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용목은 그의 시 「하루치의 나」에서 이렇게 말한다.
보았어요, 밤새 거울을 닦는 어둠의 손
아무도 믿지 않지만
—신용목, 「하루치의 나」 부분
깜깜하면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대체로 우리의 생각은 그렇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밤에 “밤새 거울을 닦는 어둠의 손”을 보았다고 한다. 문제는 시인의 얘기를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인은 “보았어요”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또 저런다!”거나 “좀 그만해!”라는 역정으로 나타난다.
나는 신용목이 어둠 속에서도 세상을 훤하게 살펴볼 수 있는 적외선 투시 안구의 독특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의 눈은 우리와 똑같을 것이며 때문에 그도 어둠 속에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시인이 어둠 속에서 실제로 무엇을 보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나는 동시에 시인이 본 것을 믿는다.
내 말은 앞뒤가 맞질 않는다. 시인이 무엇을 보았다고 생각지 않는다면서 무엇을 보았다는 시인의 말을 믿는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입장을 이렇게 방어하려 한다. 나는 시인이 어둠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두울 때 우리의 앞에 어둠 하나만큼은 지천이다. 나는 시인이 본 것이 바로 그 지천인 어둠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둠 속에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시인은 어둠 속에선 어둠을 보는 사람들이다. 어둠의 손은 까매서 오히려 어둠 속에서 더욱 확연하다. 시인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밤에/어제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웃음이 약한 불 위에서 끓는 죽처럼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내가 상상한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생각에 잠겨 어제 거울을 보고 웃고 있던 자신의 한 순간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시인이었다. 아마도 시인이 내가 생각한 것처럼 말했다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언어는 모두가 알아듣기는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새롭게 열어주진 못한다. 그와 달리 시인의 언어는 아무도 믿지 못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어제의 웃음을 그 속으로 불러내 들여다볼 수 있는 신비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어둠이 시인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둠은 그것이 눈앞에 아무리 많고 깊어도 사람들은 어둠을 보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둠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할 뿐이다. 아무리 시를 써도 시를 모르겠다는 사람들의 푸념은 눈앞에 어둠을 두고도 어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실과 많이 닮아있다.
시인은 어둠을 “가난한 어둠”이라고 말하고 있다. 깊은 어둠을 가졌으나 어둠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하는 어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빛이 있을 때 세상 만물은 모두 스스로를 가질 수 있다. 나무는 나무가 되고, 꽃은 꽃이 된다. 스스로를 가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빛속의 세상 만물은 모두 가난하진 않다. 그러나 어둠은 스스로를 가질 수가 없다. 사람들이 어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인도 그렇지 않을까. 열심히 시를 쓰지만 사람들은 도대체 시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그냥 시인이 말하는대로 받아들이질 못한다. 시는 곧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를 보질 못하니 시인은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시인은 깊은 어둠으로 우리들 앞에 서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어둠처럼 스스로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시인도 가난하다.
“좀 그만해! ”라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알아 듣지도 못하는 시좀 그만 쓰라는 “모두의 역정이 어제의 나를/자꾸 굶겨서/말라비틀어진 잠과 말라비틀어진 꿈”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시인의 하루하루가 아닌가 싶다. 어둠도 처지가 비슷해서 “오늘밤 어둠은 빈손으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말라비틀어진 채.”
아니,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시의 제목이 「하루치의 나」이고, 시를 읽어보면 그 하루가 어제 하루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누군가의 역정을 만난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시의 제목이 매일매일의 나가 되었다면 시인도 삶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비록 어둠과 만찬을 나누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어둠이 그냥 돌아간 것은 아니다. 시인은 또 “보았어요”라고 말한다. “꿈을 세제로 풀어 내 몸을 돌려 닦다가 문득 내 텅 빈 머리를 헹궈/물을 받아서는/벌컥벌컥 배를 채우고, 남은 물을 아무렇게나//개수대에 버리고, 내 머리를 몸 위에 가지런히 엎어두고 가는/가난한 어둠을.” 설마 그런 일이야 있었겠는가. 나는 아주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시에 대한 사람들의 몰이해 앞에서 밥맛이 없어진 시인이 하루 굶기는 했지만 밤이 되었을 때 불도 안켜고 머리를 감았으며, 그 다음에는 물을 한 컵 마셨다고. 물론 시는 그 순간을 같은 처지의 어둠이 모두 감당해 준 것으로 전하고 있다. 나는 시의 그 말 또한 믿는다.
내가 시를 말하면서 인용한 구절은 시의 중간 부분에 있는 구절이다. 내겐 그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어둠이 거울을 닦아주고 갔으니 최소한 사람들에겐 시가 읽히지 않을지 몰라도 시인에겐 자신이 더욱 잘 보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마도 시를 쓰며 살아가는 삶이 힘들어질 때도 시인 자신이 스스로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은 되지만 시인이 스스로에게 기대면서 시는 더 잘 쓸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시인이 “보았어요”라며 그가 본 것을 말할 때,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또 저런다!”거나 “좀 그만해!”라는 말은 절대로 삼가는 정도이다. 시인은 사람들의 말을 이탤릭체, 즉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내게는 그게 사람들의 말에 실린 삐딱한 심사를 반영한 시인의 작은 저항 같이 느껴졌다. 좀 더 적극적으로 시인의 편에 서고자 한다면 밤을 기다렸다 시인이 말한 그 어둠을 만나보는 것이 아주 좋을 것이다. 나도 그리 해볼 생각이다. 오늘 밤엔 밤이 와도 불을 켜지 말아야 겠다.
(인용한 시는『포지션』, 2022, 봄호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