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설악산 걸음은 한계령에서 시작되었다.
몇번 속초를 내려간 적은 있었으나 항상 설악산은 먼발치에서 내 시선을 채워준 것이 인연의 전부였다.
그러다 나는 올해는 꼭 설악산의 대청봉에 올라보겠다는 막연한 결심같은 것을 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10월 15일 토요일날 아침 5시 30분에 집을 나서 동서울 터미널에서 한계령가는 6시 28분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중간 정도 사람들이 차 있었다.
한계령에 도착한 것은 9시 30분쯤이었으며,
내가 끝청, 중청, 대청봉을 거쳐 오색의 남설악으로 내려왔을 때는 시계가 저녁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산술적으로 꼽아보니 9시간을 걸은 것이었다.
환한 아침 햇볕 속에서 시작했던 설악이
완전히 칠흑의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나무는 하늘을 향하여 뻗어나간다.
꽃이 없었던 나무는 아마도 단풍에 그의 마음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하늘이 나무의 마음을 받아주었을까.
가끔 하늘이 뚝뚝 흘리는 가을 빗줄기는
나무의 마음에 감동한 하늘의 감격인지도 모른다.
옛 영화의 추억.
붉고 노란 열정은 살아있는 나무들의 몫이지만
그러나 죽어서 영영 그 속에 몸을 세우고 세월에 그슬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높은 산마루를 쳐다보며
구름도 쉬어넘는다고 하는 얘기는 잘못된 말이다.
설악에선 구름이 아래쪽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얘기다.
잎을 모두 떨군 나무는 또 그것대로 아름답다.
단풍은 하늘에 받치는 것이었지만
단풍이 떨어지고 나면 그때부터 나무는
온몸으로 하늘을 호흡하며 겨울을 넘긴다.
이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긴다면
그 앞에 장미를 내밀 것이 아니라
단풍이 익을 때쯤 그녀를 데리고 산으로 가라.
그리고 그 붉은 단풍을 일년내내 그녀를 바라보며 농익은 당신의 마음이라고 말하라.
덧붙여 당신의 마음이 그처럼 붉지 않았다면
단풍도 없었을 것이라고 박박우기라.
그렇게 해도 그녀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내비친다면
당신의 마음 속에 박힌 그녀의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어 말하라.
그때 당신을 만났을 때, 이쪽의 한잎이 물들고,
저때 당신을 만났을 때, 또 저쪽 끝의 한잎이 물들고.
그렇게 그녀에 대한 당신의 하루하루가 쌓여
오늘에 이르렇기에 이제 이 계절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듯이
당신들 둘의 사이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이라고 강변하라.
성공이야 보장 못하지만 잘만되면
설악이 단풍에 물들 때 당신들은 사랑에 물들 수 있다.
설악산의 다람쥐는 이상하게 사람들을 겁내지 않았다.
바로 코앞까지 와서 포즈를 취해준 다람쥐도 있었다.
사람들이 내민 사과 조각을 넙죽 받아갖고 좋아라고 뛰어가는 다람쥐도 보았다.
나무도 세파를 겪는다.
보시라.
허리가 휘었지 않은가.
왜 우리 땅을 가리켜 화려강산이라고 하는지 충분히 알만하다.
우리의 자연은 너무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하다.
그런 땅에 사는 것도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설악은 하늘과 구름을 담은 커다란 그릇이 되었다.
그러니까 설악에 오른 사람들은 하늘과 구름 위로 오른 셈이다.
설악을 오르면서 만나는 그 거대한 바위들이 빚어내는 형상은
그것이 우연히 형성된 자연의 결과라고는 믿기질 않는다.
게다가 하늘과 구름, 그리고 계절에 따라
그 느낌을 달리하고 있으므로
어찌보면 설악은 살아있는 작품인 셈이다.
구름이 마치 낙인찍듯 제 그림자를 산자락의 위로 끌고 간다.
산이 고개를 들고 1년 365일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줄 알았는데
정작 실제로는 하늘이 산을 사랑했는가 보다.
구름과 그 그림자는 하늘이 내려보낸 마음인 듯 보였다.
붉다라는 것은 얼마나 가슴뛰는 색깔인가.
나무 한그루가 등을 굽혀 문을 만들어주었다.
그가 등을 굽히지 않았으면 그냥 평범한 길로 흘렀을 길이
그가 등을 굽히자 산으로 가는 문이 되었다.
세상의 문이 된다는 것은 알고 보면
길에서 등을 굽혀 자신을 낮추고
사람들을 그 안으로 맞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시 설악은 이곳을 지나던 구름이 내려앉아
가부좌를 튼채 굳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저 위가 바로 대청봉.
구름이 먼저 대청봉에 올라있었다.
나의 걸음은 더디고 느렸으므로
먼저간 구름을 탓할 수는 없었다.
대청이 보이자 곧바로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대청봉에 다녀왔다는 명백한 증거.
1708미터를 가리키는 숫자가 분명하게 보인다.
63빌딩이 249미터라고 하니까
그것의 7배 높이에 오른 셈이다.
오색으로 내려가는 길에 내내 쓰레기를 주으며 내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함자를 물었더니 권자 주자 연자라고 하셨다.
권주연씨의 올해 연세는 69세이며, 안동분이다.
경북가스전문검사소의 대표이사이시다.
“이렇게 주으며 내려가도 봉지 하나가 안되요. 그런데 설악은 좀 쓰레기가 많네요”라고 말씀하셨다.
쓰레기 가운데는 특히 사탕을 쌌던
작은 비닐 껍데기들이 많았는데
권주연씨는 “이건 주머니에 넣어갖고 내려가도 무겁지도 않은데”라고
혼잣말을 했다.
설악의 단풍이 아름답기는 해도
그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울 때가 종종 있다.
산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지켜가려는 사람의 마음은
자연보다 더 아름답다.
설악의 단풍은 이제 아래쪽까지 내려와 있다.
그 붉은 정취를 맛보고 싶다면
한두 시간 산행을 한 뒤 단풍에 취했다가 내려오면 된다.
저녁 햇살이 길게 꼬리를 끌며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곱게 물든 단풍 위에 어른거렸다.
6 thoughts on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다”
설악의 풍경이 참 근사하네요.
새벽 버스여행, 저도 한 번 저질러 보고 싶은데요.
저는 가끔 가죠.
보통 다섯시쯤 일어나서 나갑니다.
그때쯤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더라구요.
아니면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밤 10시나 11시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면 다음날 새벽 4시나 5시쯤 남해안에 떨어져요. 먹는 거는 과일이나 떡을 싸서 갖고 다니며 해결합니다. 물론 점심 한끼는 먹어야 하구요. 거의 교통비가 모든 걸 다 잡아 먹습니다. 요즘은 카메라 둘러메고 그렇게 혼자 여행할 때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아..정말 아름답네요. 아니 단순히 아름답단말로는 안되겠어요. 장엄하달까?^^
동해가 바라보이는 굽이굽이가 직접보면 가슴벅찰것같은..
전 언제 설악산에 갈수있을까요.
그래도 살아있는한 꼭 가볼래요.
제가 지금까지 가본 산중에서 가장 높은산이 소백산이에요.^^
저도 설악산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정말 좋더라구요.
그런데 만만하질 않아요. 어느 등산 코스를 선택해도 10시간은 잡아야 하는 것 같아요.
사실 한 3시간 정도 걸은 뒤에 이제 내려가는 코스가 나타나면 내려가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내려가는 길이 절대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정상까지 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때까지 올라온 길을 내려간다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거든요.
일단 어느 봉만이라도 올라간 산을 치면 저는 태백산, 지리산, 한라산, 그리고 이번의 설악산을 올라가 본 것인데 정말이지 설악산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더군요.
산에 가서 사진을 1000장을 찍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나중에는 날이 저물어서 결국 카메라를 거둘 수밖에 없었지만 아쉽게 그냥 지나쳐온 풍경도 많았어요.
그걸 찍었다면 아마 조난 뉴스에 나왔을 거예요.
‘요즘은 카메라 둘러메고 그렇게 혼자 여행할 때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 ㅡㅡ;; 넘 부러워요.
저도 40대 후반쯤엔 그런 여유 가질수 있었음 좋겠어요.
중년의 여행은 좀더 느긋하고 차분하고 생각이 많아질것같아요.
맞는 말씀이예요.
나이드는게 생각처럼 그렇게 나쁜 건 아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