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문성해는 그의 시 「벤치」에서 “나는 앉아 있었죠/더럽고 낡은 벤치 위에”라고 말한다. 시의 첫구절을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앗, 나도 가끔 벤치에 앉아 쉰 적이 있는데. 더럽다면 옆으로 피했을 수도 있지만 그냥 벤치에 앉아보았던 경험은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을 경험이다. 시인은 또 말한다. “벤치는 잠깐 머무는 곳/집이 아니므로/나는 어제의 누군가처럼 잠시 앉아/멍하니 호숫가 백조들을 바라보았죠”라고. 나는 또 생각한다. 앗, 나도 올림픽공원에 가면 호숫가 벤치에 앉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왜가리들을 바라보며 잠시 시간을 보낼 때가 있는데. 올림픽공원이 찾는 사람들 많은 곳이니 이 경험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가졌을 경험이다.
시가 우리들의 경험과 매우 유사한 경험을 내비칠 때의 미덕은 시를 우리의 곁으로 아주 가까이 당겨준다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시와 밀착된다. 그러면 시는 바로 우리 곁의 것이 된다. 모를 것이 하나도 없을 듯한 나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에선 그 세상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 친숙하던 공간에서 우리가 한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 열리기 때문이다. 문성해의 시에서 그 풍경은 시인이 벤치에 앉아 가끔 호수의 백조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연유를 들려줄 때 우리 앞에 열린다. 시인에 의하면 그 연유는 “호수는 이 공원의 가장 깊은 악보”이고, “백조는 이 공원의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기 때문이었다. 시인이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면 우리는 다음에 호숫가에 가서 벤치에 앉았을 때 그동안 호수와 백조만 보고 돌아오던 시간에 더하여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오는 시간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더 놀라운 것은 사실은 우리가 앉아서 쉬는 벤치이다. 시인은 우리가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사실 우리들이 벤치가 읽어가는 책의 한 페이지가 된다고 말한다. 시인은 시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그가 말한 “더럽고 낡은 벤치”에 사실은 “어느 해 겨울/부랑자 하나”가 “서표처럼 꽂혀 있”었으며, 그 벤치에는 “그의 두꺼운 외투와 내용을 알 수 없는 보퉁이들도” 함께 놓여 있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벤치에서 지낼 때 벤치가 그를 “읽어 내려갔”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해 겨울 이곳의 주인이고 살림이고 체온이었던 그”는 사실은 “오래 펼쳐진 채 잠과 침과 얼룩으로 두툼해진/그의 페이지들”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내가 살아온 인생사를 펼쳐놓으면 책 서너권으로도 모자란다고.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인생사가 그렇게 책이 되진 않는다는 것을. 책은 커녕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들어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벤치는 그렇지 않다. 그곳에 앉거나 눕는 사람들의 인생사를 묵묵히 들어준다. 아니 시인에 의하면 읽어준다. 시인도 바로 그 순간의 경험을 갖는다.
악보도 선율도 어둠 속으로 스러지면
읽히지 않으려 서둘러 떠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들었죠
조용히 나의 한 페이지가 넘겨지는 소리를
—문성해, 「벤치」 부분
사람들은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벤치는 우리가 떠나고 나면 텅비는 것을. 우리의 이야기는 벤치의 어느 구석에도 흔적하나 남기지 못하는 것을. 그러나 시인의 생각은 우리와는 다르다. 시인은 우리가 그렇게 앉았다 가면 그 벤치가 “두툼한 우편번호 책처럼 펼쳐진” 책이 된다고 말한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읽어주는 이도 있다는 것이다. “아주 가끔씩 독서광인 나비가 앉았다” 간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그 책을 누가 읽어주는지 알게 된다.
벤치에서 쉬다 오는 시간이 그냥 쉬는 시간이 아닐 수 있다. 나비가 가끔씩 찾아와 읽고갈 나의 책 한 권을 오래 시간에 걸쳐 벤치에 남기는 일일 수도 있다. 나비는 예민해서 아무 책이나 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이 풍기는 향기는 누구보다 더 잘 알아볼지도 모른다. 나비는 누추하게 보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향기를 맡아내고 가장 뛰어난 후각 세포로 우리가 벤치에 남긴 책을 읽어주는 가장 매력적인 ‘독서광’일 수도 있다.
(인용한 시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7년 9, 10월호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