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합창단이 올해를 보내는 송년회 자리를 가졌다. 2022년 12월 28일 수요일에 있었고, 장소는 합창단이 올해 마련한 연습실, 바로 ⟪공간 소선⟫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일찍 나와 청소하고 준비하는 수고와 짐을 져주었다. 어디나 수고하고 짐진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올해 송년회의 사진은 그들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원래 수요일은 이소선합창단의 연습날이다. 연습날에 송년회가 잡히면서 연습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다음 날 일정이 잡힌 연대 공연 때문에 차려놓은 음식을 앞에 놓고 연습을 했다. 연대공연에서 부를 노래를 한번씩 불렀다. 실내에서 듣는 노래는 거리에서 듣는 노래와는 감흥이 다르다. 노래가 나를 파도처럼 뚫고 지나간다는 느낌이 완연하다. 노래가 내 몸을 파고들어 나를 뒤흔든다. 나는 노래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노래가 공명하는 공간이 된다. 실내에서 합창단이 바로 눈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그런 공명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시설 좋은 음향 시설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면 시위를 하는 거리의 노동자들도 합창단의 노래를 실내에서 들을 때와 똑같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연습이 끝나고 음식을 먹었으며, 음식을 먹는 와중에 조추첨이 있었다. 올해의 월드컵은 8개조로 나뉘어 조별 예선을 치루었지만 합창단의 조편성은 3개조로 나뉘어 졌으며 각조는 조별 예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뭉쳐 다른 조와 노래 대결을 했다. 조편성은 각각의 파트를 뒤섞어 3개 조를 마련하는 의식이었다. 단원들이 최선이, 김현아, 신상명조로 명명된 각각의 조로 흩어졌다. 화기애애하던 송년회장의 분위기가 들끓는 승부욕으로 돌변했다. 각 조는 연습실 공간의 여기저기에서 자리를 잡고 연습에 들어갔다.
조별 연습이 끝나고 김종아 대표가 한해를 돌아보는 송년사를 했고, 수고한 단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아울러 잠시 수고한 또다른 사람들에게 상품권을 나누어주는 시간도 있었다. 나도 받았다. 한해 동안 사진을 찍고 기록하느라 수고했다며 봉투를 주었다. 봉투가 너무 두툼해서 이 사람들이 천원권을 넣었나 싶었다. 워낙 유머와 장난기가 넘치는 사람들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봉투 속을 확인하고 크게 놀랐다. 5만원권이 몸을 포개고 있었고 액수가 엄청난 거액이었다. 카메라사는데 보태라는 얘기를 듣고 카메라는 너무 거액인데라는 생각을 했는데 액수를 보니 이해가 되었다.
내게 마이크가 주어져 잠시 이소선합창단의 지나간 송년회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 해 참가한 송년회에서도 조별 노래 경연이 있었는데 합창단 측에서 내게 노래 심사를 해달라고 했었다. 그래서 내가 노래를 모르는데 어떻게 심사를 하느냐고 했더니 사진 잘 나오는 순서로 심사를 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그때의 내 심사에 심각한 폐해가 있었다고 느꼈는지 올해는 내게 심사 의뢰가 전혀 없다고 모두에게 밝혔다.
조별 노래 경연은 신상명조가 첫 순서였다. <천리길>을 불렀다. 두 번째 순서는 김현아조였다. <전태일 추모가>를 불렀다. 이 노래가 흐를 때 단원의 아는 이로 송년회 자리에 함께 한 젊은 친구가 눈물을 흘렸다. 노래는 때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와 감동이 되고, 그 감동이 눈물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세 번째 노래는 최선이조였다. 최선이조는 조추첨 때 너무 합창단의 에이스만 뽑아가서 혹시 이름을 보면서 뽑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최선이조가 부른 노래는 <영원한 노동자>였다.
심사는 각 조가 다른 조의 노래에 200점을 나누어 주고 지휘자 임정현이 300점의 평가를 한 뒤 합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최선이조가 우승했다. 발표 순간 김현아가 벌떡 일어나 난 이 심사 인정할 수 없다고 나왔다. 모두가 하하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합창단 단원들이 내놓은 물품들로 경매 행사를 했다. 경매로 모인 돈은 합창단 운영에 쓰인다고 한다. 가장 고액의 낙찰을 받은 것은 베이스 조종호 단원이 내놓은 서예 작품이었다. 이 사람들이 예술품을 알아본다.
경매 행사가 끝나자 알토 김진영이 앞으로 나와 명사회로 얼굴을 바꾸더니 새로 입단한 단원들의 노래를 이끌어냈다. 그 뒤로 노래는 끝없이 이어졌다. 송연회 술자리는 술이 끝이 없는 편인데 이소선합창단의 송년회에선 술과 함께 노래가 끊이질 않는다. 50년대생, 60년대생, 조씨성의 단원, 부부 단원 등 불러내는 사람들의 구성도 다양하기 이를데 없었다. 나도 60년대생에 빌붙어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다. 우리에게 그것은 “민주주의여 만세”였다.
당혹스러웠던 것은 내게도 혼자 노래를 부르라는 요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건 노래를 죽이는 일이라며 그런 짓은 할 수가 없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죽여라, 죽여라를 연호하여 그날 노래를 죽이는 못된 짓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나는 이번에는 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건 사람들을 고문하는 짓이라며 그런 짓은 할 수 없다고 했다. 합창단은 고문한 번 당해보지 뭐라고 나왔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며 완강한 태도로 마이크를 내 던졌다. 내 강수는 통했다. 더 이상 내게 노래를 시키진 않았다.
신청곡도 받아주었다. 내가 <땅의 사람들>을 청하자 김종아 대표가 나가 그 노래를 불러주었다. 중간에 가사를 잊어버린 김종아는 서비스로 다른 노래 한 곡을 더 불러주었다. 종종 노래는 누가 시작을 하면 조금 뒤에는 모두의 노래가 되어 있었다. 아주 인상적인 순간도 있었다. 소프라노 문유심이 직접 기타를 치며 딸이 쓴 시에 곡을 붙인 자작곡을 부른 순간이었다. 싱어송라이터의 탄생이었다. 초창기에는 지휘자 임정현이 직접 기타 반주를 하며 노래 연습을 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임정현이 기타 반주를 직접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갑자기 합창단의 초기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술자리에선 마지막까지 남는 자가 용자이다. 언제나 그렇듯 용자는 많지 않은 법이다. 나도 이번에는 거의 용자에 끼일 뻔 했으나 그러나 최후의 용자에는 들지 못했다. 송년회를 했다고 합창단의 올해 일정이 모두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바로 다음 날, 합창단은 단식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과의 연대 일정이 있다. 그 일정은 내년에도 계속 될 것이다.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