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무브먼트 당당의 쇼케이스 공연 <눈을 감으면>을 보았다. 대학로의 예술청 프로젝트홀에서 있었다. 예술청은 옛날에 동숭아트센터라고 불리던 건물이었다. 공연은 2022년 12월 18일 저녁 8시에 시작되었다.
사람들을 맞은 무대엔 길처럼 길게 펼쳐진 하얀 천 위에 원경 스님의 책자 <못다 부른 노래>가 놓여있었다. 공연을 보면 원경 스님이 박헌영의 아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 아들에게는 혼외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낙인처럼 따라 붙는다. 책의 제목 못다 부른 노래는 <부용산>이다. 극중에서 녹음된 목소리로 스님이 부르는 <부용산>이 흐른다. <부용산>은 지리산으로 숨어든 빨치산들이 즐겨부른 노래였다고 한다. 원경 스님은 한때 그 빨치산 중의 한 명이기도 했다.
배우들이 나와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으로 공연은 시작되었다. 극을 보며 나중에 알게 된다. 모두 다른 이름으로 호명된 그 사람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하나였으나 수많은 이름으로 흩어진 삶을 산 그는 원경 스님이다. 그가 박헌영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극단의 반공체제로 권력을 유지했던 남한 사회에서 그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기구함을 짐작하고도 남게 해준다.
책은 그의 삶이 되고, 흰천은 그가 걸어가야 했던 삶의 길이 된다. 배우들은 차례로 나와 천 위에서 그의 책을 읽는다. 흰천이 접힐 때는 접어버리고 싶었던 그의 삶이 보인다. 천은 얼굴을 천으로 가린 배우가 나와 춤을 출 때는 그의 발밑에서 휘감기고 꼬인다. 그때면 꼬일대로 꼬인 그의 삶이 보인다. 그러나 접히고 꼬이면서도 길은 또 방향을 편다. 그의 삶, 그러니까 그의 삶이 담긴 책자는 처음에는 조금씩 그 길을 앞으로 나서지만, 그러다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고 결국은 길의 끝으로 걸어나와 객석 맨앞줄의 관객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마지막엔 책이 그 길을 이탈하고 화면에서 그가 잠든 곳을 찾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한 구절씩 읽는 장면이 이탈한 책의 뒤를 이어받는다. 그의 삶이 세상 모든 이들과 만나는 순간이다. 길은 그 순간 반으로 접히고 책자는 이제 반으로 접힌 그 길의 안쪽으로 놓인다. 길은 이제 제단이 된다. 제단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이승에 남긴 삶 앞에 술한잔 올리며 경배의 마음을 건네는 자리이다. 길은 공연내내 그의 길이었으나 마지막엔 사람들이 경배를 올릴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공연에 아는 배우가 나왔다. 김현아이다. 대배우라 부르는 우리의 배우이다. 극의 마지막쯤 그가 무대 앞쪽으로 걸어나올 때 눈에 슬픔이 고여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님이 걸었던 한많은 삶이 배우의 눈에서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때로 어떤 이의 삶은 우리의 눈으로 들어와 눈물로 고인다.
아는 이들과 함께 보았다. 우리의 배우와 함께 사진 한 장을 남기는 기쁨이 있었다. 공연도 좋았지만 이런 공연 후의 기쁨 또한 우리의 큰 충만이 된다. 사람들과 술한잔하며 얘기나누고 10시반쯤 자리를 일어섰다. 날씨가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진 추운 날이었다. 날이 그다지 춥지 않게 느껴진 것이 두껍게 껴입은 옷 때문만은 아니었다. 때로 공연의 훈기가 날씨마저 누그러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