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城砦) 이야기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4월 6일 하남 산곡동의 객산에서


성(城)이란 방어의 상징이다. 방어란 무엇인가 지킬 것이 있다는 얘기. 값지고 귀한 것일수록 성이 갖는 방어의 의미는 빛난다. 그래서 그것 자체 만으로 이미 죽음에 버금가는 침묵을 굳힌 돌들이 겹으로 쌓여 성을 이룬다. 죽어도 길을 열어줄 수 없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성은 더불어 그것에의 유혹을 눈짓하는 이중의 모습을 가진다. 누구나 그 앞에 서면 가슴이 설렌다. 아주 아름답고 소중한 무엇인가가 그 속에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그래서 성을 사이에 두고 빼앗고 빼앗기는 투쟁의 역사가 수없이 반복된 것이리라.
그러나 돌들이 맞물리고 벽돌이 쌓이는 곳에서만 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자신도 하나의 성채가 되곤 한다. 이 지상에선 특히 여자의 육신을 두고 곧잘 성채란 비유가 사용되곤 한다. 어떤 연유로 그와 같은 풍조가 퍼졌는지는 모르지만 여자의 몸은 비밀스런 무엇인가를 지닌 성채이고 아울러 여자는 그 성채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남자는 그것을 무너뜨리는 공격의 상징이다. 그래서 남자에게는 늑대란 널리 인정된 별칭이 무리없이 퍼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 포악한 힘의 횡포 앞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여자는 별 수 없이 여우가 되었으리라.
어떤 계기로 그것이 이루어지는지는 몰라도 두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면 항상 그 육체의 성을 놓고 싱갱이가 벌어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싱갱이는 소설가 이병주의 관찰에 의하면 시나리오를 미리 써놓고 하는 운동경기와 다를 바가 없다. 결국 남자는 승리하게 되있고 여자는 질 각오를 미리하고 그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는 그런 식의 경기란 것이다.
그 싱갱이 끝에 우리들이 대하게 되는 것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나신이며 그 앞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옷을 입었을 땐 상상도 못했던 미학적 세계를 경험한다.
이병주는 그 여인의 나신을 가리켜 지나가는 소나기 줄기를 듬뿍 머금은 여름날의 활엽수라고 했다. 조그마한 충격으로 그런 나무를 툭 건드려 보시라. 기다렸다는 듯이 물방울이 쏟아져 내린다. 그래서 이병주는 두 사람의 남녀가 알몸으로 서로를 품었다고 했을 때 그것이 어느 시기에 이루어졌는가에 상관없이 그건 이미 죄가 아니라고 못박아 버린다.
그러나 우리들의 의식이 첨예하게 그 끝을 가다듬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여인의 나신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 다음 순간부터인 것이다.
이병주의 묘사를 따라가면 그 순간은 이렇다.
남자들의 광폭한 의지의 첨단은 분명 탄력을 가진 최후의 어떤 저항에 부딪친다. 밀면 늘어지는 고무의 촉감같은 그것은 시각화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드디어 한계량을 넘어선 풍선이 탁 터지는 순간이 눈에 보이는 듯하며 그 저항의 벽이 무너졌을 때 여인의 얼굴 위에는 아련하게 우리들의 시선이 머문다. 이병주의 표현에 의하면 입술을 깨물고 숨을 몰아쉰, 혼신의 힘을 다해 고통을 견디는 필사적인 얼굴의 긴장이 ‘으음’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풀어지는 그 순간 여자의 얼굴은 애처로우리 만큼 아름답다.
이병주는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때 비로소 이 우주간(宇宙間)에 있는 하나의 처녀성(處女城)이 스물 몇해를 지켜온 끝에 이제 낙성(落城)을 했다는 실감을 얻어낸다고.
그럼 그렇게 허물고 들어간 육신의 성채 속에서 우리들이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아니 성채를 무너뜨리고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던가. 때로 우리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때로 성채는 무엇 하나 보여주지 않는다. 공허가 여기저기 흩어진 텅텅 빈 성채. 힘들여 허물고 들어간 그 육체의 성 속에서 우리들이 맛보는 것은 광폭하게 지나간 폭풍의 뒤끝에서 폐허가 되버린 마을을 지켜보는 허무. 이병주의 묘사도 결국 그 끝이 허무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는 말한다. 취한 듯 빠져들며 육신의 성채를 무너뜨리던 그 짧은 시간의 열정이 말끔히 씻기고 회복된 의식 속에서 한 때 광폭했던 의지의 첨단을 내려보는 것은 또한 얼마나 허망한 노릇이었던가 라고.
육체의 성 속엔 아무 것도 없다. 뭔가 신비스럽고 아름답고 영롱하도록 맑고 고운 것에 대한 기대로 우리들이 찾아들어간 육체의 성 속엔 아무 것도 없다. 있었다고 해도 순간을 채우다 사라지는 것들에 불과하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갖지 못한다.
굳이 그것을 모험스런 객기를 부려 경험할 필요는 없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리라.
봄날에 산천으로 나가보면 우리를 반기는 꽃들의 미소는 진달래 줄기에서 가장 먼저 피어난다. 그 향기를 가까이 하고 귀를 모으면 진달래가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밀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진달래의 진홍빛 아름다움은 그 비밀이 나무 줄기에 있지 않다. 육신의 성채를 무너뜨리 듯 그 줄기를 꺾기는 쉬운 일. 우리들의 손은 그같은 충동에 약하다. 우리들의 폭력 앞에 그 나약한 줄기는 금새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진 아름다움이 하룬들 갈 것인가. 그것은 이내 시들어 떨어지고 주름진 얼굴로 일그러진다. 채 몇 시간이 안되어 핏기를 잃는다.
육신의 성채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있어도 순간을 채우다 사라질 뿐. 그것은 여인에게서나 꽃에서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결국 허무한 공허를 좇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란 말인가. 진달래나 여인의 아름다움이 한갖된 순간의 만족, 그뿐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한 방울 눈물
그대 몰래 쏟아 버린 눈물 중의
가장 진홍빛 슬픔
땅 속 깊이 깊이 스몄다가
사월에 다시 일어섰네

나는 누구신가 버린 피 한 점
이 강물 저 강물 바닥에 누워
바람에 사철 씻기고 씻기다
그 옛적 하늘 냄새
햇빛 냄새에 눈떴네

달래 달래 진달래
온 산천에 활짝 진달래
—강은교(姜恩喬), 「진달래」 전문

진달래이다. 그 진홍빛 아름다움이 그대로 눈에 선하게 밀려온다. 시인은 분명 한움큼도 더되는 진달래를 꺾어 백지 위에 노래로 엮어놓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이 꺾여져 백지 위에 오른 진달래가 시들지 않고 있으니.
아마도 자연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쌓아올리는 성채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인가보다. 그 하나는 육신의 성채. 그 성채 속에 자라는 아름다움은 한번 꺾여지면 그뿐으로 언제나 뒷끝으로 남기느니 공허감. 또 하나는 영혼의 성채. 육신은 사라져도 남는다는 바로 그 영혼. 그래서 영혼의 성채 속에 간직된 아름다움은 한번 피어나면 영원히 우리들과 함께하는 미(美)의 세계가 된다. 아마도 시인이 꺾어온 진달래는 그 영혼의 성채 속에서 얻어온 것이 분명하리라.
육신의 성채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은 육신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우리들은 사랑이라 불러주지 않는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탐닉, 말을 바꾸자면 바로 육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질 뿐이다. 마치 진달래를 줄기채 꺾어든 철없는 사람에게 쏟아지는 질시의 경멸처럼.
진달래의 줄기는 어느 누구나 꺾을 수 있다. 육신의 성채 또한 어느 누구나 허물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성채는 어떠한가. 시인이 얻어온 진달래의 아름다움은 쉽사리 얻어지지 않는다. 향기 맡기 힘들다. 아마도 우리들 가슴에 사랑이 맑고 투명하게 영굴어 있을 때만 그것이 가능하리라. 그때는 이미 진달래가 사라진 지 오래인 한겨울 속에 있어도 우리들의 가슴으로 활짝 핀 진달래가 언제나 함께하는 신비의 세계를 살 수 있다.
나는 이 밤 너를 품는다. 백지에 시를 적던 시인의 마음으로 너를 품는다. 어쩔 수 없이 한 편의 시가 산천에서 자라나다 결국은 속절없이 스러질 진달래 줄기에서 피어날 수밖에 없듯이, 나의 사랑 또한 너의 존재로부터 피어날 수 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한번 피어나면 그 존재가 내 곁에서 멀리 떨어져 비록 두 눈으로 볼 수 없어도 언제나 함께하는 하나의 아름다움이듯 그렇게 너를 품는다.
너는 영혼의 문을 열고 나를 반기는 그 아름다운 성채(城砦)의 주인, 바로 시인(詩人)이다.

4 thoughts on “성채(城砦) 이야기

  1. 어머 그 사이에 사진을 바꾸신 듯해요…
    철쭉도 나름대로의 영혼의 성채를 입혀 주면 되는걸요
    제가 입혀 줄까요?
    전 동원님의 진달래 좋은 사진 많이 보고
    또 제가 담아와서 다 진달래로 보였거든요
    미국의 진달래 사진 보았는데…암술 수술이 종 같았어요
    역시 우리 진달래가 예뻐요
    저 르네마그리뜨의 Collective invention이란 그림 보면서
    육체의 성채..영혼의 성채에 대해 시 하나 지금 막 썼거든요
    다리는 여인이고…얼굴은 물고기인…
    인어공주와는 음~다르죠…
    동원님이 읽으시면 쬐금 수준 미달일 것 같은데
    제 의도 같이 매끄럽지 못하네요
    강은교 시인님의 시와 수필 좋아해요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은 학교 때 즐겨 읽었는데
    촛불집회 때문에 다시 꺼내 읽게 되네요

    촛불 사진과 글들…
    제 친구들은 왜 촛불집회 하냐고 해요
    저는 조선 중앙일보 읽는데…ㅜㅜ
    눈 먼 우리 세대에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어서 감사해요
    우리의 시민정신 대단하죠?
    피곤 하실텐데..건강관리 잘 하셔요…

    참 CD는 담주에 꼭 보내 드릴께요..넘 죄송해요~~~

    1. 예, 사진은 바꿨어요.
      이 사진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저도 집에 강은교 시인의 초기 시집인 소리집이 있어요.
      근데 사실 시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좀 난해하지만 경쾌하고 발랄한 시들을 좋아해요. 읽기는 어렵지만 재미난 게 아주 많거든요. 그거 어떻게 보고 읽어야 할지 난감할 때도 많았는데 이번 촛불 집회보면서 그곳에 나온 젊은 사람들 보니까 좀 감이 잡히더라구요.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어떻게 보면 과격할 수 있는 견해들도 마다않고 귀를 기울여 주시니까요.

      CD는 아내가 좋아할 거 같아요. 아내는 교회에 잘 나가고 있거든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2. 동원님이 봄에 올렸던 진달래 꽃들 사진과
    제가 좋아하는 강은교 시인의 눈빛과
    하늘냄새…햇빛냄새에 다시 눈뜰 진달래의 영혼이
    모두 하나의 성채로 다가 오는 아름다운 초여름 날…
    시인은 이런 신비의 세계에서 살기에
    그 가슴에 남이 볼 수 없는 눈을 달고 살아야 하나 봐요

    가스통 바슐라르가
    “촛불은 혼자 꿈꾸는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라고 했는데
    요즈음 촛불이 아름다운 영혼의 성채인 듯…
    촛농이 눈물이 되어 흐르지만, 세상을 밝히는 꿈의 눈물이었으면…!!!

    1. 최근에 들어와 꽃과 나무, 풀들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한 마음이예요.
      작은 것들이 감각을 일깨우는 삶은 참 설레임이 커요.

      저 위의 꽃은 진달래가 아니라 철쭉이어서 아무래도 교체를 해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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