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고궁이라도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오후 두 시를 넘긴 관계로
화양리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으로 향하고 말았다.
그곳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와 있었다.
이제 또 일이 시작되었으니
한동안은 집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여름내내 분수의 느낌은 언제나 예외없이 시원함이었다.
하지만 가을이 오면 분수는 여름의 느낌을 거둔다.
계절은 가을꽃이나 하늘빛에만 스미는 것이 아니라
분수의 물줄기에도 스민다.
아마 겨울에도 분수가 솟는다면
그 느낌은 분명 겨울에 침윤되어 스산하기만 하리라.
계절은 분수의 느낌을 바꾸고,
또 아이들의 복장을 바꾼다.
여름내 짧은 팔과 짧은 바지로 분수가 흩뿌리던 물알갱이를 쫓아다녔던 아이들은
이제 서서히 긴팔과 긴바지로 겨울 채비를 시작하고 있다.
둘 사이의 대화가 건조하다고 생각된다면
어디 가까운 공원을 찾아
단풍이 곱게 물든 은행나무를 찾아내고
그 밑에 자리를 잡아볼 일이다.
금새 대화가 노란빛으로 물들 것이다.
여름은 꽉찬 계절이다.
나뭇잎의 무성한 진초록이 틈새없이 가리고 있던 하늘을 생각하면
여름이 어떻게 꽉차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가을은 틈새의 계절이다.
나무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뚫린다.
충만이 사라지면서 한편으로 슬프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하늘을 호흡할 수 있는 숨구멍이 뚫린다.
그러고 보면 가을은 슬픈 호흡인 셈이다.
대공원의 가을은 수세미가 익어가는 계절
단풍은 저 혼자 빨갛다.
나는 단풍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생각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밑에 있노라니
내가 그 빛에 물들 것 같다.
노랗게 물든 단풍을 한참 동안 올려보다가
그 노란빛의 경쾌함 때문에
잎들이 모두 일제히 날개짓을 치며 하늘로 날아오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잎들은 예외없이 하늘대신 지상으로 한두 잎씩 조용히 내려앉았다.
우리는 어릴 때 노랗고,
젊을 때 붉은 열정으로 타는데,
나무들은 꼭 때늦은 가을녁에
노란빛이고 붉은 빛이다.
분수들이 나란히 서서 물줄기를 뿜어올린다.
나무들은 나란히 서서 가을빛에 물들어간다.
숲속에선 오늘도 농구 골대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둘이 눈을 맞추고 이렇게 보낸 시간을 손에 꼽아보면
아득하기만 하리라.
그 아득한 시간이 중첩되면서
그들 사이의 정도 들대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숲을 찾아 그들 사이에서 공을 튀기며 오가기 시작하면
둘은 또다시 서로를 보고 으르렁대는 맞수가 되고 만다.
여름에 신나던 그 농구장의 풍경이
가을엔 슬퍼보인다.
노란 바다, 하얀 섬
낙엽아, 낙엽아, 너는 어찌 그리 색깔이 곱니?
그 고운 네 색깔은 어디서 얻어온 거니?
–바로 내가 몸을 눕힌 이 땅에서요.
땅의 그 거무칙칙한 색깔을 보면 낙엽의 대답이 믿기질 않았다.
낙엽의 대답이 사실이라면
어떠한 삶도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있다.
날이 저물고 있다.
오늘 붉은 황혼은 하늘을 내려와
길가에 버려진 낙엽에 내려앉았다.
2 thoughts on “어린이 대공원에서 가을을 산책하다”
스무살무렵 가보고 그 이후론 못가봤네요.
저 분수대 보니까 그때 생각이 하나 둘 떠오르네요.^^
그럼 스무살 때는 서울에 사셨는가 보네요.
사실 분수대 저렇게 한방에 모두 찍기가 어려운데 이번에 10-20mm 렌즈를 하나 장만하는 바람에 시원하게 모두 담을 수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