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야, 바위야,
누가 입을 굳게 다물어 너의 굳은 침묵이 된 거니.
얼마나 많은 말을 안으로 삼키면
너처럼 굳고 우람한 바위가 되는 거니.
그렇게 안으로 삼키고 삼키다 더 이상 삼킬 수 없으면
드디어 세상으로 굴러
우르르 네 안의 소리를 쏟아내는 거니.
그 위험이 되는 거니.
—
바위에 핀 안스런 꽃아,
무슨 얘기가 그리도 절실해 그 굳은 가슴을 두드렸니.
그래, 그 가슴이 열리긴 열리든.
혹 너의 뿌리는 살기 위한 안간힘이 아니라
바위가 삼킨 얘기를 듣기 위해
그 굳은 속을 파고든 섬세한 청각 세포 같은 것은 아니었니.
혹 그 묵묵하고 아무 말없는 바위도
네가 소중한 건 알고 있었고,
너도 바위의 그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니.
혹 새벽과 늦은 밤으로 바위에 맺히는 이슬 방울이
알고보니 바위가 너를 잃지 않기 위한
안간힘 같은 것은 아니었니.
혹 너의 그 작고 노란 꽃은
바위의 속, 그 깊은 곳의 얘기를 들은 날,
네 얼굴에 번진 미소같은 것은 아니었니.
8 thoughts on “바위와 꽃”
이성복님의 <남해 금산> 시 읽으면,
그 여자 돌에 들어가 있다잖아요.
이 글 읽으니 그 시가 생각나요.
한 번 머릿속에 맴돌면 자꾸만 이렇게 연결돼 끄집어내게돼요.
그 시 다시 읽어보니 여자를 사랑해 돌 속으로 들어갔던 사람이 여자가 떠난 뒤 바닷가에서 혼자 바다에 잠기고 있네요.
갑자기 꽃의 바위는 그가 들어갔던 돌이 아니라 그가 잠겼던 바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생각 끝에서 하나의 글귀를 얻었어요.
그 꽃, 바위의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었네.
동원님이 평론을 할 게 아니라,
시를 직접 적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 무슨 그런 위험한 말씀을.
시인들, 오늘 배꼽 빠지면 어쩌려구.
아, 그리고 제 평론은 시인들이 무지 좋아해요.
그건 좀 잘하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평론이 안 좋단 의미로 해석되어지면 어떡하지?
그런 소심함 고개 내밀며 찾아왔는데, 양호하네요. ^ ^
받은 시집, 동원님 평론까지 다 읽으면 독후감 A4 용지에 적어 제출할께요. (절대 농담임!)
블로그에 올리는 글과 사진으로 대신해 주겠음.
많이 여행다니고, 많이 찍고, 많이 쓰길.
바위위에서도 저렇게 꽃을 피우는데..더 열심히 살아야겠어요.
어제 저녁모임에서 들은 유머들중 한가지.^^
아들: 아빠! 119 전화번호가 뭐예요?
아빠: 114에 물어보면 되잖아!!
ㅋㅋ 넘 썰렁한가?^^
그래도 전 웃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