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여행이 종종 분노로부터 시작되곤 했습니다.
살다 보면 싸우지 않을 수 없고,
싸움은 곧잘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번져 나갑니다.
그렇게 하여 어느 날 대천으로 떠났고,
바닷가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 돌아왔습니다.
밤기차를 타고 내려갔던 여수도 그렇게 떠난 곳이었고,
태안의 방포해수욕장을 처음 마주한 것도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대관령의 옛길을 짙은 어둠 속에서 넘은 것도 그 시작은 분노였습니다.
심지어 둘이 떠난 여행도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안고 떠난 위태위태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지난 해 꿈같았던 남해 여행도 알고 보면 그 시작은 불안했고,
선자령으로 함께 떠났던 여행도 떠날 때의 불편한 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 이제 살만큼 산 것 같은데 그래도 싸울 게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난 우리가 한동안 잘 사는 거 같아서
이제 더 이상 무슨 싸울 일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싸움은 우리들이 우리의 자리에서
한치도 물러섬이 없었다는 걸 확인시켜 줍니다.
나는 내 자리에서 꿈을 꾸고,
그녀는 그녀의 자리에서 현실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잠시 숨겨둘 뿐, 자신을 버리진 못합니다.
싸움은 내밀하게 숨겨두었던 서로를 격하게 드러내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 격한 드러남이 야기하는 충돌은
서로에 대한 분노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갑니다.
그 분노는 대단히 무서운 것이어서
둘이 가꾸어왔던 모든 즐거움과 행복을 일순간에 모두 덮어버리고 맙니다.
난 언제나 그랬듯이 그 싸움의 끝에서 일요일날 집을 나왔습니다.
종로를 잠시 떠돌던 난, 결국은 지하철을 타고 수락산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가고 싶어한 곳은 속초쯤이었지만
마이너스로 수치를 불려가고 있는 통장의 잔고가 발목을 잡아
결국 발길은 수락산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 나이에 변한 것 하나 없이 싸운다는 게 놀랍긴 하지만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은
분노로 시작되었던 여행이 항상 그랬듯이
수락산의 중턱쯤 올랐을 때 분노의 절반이 수그러들고,
정상에 올랐을 때쯤에는 분노가 거의 모두 내 몸을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이건 참 신기한 일입니다.
난 이런 것을 자연의 치유력이라 부르곤 했는데
이번처럼 분노가 조금씩 밀려나는 것이
분명하게 체감이 된 경우도 처음인 듯 싶습니다.
난 수락산역에 내려 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정상을 거치고,
그리고는 장암역으로 향하는 가파른 길로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내가 산을 가는 동안,
산은 푸른 나무로, 말없는 바위로, 이마를 스치는 옅은 바람으로,
또 고개를 들었을 땐 구름을 하얗게 뿌려놓은 푸른 하늘로,
혹은 산을 다 내려왔을 즈음에는 계곡을 흘러가는 물소리로
내 안을 밀고 들어와 분노를 모두 밀어내고
내 안을 산으로 그득채웠습니다.
때로 사진을 찍는 행위도 내겐 순수하게 사진을 찍는 행위가 아니라
사실은 분노를 밀어내는 행위일 때가 있었습니다.
여행도, 산행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변하려 하질 않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우선 내 자신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고,
싸우지 않고 잘 참는다고 해도 안으로 분노가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겠지요.
그렇지만 그 분노를 내 안에 쌓아두고는 내 자신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분노가 그득차면 내가 미움으로 들끓기 때문입니다.
미움으로 들끓는 나는 미움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산은 내 안에 그득차면 나를 산으로 들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산처럼 고요해지도록 해줍니다.
나에게 사진은, 산행은, 또 여행은
분노를 내 안에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산을, 바다를 채워줍니다.
살다보면 또 분노가 내 안에 쌓이겠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산은, 바다는, 또 그때 내가 함께 들고가는 카메라는
내 안의 분노를 밀어내줄게 뻔합니다.
일요일에 오르고 내린 수락산에서
내 안의 분노는 조금씩 밀려나더니
집에 올 때쯤 나는 수락산으로 그득했습니다.
4 thoughts on “수락산을 오르며”
저희 부부는 제대로 싸워본적이 없어요.
둘다 기술부족이죠.
싸우긴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모르니 꾹꾹 참고 삼키며 넘어가고 말아요.
그래서 풀수가 없는게 문제가 되어 엄청난 마음을 먹기도 하지요.
조금만 더 거슬려봐. 더는 너랑 안살거야 하면서요..ㅎㅎ
세상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세상은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살아가는 거 같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그냥 삶이 있을 뿐 해결은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동원님께선 산을 오르며 분노가 사라졌지만 포레스트님은 무얼로 푸셨을까 생각하게되네요.
전 좋아하는것을 사던가 맛있는걸 사먹으면 풀리던데.
아, 이건 어딘가 떠날 수 없을때에 긴급처방이에요.
저도 예전에 안면도에서 목까지 화가 치밀었는데 아름답게 지는 낙조에 반해서
화났던게 쉽게 풀리는걸 느끼고 너무 희한했어요.^^
사실 맛있는걸 사먹거나 좋아하는걸 사는건 그때뿐이지 또 금새 생각나는데
자연처럼 마음가득 위안을 주는건 없는듯.^^
삽교호의 바다로 풀었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