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민경이 그의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에 새겨놓은 시인의 말에 의하면 시는 시인에게서 떨어져 나온 시인의 분신 같은 것들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자신의 시를 읽게 될 독자를 염두에 둔 듯 이렇게 말한다.
내 글을 마주하고 있는 낯설고 반가운 어깨.
감히
머리를 기댄다.
— 「시인의 말」 부분
그렇다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에게 기댈 어깨를 내주는 일이기도 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시인에게 어깨를 내주다니. 시를 읽는다는 것이 아주 괜찮은 일이란 느낌이 드는 순간이다.
시인과 공감을 나눈 첫순간은 느닷없는 구절에서 왔다. 「부케」라는 시에서 만난 구절이다.
방귀만 뀌어도 열광하는 저 청정기
— 「부케」 부분
우리 집에도 공기청정기가 하나 있다. 정말 청정기 옆에서 방귀를 뀌면 아무리 몰래 냄새 없이 분사를 해도 갑자기 청정기가 빠른 속도로 팬을 돌리며 비상사태라도 난 듯 호들갑을 떨곤 한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김치 냄새가 원인이다. 그러나 커피를 내릴 때는 전혀 반응이 없다. 마치 눈을 감고 커피향을 음미라도 하는 양 조용하기만 하다. 청정기를 두고 겪은 그간의 경험으로 뜻하지 않은 공감의 시간을 가졌다. 나의 머릿속 생각을 엿본듯 어깨에 기댄 시인이 킥킥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시는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곤 한다. 그것이 시를 읽을 때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가령 멀미는 차나 배를 탔을 때 어지러움을 느끼는 증상을 말하며 대체로 원인은 귀에서 몸의 균형 감각을 담당하는 반고리관이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년은 점을 치는 항해사였다」는 시를 읽다보면 멀미의 원인에 대한 다른 견해를 듣게 된다. 시인은 “확신을 잃어버린 위와 아래”가 멀미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멀미가 심하면 구토를 한다. 위와 아래가 확신을 잃고 사람을 뒤집어 놓은 순간이다. 사람이 거꾸로 뒤집혔는데 구토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멀미는 위와 아래가 확신을 잃고 흔들리거나 뒤집힐 때 일어나는 증상이다.
시를 읽다보면 오해도 발생한다. 가령 권민경의 시 중에선 「오이 우유」가 그렇다. 나는 제목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오이 우유도 다 있나. 딸기 우유나 바나나 우유는 들어봤어도 오이 우유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시를 읽는다. 시인이 말한다.
일곱 살 때 스스로 글을 발견했다네
오이 우유
봐 나 오이랑 우유를 썼어!!
부모는 신경쓰지 않았다
— 「오이 우유」 부분
아, 이런! 오이 우유가 오이가 들어간 우유가 아니라 따로따로 쓴 오이와 우유를 가리키는 글자였다. 시인이 그 ‘오이 우유’가 “동그라미와 작대기로만 만들어진 글씨”라고 알려준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가끔 제목을 보며 말을 오해하지만 시를 읽어가며 오해를 푼다. 어디 오해만 풀릴 뿐인가. 재미도 얻는다. 시인은 “오이란 글자에선 순이 돋아난다”고 말한다. 글자에서 순이 돋을리가 있겠는가. 처음에는 오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글자만 배웠겠지만 어느 날 오이순을 보게 된 것이리라. 글자로 처음 왔던 오이에 순이 돋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신기했을까.
시집을 계속 읽어가다 「플라잉 월렌다스」라는 시에 이른다. 시인은 주를 달아 플라잉 월렌다스가 “공중곡예로 유명한 가족 서커스단”이라고 알려준다. 가족 서커스단이니 월렌다스는 월렌다 가족이 된다. 이를 모두 합쳐서 이해를 구하면 서커스단의 이름은 날아다니는 월렌다 가족이 된다.
우리는 진화론을 배우며 용불용설이란 것을 배웠다. 우리의 몸에서 많이 쓰는 부분이 발전이 되며, 이렇게 발전된 부분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손가락 중에서도 집게손가락을 많이 써서 집게손가락이 유난히 길어졌다면 그 특징이 그대로 나의 자식 세대에게 전달이 된다는 것이다.
서커스는 곡예가 아니다. 시인은 그것에서 진화를 본다. 그 때문에 권민경의 시 속에선 서커스의 단원이 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날개가 있는 종으로 진화중이야
— 「플라잉 월렌다스」 부분
다만 “우리의 진화는 너무 더뎌”서 아직 날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 그럴까. 오랫 동안 공중곡예를 하면 공중을 날 수 있는 종으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일까. 시를 읽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실 예의없는 짓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진화는 가끔 곡예를 하다 떨어져 죽기도 하는 위험으로부터 곡예사를 지켜주고 싶은 시인의 아름다운 마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일은 참 좋다. 시집을 모두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해되지 않으면 지나치고 이해되면 그것으로 좋다. 마치 쌓아놓은 곶감 상자 속에서 곶감을 하나씩 빼먹는 일과 같다. 권민경의 시집 속에서 그렇게 곶감 네 개를 빼먹었다.
(인용한 시는 권민경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문학동네, 2018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