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숲은 대낮에도 어두울 때가 많습니다.
나뭇잎이 무성하면 햇볕도 나무 꼭대기에서 맴돌뿐
숲길까지 내려오질 못하거든요.
어릴 때,
내가 자란 고향 영월 문곡리의 동네산들은
대부분 헐벗은 민둥산이었지만
한번은 정말 나무가 빽빽한
근처의 다른 동네산으로 올라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한낮인데도 정말 어둡더군요.
그 어둠 때문에 한참 산을 올라가다
갑자기 길을 잃은 듯한 당혹감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허둥지둥 산을 내려와 버렸지요.
숲을 빠져나오니 아직 빛은 부시도록 지천이었습니다.
겨울에 산에 가면 그렇질 않습니다.
잎을 모두 털어낸 나무들이 가지 사이를 훤하게 비우고 있고,
그 사이로 햇볕이 줄줄이 쏟아져 내리지요.
그래서 여름엔 산에 가면
나무가 나뭇잎으로 눈을 가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모른 척 하는 것 같은데
겨울엔 산에 가면
나무가 눈을 가리긴 해도
손가락 사이를 벌릴만큼 다 벌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엿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래도 할 짓은 다 하지만요.
겨울산은 빛이 풍성한 건 좋은데
사생활 보호가 안된다는 거, 그건 좀 안좋습니다.
2월 10일, 계룡산에 갔을 때도
잠시 숲길에 앉아 쉬고 있을 때면
나무들이 일제히 나를 내려다 보고 있더군요.
짐짓 모른 척, 손으로 눈을 가린 듯 했으나
손가락을 벌릴만큼 벌리고 나를 엿보는 건 여전했습니다.
나도 짐짓 모른 척, 보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었습니다.
6 thoughts on “겨울산의 나무들”
두번째 사진의 파란 하늘에 흡입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높고 색바랜 코발트 불루 겨울 하늘하고 헨델의 라르고가 어울릴까요……
이 날은 산의 중간에 올랐을 때부터 하늘이 파랗게 벗겨지더군요.
산에 가서 뭔 짓 했는데?
내가 실례^^한 것 밖에 없는 것 같은디…ㅎㅎ
나도 가끔 실례하거든.
겨울산을 가니 하늘을 맘껏 볼 수 있어 좋더라.
여름산은 나무를 실컷 보고 오는 것 같어.
겨울산은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데
여름산은 길을 잃기가 쉬워.
나무가 빽빽하면 어디가 어딘지 분간도 안가거든.
여름산엔 꽃이 많아서 그게 좋지.
근데 여름엔 벌레도 많고 뱀도 있고.
겨울엔 그런거 없어서 좋아. 추워서 탈이지만.
난 옛날에 겨울산 아주 좋아했어.
벌레없고 뱀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