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톨렌의 반전

Photo by Kim Dong Won
2022년 12월 20일 우리 집에서
독일빵 슈톨렌

독일빵 슈톨렌이다. 독일에서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올 때 조각으로 잘라서 하루하루 먹으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레임을 누리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멀리 도곡동까지 가서 사가지고 왔다. 가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먹으려고 사온 것은 아니다. 딸이 먹으라고 사왔다.
여기까지만 보면 나는 딸을 위해 멀리까지 가서 독특한 빵을 사서 나른 사려깊고 다정한 아빠가 된다. 하지만 내가 도곡동까지 가서 슈톨렌을 사온데는 이면의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면 사려깊고 다정한 아빠는 사라지고 이 작은 일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된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들어왔을 때 식탁에 빵봉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우리 집에서 빵을 사다 나르는 것은 거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딸이 사온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빵봉지는 여전히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아침에 식탁 위에 놓인 것 중에서 간단하게 무엇인가를 먹곤 하는 나는 그 빵봉지를 열었다. 빵이 두 개 들어있었다. 그래서 그 중의 하나를 먹었다. 그날 재택을 하던 딸이 늦게 방을 나와 빵봉지를 확인하고는 내게 물었다. “아빠가 빵 먹었어?” 그랬다고 했더니 자신이 먹으려고 사온 것이라며 화를 냈다. 신경질이 나서 그 빵이 뭐냐고 묻고는 검색을 한 뒤 도곡동까지 가서 사와서 실컷 드시라고 식탁에 올려놓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버지가 자신이 사온 빵을 먹었다고 신경질내는 싸가지 없는 딸이 보인다. 하지만 딸이 신경질을 낸 이유는 내가 빵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전에 둘이 나눈 말이 씨앗이 되었다. 신경질의 이유를 듣고 나면 다시 이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하루 전에 나는 딸에게 냉장고에 자꾸 야채를 사놓는데 그게 너가 사놓은 것이라서 손을 못대고 있다고 했다. 어쩌다 딸이 늦게 들어와서 뭔가 해먹으려 하는데 사놓은 야채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눈치를 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딸은 사갖고 들어와 식탁에 올려놓은 두 개의 빵 중 하나가 안보이자 내게 그 빵을 먹은게 나냐고 확인을 하고는 내가 한 말을 떠올렸다. 냉장고의 야채는 딸을 생각해서 손을 못댄다고 하면서 크리스마스로 다가가는 날들의 설레임을 하루하루 느끼면서 먹어보려고 사갖고 들어온 특별한 빵은 어떻게 그렇게 낼름 먹어치울 수가 있었냐는 생각이 들면서 그 생각이 신경질로 표출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내가 한 말과 행동 사이의 이율배반이 딸의 신경질을 부른 것이 된다. 사태는 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른 표리부동한 아빠가 된다. 하지만 이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딸이 한 말이 있기 때문이다.
냉장고에 딸이 사둔 야채를 딸이 산 것이라 손을 못대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딸은 그건 모두가 함께 먹으려고 산 것이라고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럼 배추 같은 것은 그냥 씻어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되니 나도 먹을 수 있겠다는 말까지 했다. 내가 한 말과 내 행동만 있고 딸의 말이 없었으면 내가 표리부동한 사람이 되지만 딸의 말은 내가 딸이 사온 빵을 먹을 수 있도록 내 말을 지워버린다. 즉 내가 그런 말을 했어도 다함께 먹으려고 사온 것이라는 딸의 말이 내 말을 지워 딸이 사온 것을 나도 먹을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이다. 말에는 항상 그 말에 걸맞는 행동의 책임이 따르긴 하지만 딸의 말은 내 말에 따라야할 내 행동의 책임을 소거해 버린다. 딸은 내 말만 기억하고 내 말을 지워버린 자신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화가 나서 그 놈의 빵 사다 주면 될 것 아니냐는 심정으로 인터넷을 검색하고 서울에서 그 빵을 잘한다는 다섯 곳을 일일이 살펴본 다음에 월요일에 쉬질 않는 곳을 하나 골라 그 빵을 사왔다.
내가 한 행동이 딸이 먹고 싶은 빵을 내가 먹어치우는 바람에 아쉬웠던 딸의 심정을 헤아린 결과였다면 도곡동까지 가서 사온 슈톨렌은 사려깊고 다정한 아빠의 이미지를 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과적으로는 내 말만 기억하고 자신의 말은 기억하지 못하는 딸의 편향적 기억력에 치밀어 오른 화가 나로 하여금 도곡동으로 나서게 했다.
또 한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냉장고에서 야채가 썩어가는 것을 아까워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야채로 무엇인가를 해먹을 정도로 음식하는 솜씨가 없기 때문에 냉장고에서 야채가 썩어가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질 않는다. 그걸 말한 것은 어머니, 그러니까 딸의 할머니이다. 할머니의 말을 전했는데 딸은 그것을 내 말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다. 심지어 그 말을 할 때 내가 어머니를 불렀고, 딸이 야채를 다 함께 먹으려고 사온 것이라는 사실을 함께 확인했을 정도이다.
내가 상당히 속이 좁다. 딸의 말에 화가 가서 도곡동까지 가서 빵을 사온 것이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가질 행동은 아니다. 이 글도 좁은 속으로 삭히지 못한 나머지 화를 풀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정리하여 기록하고 나면 좀 화가 풀린다. 이것이 어쩌면 글쓰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너의 아빠가 그렇단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