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들이 있는 오래 전의 과거 — 이성복의 시 「누이여, 그날 우리가 탄 배는」

시인 이성복의 시 「누이여, 그날 우리가 탄 배는」은 “그해 늦은 봄, 저수지 옆 방갈로에서 일박”했다는 기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 구절이 이어진다.

모닥불 위로 날리던 기십만 개의 별들.
—이성복, 「누이여, 그날 우리가 탄 배는」 부분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밤을 보냈으며, 모닥불 위로는 “기십만 개의 별들”이 날리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별들이 날렸을 리는 없다. 날린 것은 모닥불의 불꽃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둘을 분리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그 밤은 모닥불이 날아올라 하늘의 별들이 되었던 밤이다. 모닥불과 별이 그 아득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분리되지 않는 밤이 있다. 시인에게는 그 밤이 그런 밤이었던 셈이다.
그 밤에 시인은 “밤새 뻐꾸기 울음” 소리를 들었다. 그 ‘울음’은 “내 팔뚝에 木船(목선)의 그림자 같은 문신을 새”겼다는 것이 시인의 또다른 기억이다. 나무배의 그림자라고 했으니 아마도 나무배는 물 위에 떠 있었을 것이고 그 그림자는 물속으로 내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새겨진 문신이라면 몸 깊숙이 새겨진 문신임에 틀림없다. 그 문신은 팔뚝에 새겨졌다. 나는 방갈로에서 누이가 시인의 팔뚝을 배고 잠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인은 팔뚝을 배고잔 누이 얘기는 쏙 빼고 뻐꾸기 울음 소리가 새겨졌다고 말을 달리한다.
왜 말을 바꾼 것일까. 시인은 팔뚝을 볼 때마다 그곳에 새겨진 문신을 본다. 목선의 그림자처럼 깊게 새겨진 그 밤의 뻐꾸기 울음 소리이다. 때로 어떤 존재가 그날 함께 했던 것과 동시에 새겨질 때가 있다. 존재는 존재만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함께 했던 밤을 통채로 새겨놓는다. 그 밤의 뻐꾸기 울음 소리도 사실은 문신으로 새겨진 그 밤의 여러가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시인의 팔뚝에는 뻐꾸기 울음 소리 뿐만이 아니라 사실 그 밤의 모든 것이 통채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뻐꾸기 울음 소리는 그 모든 것을 환기시키는 문신일 뿐이다.
다음 날 아침 방갈로를 나온 시인은 수많은 원추리 꽃을 보았다. 그 아침을 가리켜 시인은 “아침엔 그 많은 원추리 꽃들 어디서 네 눈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고 말한다. 원추리 꽃은 모두 눈이 된다. 그리고 시인은 그 꽃들 사이에 누이의 눈이기도 한 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문장은 앞뒤를 맞추기가 어렵다.
왜 꽃은 눈이 되었을까. 밤을 함께 보내고 나면 다음 날, 세상의 꽃들을 모두 눈으로 바꾸어놓는 존재가 있다. 그렇게 어떤 존재는 밤을 함께 보내고 나면 이 세상의 모두가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꽃이 된다. 시인은 그 존재를 경험한 것이다.
그 경험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도 지배한다. “지금도 뻐꾸기 울면 정신 나간 내 팔은 노 젓는 시늉을 하고, 누이여, 그날 우리가 탄 배는 윙윙대는 원추리 별들 사이로 조심조심 나아간다. 밤새 잃어버린 네 눈을 찾아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밤새 누이와 지냈지만 밤새 누이의 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이상하다. 밤새 같이 지냈는데 어떻게 누이의 눈을 잃어버렸을 수가 있을까.
나는 그 밤새의 밤이 그 날의 밤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밤은 이제 과거가 아니라 현재,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밤이다. 그 날의 밤은 뻐꾸기가 울면 지금도 팔이 노젓는 시늉을 할 정도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오늘의 밤에 누이의 눈은 더 이상 없다. 우리는 살면서 눈을 잃는다. 눈을 잃은 우리는 더 이상 눈을 맞출 수가 없다. 시인은 그때의 과거로 돌아간다. 잃어버린 눈이 그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연유로 시인이 누이의 눈을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그 밤은 과거의 그 밤이 아니라 오늘의 밤이다.
우리도 때로 과거로 돌아가볼 일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도 살다가 누군가의 눈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내가 잃어버린 누군가의 눈은 어느 해 여름의 바닷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밤새 파도 소리가 들리던 충남 태안의 바닷가였다. 가게 되면 아마도 그때 잃어버린 그녀의 눈을 찾아 조심조심 바닷가 모래밭으로 나아갈 것이다. 부디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4년 5월 1일)
(인용한 시구절은 이성복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열림원, 2003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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