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같은 여자, 허공같은 여자

Photo by Kim Dong Won
2001년 4월 20일, 나의 그녀와 나는 강화도의 한 해변에 있었다


글은 차폐된 공간으로 나를 가둔다. 나는 글을 통하여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글 속으로 들어갈 때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글로 세상에 대해 담을 쌓는다. 그러나 그 차폐된 글의 공간 속에서 나는 언어를 들이마시며 오히려 자유를 느낀다. 어찌 나뿐이랴. 나는 물고기에게서도 같은 모습을 본다. 물고기는 아가미로 물속을 자유롭게 호흡하며 돌아다닌다. 나는 물고기처럼 글 속의 언어를 호흡하며 정신의 심해를 유영한다. 그 심해를 벗어나 뭍으로 올라오면 나는 너무 숨이 막히다. 가슴이 답답하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나는 글의 경계를 이탈했을 때 내가 물을 벗어난 물고기라고 느낀다.
물은 차폐된 공간이다. 물고기는 그래서 물을 떠나지 못한다. 어쩌다 뭍으로 올라온 고기들은 금방 숨이 막히며 지천으로 널려있는 산소 알갱이들은 그들의 가슴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을 막는다. 그러나 물 속에 있을 때 물고기는 그 속에 녹아있는 공기를 호흡한다. 뭍의 네발 짐승들은 아무리 물 속으로 코를 들이박아도 그 속의 공기 한톨을 얻을 수가 없다. 아가미는 물고기들이 물에 녹아있는 산소 알갱이를 걸러마시는 막이며, 짐승들의 코에 방불한다. 우리가 빨대를 우유와 쥬스에 꽂으면 그 희거나 노란 액체가 통채로 목구멍을 넘어가지만 물고기가 물 속에서 아가미를 열면 그 속의 산소 알갱이만이 허파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우리들에게 차폐된 공간, 코를 들이밀면 숨을 막는 그 물의 공간이 물고기들에게 자유의 공간이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아가미라는 유다른 호흡 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허공은 추락의 공간이다. 아득한 절벽의 꼭대기에서 밑을 향하여 몸을 날리는 순간 우리들의 몸은 바람의 부력을 타고 가볍게 날아올라 허공을 비상하며 지상의 중력에 발목묶였던 그간의 질곡을 벗어던지고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곧장 수직으로 추락하여 목숨을 지상에 묻고서야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추락의 공간이 새들에겐 자유의 공간이다. 새들은 지상에 있을 때 오히려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뒤뚱거리며 불편한 몸짓이 된다.
아가미를 가지고 날개를 가진 나는 한동안 지상을 살아가지 않고 물속을 유영하거나 공중을 비행하며 자유로이 헤엄치고 날아다니던 몸이었다. 나는 그 자유의 공간 속에서 남들이 가슴 답답해하고 추락의 비운을 맛볼 때 오히려 언어의 아름다움이 주는 신선한 바람을 호흡하며 청량감을 맛보았고 그 자유속에서 행복했다.
그 속에서 내가 만난 그대는 유동액으로 출렁이는 물이었고 빈공간으로 서 있는 허공의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그대 속에서 자유로왔고 그대의 빈 가슴을 날며 거칠 것이 없었다. 아마도 그 시절 다른 이들은 그대 앞에서 힘들었을 것이며, 그대 앞에서 추락하여 몸이 성치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부터 나는 그대를 힘들어했고 그 힘든 순간 그대의 몸을 더듬는 내 손에 묻어난 것은 물을 잃어버린 흙먼지 바람의 뭍이었으며 허공을 잃어버린 지상의 무거운 중력이었다. 그대는 물을 밀어내고 유동의 자유액체를 받치고 있던 그 심해의 토대를 앙상하게 드러냈다. 그대는 허공을 버리고 나의 발목을 그대 지상의 중력으로 무겁게 묶어버렸다. 나는 누구에게나 그대처럼 뭍의 공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대가 물과 허공이었던 시절, 그대는 그대의 뭍을 그 두 공간의 심층 깊은 곳으로 숨겨두고 나의 자유공간을 받쳐주는 물과 허공의 지평만으로 내 앞에 섰던 것이리라. 그때 그 물과 허공의 지평은 내 시야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여 나는 그대에겐 뭍의 공간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물과 허공의 그대는 우리들이 지층의 변화 단계를 거슬러 올라갈 때 너무도 아득하여 상상의 촉수를 뻗어도 잘 감지되지 않는 고생대 쯤의 전설이 되고 말았다.
나는 속박의 지상을 살아간다. 내가 그 지상에서 아직도 살아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가끔 출토되는 아득한 옛시절의 화석들 때문이다. 그 화석의 문양은 이성복의, 오규원의, 황동규의 바다에서 낚아올렸던 물고기의 앙상한 뼈다귀만을 보여줄 뿐이지만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제 기억도 아득한 먼 옛날의 그 시절이 생생하게 고개를 들곤 한다.
그래 나는 한내(대천)로 향하는 어느 여름날의 버스 속에서 그대에게 황동규의 <지하실>을 말하고 있었지. 그 순간은 물론이고 도착할 때까지 내내 그 버스 속은 물결로 출렁거렸어. 어느 날 저녁엔 들뜬 목소리로 그날 마무리지은 백무산을 그대에게 읽어주고 있었지. 그날 그대의 눈엔 눈물이 잡혔어. 그날 나는 원없이 그대의 바다에서 유영했지.
그러나 지금은 다 아득한 전설. 언제부터인가 나는 오늘을 사는 요령에 더욱 눈이 밝아져 체념이란 무기로 나를 방어하며 가끔씩 들여다보는 그 과거를 위안삼아 뜯어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상을 사는 나는 물과 허공의 전설이 다시 도래하길 기다리는 마음 한구석의 희망이 가끔 강하게 고개를 들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면 그때로부터 며칠 동안 하루하루를 넘기기가 힘겹다.
나의 그대여, 물이고 허공이었던 그대여, 내 전설 속의 자유의 공간이여. 그대는 뭍의 중력을 버리고 물을 불러, 허공의 빈 공간을 빚어 나로 하여금 다시금 비상하게 하여다오. 기억이 아득하여 다시금 물에 살고 허공을 난다 해도 그 시절의 호흡법과 날개짓을 기억해낼지 모르겠으나 그 차폐된 공간에서 질식해 죽고, 그 추락의 공간에서 밑으로 쳐박혀 산산이 부서진다해도 난 행복할지니.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