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무브먼트 당당의 공연 <울분>을 봤다. 15일과 16일 이틀에 걸쳐 두 번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 장소는 서울시청의 지하에 자리한 바스락홀이었다. 나는 16일의 공연을 예약했다. 공연장에서 아는 얼굴을 넷이나 만났다. 둘은 예상한 얼굴이었으나 둘은 뜻밖의 얼굴이었다. 광화문역에서 내려 공연장까지 걸어갔다. 아는 이 중 한 명은 시청역에서 내려 걸어왔는데 역에서 공연장까지 상당히 먼 느낌이었다고 했다. 모두 앞줄에 나란히 앉아서 공연을 봤다.
공연은 이 공연을 다큐퍼포먼스라고 안내했다. 공연이 담겨 있을 형식이 궁금했다. 나는 연극이 펼쳐치고 마치 다큐처럼 내레이션이 따라붙는 형식을 상상했다. 아니었다. 배우들이 간간히 행위극을 펼쳤고, 암을 앓으며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지에 화가 났었다는 아주머니, 코인으로 대박난 친구에게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화가 나곤 했었다는 젊은이, 한국인의 독특한 증후군인 홧병에 대해 설명을 해준 정신과 의사, 결혼 생활에서 겪은 분노를 털어놓은 아주머니, 사회의 온갖 피해자들이 겪는 분노의 경험을 전한 인권 변호사가 차례로 나와 우리 사회의 울분에 대해 얘기했다. 행위극과 일반인들의 얘기가 교차되며 울분의 지형도를 완성해갔다. 일반인들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자신의 경험을 말했고, 배우들은 울분을 몸짓으로 형상화했다.
배우들은 얼굴을 가리고 나와 행위극을 펼쳤다. 분노는 나를 표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분노의 표정으로 나를 덮어버린다는 뜻일까. 그 때문에 분노할 때 사실은 우리가 자신의 표정을 잃게 된다는 뜻일까. 배우들의 손에는 자바라가 들려있었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분노였다. 분노는 수축과 팽창을 거듭했다. 수축할 때는 눌러담긴 분노가 보였고, 늘어나 길게 확대될 때는 폭발하는 분노가 보였다.
분노는 얇은 비닐로 변신을 하기도 했다. 분노는 우리를 가두는 두터운 벽 같지만 사실은 비닐처럼 얇은 막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뜻인 것일까. 비닐 속에서 주먹질을 하자 비닐이 배우의 몸에 휘감겼다. 분노가 내 안의 화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는 구속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지막에 배우들이 둘과 셋으로 짝을 지어 서로를 부등켜 안았다. 분노의 연대 같았다. 분노가 연대를 하자 더 큰 분노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끼어들 수 없는 밀착된 인간관계를 낳았다.
공연을 같이 본 일행 중 한 명이 울었다. 슬픈 내용들이 많았다. 분노가 피해자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가 분노하지 못하고 그 분노를 안으로 삭혀야 하는 삶을 감내해야 할 때가 많은 것이 우리의 사회였다.
배우 중에 아는 배우가 있었다. 키가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우월한 키의 소유자였나 싶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배우 김현아이다. 가까이 올 때마다 자꾸 웃음이 났다. 연극에 대한 몰입에 방해를 받았지만 이건 또 아는 배우가 있는 자가 누리는 특권이기도 하다. 공연의 내밀한 비밀 하나를 알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의 복장 때문에 우리는 공연이 끝나고 만났을 때 그를 파란 양말이라 불렀다. 사실 우리는 사석에서 항상 그 배우를 대배우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을 개배우라 칭했다. 개띠이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무대 인사 시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배우들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었다. 힘껏 박수쳐 주었다.
공연 끝나고 공연장에서 느닷없이 일행이 된 아는 사람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3차를 거듭한 끝에 겨우 마무리를 한 술자리를 털어냈을 때 시간은 새벽 두 시가 넘어가 있었다. 거리에서 너는 저쪽으로 나는 이쪽으로 방향을 달리하며 헤어져야 했다. 나는 25분을 기다려 밤버스를 탔다. 어제에서 오늘로 건너온 시간이 그 늦은 시간에 밤버스를 내게 데려다 주었고, 밤버스는 나를 싣고 집으로 달려갔다. 술에 취해 졸면서 간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그 시간의 상당 부분은 간만에 본 공연의 감흥으로 채워져 있었다. 졸음과 감흥이 뒤섞이는 나를 싣고 버스가 깊은 밤을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