 아이를 생각했다.
시인은 “엄마는 다른 남자에게 나에 대한 더러운 고백을 하고 잤다”고 말한다. “더러운 고백”이 무엇이었을까. 시는 아이에게 폭풍의 시기가 닥쳤음을 암시한다. 아이는 남자였지만 여자의 성향을 지녔다. 나는 그게 엄마의 “더러운 고백”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한 때 우리는 생물학적 남자에 내재한 여성성을 더러운 것으로 치부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고백에는 시인과 죽은 아이와의 비교가 곁들여 졌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의붓의식을 불러온다. 의붓자식은 자식이면서도 자식이 아닌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것을 의붓의식이라고 부른다면 시인은 “의붓되게 하는 자”의 의식을 갖고 있다. 그 시기를 시인은 “땅거미가 덧문 밖에 많이도 쏟기던 해를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고” “한 조각의 별이 더 얇은 천으로 의붓”될 듯한 시기였다고 말한다. 나는 이를 덧문 밖이 밝아도 아이의 마음은 어두웠고, 사람들이 별을 보며 희망을 말하지만 덮고 잘 수 있는 얇은 천조각 만큼도 위로가 되지 못하던 시절로 읽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부모는 일기에 내가 한 짓을 숫자로 적어 두고
점점 복잡해지는 수식을 풀기 위해 주무시지 않고 계셨다
똥내 나는 바닷가 혹은 푸른 결혼 뒤
당신은 음료를 들고 와 목마름에 정당해졌다
다음 숫자엔 태풍이 오고
머리는 가로세로 없는 추락을 시작합니다

부모가 일기에 숫자로 적어둔 시인이 한 짓은 아마도 시인의 학교 성적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개 부모에게 아이는 학교 성적으로 판단이 된다. 그리고 다음에는 잘살고 못살고를 수치화하여 사람을 판단한다. 전세와 월세는 수치화된 삶의 성적이 된다. 자식이 취직하여 타오는 월급도 수치화된 삶의 성적이다. 아마도 부모들은 음료를 사들고 와서 그런 얘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듣는 자식은 방향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나의 전신(全身)이 영혼 위로 떨어지고 있으니
두 눈이 무두질하는 먼 곳이 털과 기름으로 뽑히고 있으니
다음 역(驛)을 참으며 충치를 흔들었다
낭떠러지 가까이 육고기가 나를 찌르는 병원을 기다렸다
—조연호, 「귀축(鬼畜)의 말이 우리를 의붓되게 하는 자로서」 이상 전문

시작은 부모의 일기와 자식에 대한 태도였다. 그 일기와 부모의 태도를 마주하고 살아야 하는 시인의 심정은 시의 주내용을 이룬다. 그 심정은 시의 마지막에서 극에 달한다. 시인은 “전신(全身)이 영혼 위로 떨어지고 있”는 심정이라고 말한다. 영혼이 먼저 바닥으로 추락하여 몸의 추락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영혼만 추락하는 경우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무두질은 가죽을 매만져서 부드럽게 만드는 일이지만 여기선 가죽에서 “털과 기름”을 뽑아내는 일이다. 눈에 그런 살기가 가득차 있는 상태라는 뜻으로 읽힌다. “다음 역(驛)을 참으며 충치를 흔들었다”는 구절은 다음 역까지 흔들리는 충치를 참았다가 정상적인 순서이다. 말이 뒤엉킬 정도로 충치의 고통이 심한 상황이다. 시인은 그런 고통의 와중에 있다. 그 고통은 충치라는 병으로 인한 고통이지만 동시에 그 통증은 마음의 상처로 받은 고통을 동시에 대변한다. 시인은 아마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치료라고 하지 않고 “낭떠러지 가까이 육고기가 나를 찌르는” 행위로 보고 있다. 치료는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시킨다. 왜 치료마저 고통이 된 것일까. 그것이 부모의 일기로 촉발하여 시인이 겪게 된 오늘이다.
사실 우리의 사회에서 한 때 부모는 자식들을 모두 학교 성적이나 경제적 성공, 돈많고 권력있는 직업으로 비교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키웠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상처였다. 시인은 그 비교를 짐승의 말로 본다. 그리고 그 짐승의 말은 자식이면서 우리가 정말 그들의 자식이었는가를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에는 그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연호의 시를 읽는 일이 쉽지는 않다. 처음에는 재미나다고 시작했으나 시의 마지막에 가선 심각해졌다. 어렵고 난해한 시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사실 그의 시가 우리로부터 멀리 있지는 않다. 시인이 말한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겪은 상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4년 6월 6일)
(인용한 시는 조연호 시집, 『암흑향』, 민음사, 2014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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