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하고 사치스럽게

Photo by Kim Dong Won

이때가 우리 딸아이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딸아이가 다니던 천호초등학교는 매년 진달래 축제란 것을 열었다.
그 중의 하나로 학교의 진달래 꽃밭에서 찍은 사진을 모아 전시회를 여는 행사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 사진을 그 전시회에 냈다.
사진을 찍은 날은 2001년 5월 14일이었다.
이미 진달래가 거의 모두 지고난 다음이었다.
아마도 마감 하루 전에 찍었던 기억이다.
집에 놀러온 문지의 친구 한 명은 이 사진을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너, 왜 이런 자세로 찍었어?”
딸아이의 자세는 순전히 나 때문이다.
나는 그 날 딸아이에게 ‘도도한 자세로 찍어’라고 한마디했다.
딸아이가 ‘도도한 자세’라는 내 말을 나름대로 소화한 것이 사진의 자세였다
그러므로 딸아이의 자세엔 “도도하게”라는 내 말이 녹아 있다.
나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딸아이에 녹아들었던 내 말을 함께 들여다보며 흐뭇해 하곤 한다.
가끔 사진 속엔 이렇듯 사진을 찍은 사람이
그 속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알려주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다.
나는 그 비밀을 끄집어내 들여다보는 것이 즐겁다.
이 사진의 비밀은 그 뿐만이 아니다.
딸아이가 입고 있는 옷에도 약간의 사연이 실려있다.
어느 날 나는 딸아이와 함께 천호동의 현대백화점에 들린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자리에 그녀는 없었다.
사실 그날 우리가 사려고 한 것은 이 옷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날 옷파는 매장의 직원은 우리 딸을 보더니 아이가 너무 예쁘다며
그냥 한번 어울리는 옷이 있으니 한번 입혀나 보자고 했다.
나는 옷을 입혀보면 사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말로만 듣던 구매의 충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는 엄청난 가격의 그 옷을 냉큼 사주고 말았다.
그날 저녁 나는 그녀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하지만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의 일탈이 우리 삶의 숨통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때로 그 삶의 숨통을 열어주는 것이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로 쐐기를 박으며,
옷을 바꾸러 가겠다는 그녀의 고집을 단호하게 꺾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도 흔들리는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 옷을 입은 딸아이는 정말 예뻤기 때문이다.
그 옷의 실용성은 정말 형편없었던 기억이다.
전부 합쳐 다섯 번 정도 입고는
다른 아이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실용성이 넘쳐나는 옷들은 기억 속에선 거의 실용성을 찾기 어렵다.
쓸모를 염두에 두고 저렴한 가격으로 무장을 한 것들은
어느 날 조용히 우리에게 와선 우리의 편리를 채워주다 소리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 것들은 기억할만한 자취를 남기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때로 우리에겐 실용성은 없지만 기억에 자취를 남길 사치가 필요하다.
그 사치의 기억은 두고두고 울궈 먹을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며,
내가 흘렸던 어느 날의 말 한 마디와 일탈의 사치를 울궈먹고 있다.

11 thoughts on “도도하고 사치스럽게

  1. 원피스가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럽네요.^^
    저렇게 사진으로 남겨두고 추억할수 있다는것 부럽구요.
    저 어렸을때가 생각나요. 6학년때던가 학교마치고 오는길에 쇼윈도에 걸린 무지 이쁜 원피스를 보고 엄마께 조르고 또 졸라서 기어이 손에 넣었었죠. 그때 돈으로 4만원가량이었으니 무지 비싸서 아빠도 안계신 어려운 형편이었는데도 철없는 딸을위해 큰맘먹고 사주신..레이스가 고급스럽던 공주풍의 원피스..
    근데 정작 너무도 제몸에 꼭 맞아서 이듬해엔 입을수 없었어요.
    제가 젤 이뻐하는 동네 아이에게 주었지요.^^
    엄마도 그때일을 기억하시나 담에 가면 얘기해봐야겠어요.^^

    1. 아이가 영감을 불러일으킬 때가 많아요. 워낙 엉뚱해서. 아이 키우면서 몇가지 후회되는 일이 있었지만 인생이란게 잘못도 하는 거니까…

    2. 조카를 보면 스폰지와도 같이 말이나 행동, 생각들을 바로 흡수하더라구요.
      그런걸 보면 깜짝 놀라요.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란말, 피부로 와닿더라구요.
      하지만 어른도 완벽하지 않은지라 아이가 자라나면서 나보다는 더 나아지길 바라는 것 또한 너무 당연한것 같고…
      조카들이 보고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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