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그가 그득하다 – 오규원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

Photo by Kim Dong Won


1
어느 날 시인에게 전화가 온다. 눈이 오는 날이었다. 전화는 누군가의 죽음을 시인에게 알리고 있었다.

한 죽음을 불쑥 전화로 내게 안기네
창밖에 띄엄띄엄 보이는 눈송이를 따라 내리다가
내리다가 돌에 얹혔다가 허물어졌다가 마른 풀에 얹혔다가
나뭇가지에 얹혔다가 흙에 얹혔다가 스며들다가
물끄러미 아직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한
내 손을 보네
─「눈송이와 전화」 전문

2007년 2월 3일, 그 날은 바로 이 시 속의 시인이 신문의 어느 한 면에서 자신의 “죽음을 불쑥” 내게 안겼다(실제 사망일은 2월 2일이다). 시인 오규원의 타계 소식이었다. 내가 펼쳐든 신문의 거의 마지막 면에 까만 테두리를 굵게 두른 부고 기사가 있었고, 그의 죽음을 알리는 활자들이 그 안에 모여 있었다. 마치 빈소에 늘어선 화환처럼. 아침 나절이라 창밖에선 여느 때처럼 넝쿨장미 줄기 사이를 비집고 내려온 빛이 마당을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그러다 물끄러미 아직 신문을 내려놓지 못한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이 세상에 더 이상 그가 없다. 그의 시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세상에서 그가 텅 비어 버렸다.

2
시인 오규원이 떠나고, 그가 텅빈 세상에서 나는 이제 그의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를 읽는다. 오규원에 의하면 시인의 시론은 ‘건축물’을 지을 때의 “설계도와 공사 지침서”에 비유된다. 한 시인의 작품이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구조와 수사법을” 갖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러한 설계도, 즉 시론이 없을 수 없다.
그가 시를 쓰는 시인이므로, 시를 건축물에 비유한 것은 당연한 일이나, 시를 읽는 나는 그와 달리 그 건축물의 입주자이다. 그는 건축물을 짓지만, 나는 다 지어진 건축물에 들어가 그 공간을 누리고 향유하고자 한다.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시인의 시론은 시인에게선 건축물의 구축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독자인 나의 입장에서 그 시론은 건축물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용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시론을 둘러싼 이러한 다른 입장 때문에 그에게서 설계도에 비유된 시론은 나에게선 건축물의 활용 안내서이다. 물론 그 활용 안내서가 건축물의 용도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얼마든지 그 건축물, 즉 시인의 시를 내 식으로 읽고 소화할 수 있다.
사실 나의 입장, 즉 쓰는 자가 아니라 시를 읽는 자의 입장을 더욱 강화하자면 시를 하나의 건축물로 보는 비유는 별로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내게 있어 시인의 시는 비유로 이해를 구하자면 건축물이라기 보다 하나의 나라에 더 가깝다. 시인의 시 하나하나가 작은 영토를 이루고, 그 영토들이 맞물려 시인이 구축하는 전체적인 시의 나라를 이룬다. 그렇게 시인은 시를 통하여 시의 나라를 세우고, 나는 그 나라를 여행한다.
시인의 시론은 내게 있어선 시인이 직접 내게 건네주는 그 나라로의 여행 안내서이다. 건축을 내 전문 분야로 하지 않는 나는 그 나라를 건설하는데 기초가 된 전체적인 설계도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 나라의 여행객인 나는 그 나라의 건설자가 직접 건네는 여행안내서엔 관심이 많다. 어찌보면 이건 동전의 양면과 같다. 건설자는 설계도를 나에게 건네지만 그건 내게 설계도가 아니라 여행안내서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해야할 일은 여행이라기보다 시인의 설계도, 혹은 내 식으로는 여행안내서를 들여다 보는 일이다.
사실 이런 일은 나에겐 아주 낯설다. 난 보통은 여행안내서 없이 떠나는 여행 자체를 즐기며, 그 여행의 뒤끝에서 여행 안내서를 만들거나 여행기를 끄적거리는 걸 여행의 재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오규원이 구축한 시의 나라가 아니라, 그의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를 살펴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건 여행을 하고 돌아와 여행기를 작성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행안내서만을 살펴봐 달라는 부탁이다.
여행안내서는 내가 둘러볼 나라를 잘 요약하여 안내해준다. 더구나 내가 둘러볼 시의 나라를 구축한 당사자가 작성한 여행안내서라면 더더욱 그의 나라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고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여행안내서도 여행 자체의 재미를 대체할 순 없다. 물론 시인의 시론, 즉 여행안내서는 종종 여행을 겸하기 때문에 그 재미와 즐거움이 남다르다. 그렇긴 해도 미지의 길을 가며 길을 여는,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그런 여행 자체의 재미를 대체할 순 없다.
그래서 결코 여행의 재미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이번 일 또한 오규원의 여행안내서 속에서 이정표들이 가리키는대로 일정을 짜고, 그에 따라 그가 구축한 시의 나라를 돌아보는 여행으로 계획을 짰다. 그리하여 나는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를 읽고 난 뒤, 그가 쓴 세 권의 시집을 함께 읽었다. 그 세 권의 시집은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그리고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의 시론집, 내 식으로 말을 바꾸자면 여행안내서를 내가 돌아보았던 시의 나라와 중첩시켜 이번의 여행길을 정리했다.

3
오규원이 내게 건넨 여행안내서에 따르면 내가 여행할 나라는 ‘날이미지’의 나라로 명명되어 있었다. 아무 설명없이 날이미지란 말과 생경하게 그대로 부딪치면 그 말은 아무런 양념을 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날 것과 같은 이미지란 의미로 와 닿는다. 그러나 오규원의 설명에 기대면 날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 현상’을 넘어 ‘살아 있는 것’이란 의미가 덧붙여진다. 그 둘을 합치면 날이미지의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살아있는 이미지, 즉 생(生)이미지의 세계이다. 오규원은 그 세계를 “관념(관념어)을 배제하고, 언어가 존재의 현상 그 자체가” 된 세계이며, “현상 그 자체가 된 언어를, 즉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전의 현상화된 언어를 ‘날이미지’라고 하고, 날이미지로 된 시를 ‘날이미지 시’라고 이름 붙였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준다.
그러나 날이미지에 대해 그가 그어준 경계는, 그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나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냥 현상 그 자체의 세계와 맞서면 되지, 굳이 그의 시를 읽어야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대한 생각은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그건 일단 여행을 하면서 그가 구축한 시의 나라에서 직접 얻고 체감해야할 대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 미리 알려두어야 할 사항은 이번 여행이 오규원이 구축한 날이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여행임과 동시에, 지금 내가 서 있는 나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중심을 잡는 여행이란 점이다. 나는 이미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의 시론에서 어느 정도 그에 대한 예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실마리가 되어준 것은 “나로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내 주변의 세계를 통해서 사유를 펼쳐왔”으며, “나는 자연과 인간 어느 쪽에도 서 있지 않습니다. 나는 자연을 보듯 인간을 보며, 인간을 보듯 자연을 봅니다”라고 한 그의 말이었다. “내가 있는 곳이 그 어디든 그곳이 바로 중심의 세계”라는 그의 얘기는 그가 구축한 날이미지 나라로의 여행이 내가 살고 있는 이곳과 중첩이 되면서, 결국 나는 나의 자리에서 중심을 잡게 될 것이라는 암시처럼 들렸다.
실제로 그의 시에서 예를 구해보면 「우주 1」에서 그는 “필터가 노란 던힐을 물고” “머리를 하늘에 기대고 있”는 ‘김병익’을, “무슨 일인지 바지를 입고 두 다리로” “걷고 있”는 ‘김혜순’을, “김현이 서 있던 자리에” 대신 서 있는 듯한 ‘코스모스’를, 그리고 “문구점 앞에 서 있더니 어느새 층계 위에 서 있”는 ‘이원’을 하나하나 나열한다. 그가 근무했던 남산 아래쪽의 서울예술대학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들과 풍경이었을 것이다.
이는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선 자신의 방에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텔레비젼을 시청하고 있는 어머니, 주방에서 내 시선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아내, 말인지 개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마당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우리집 강아지 대니,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꽂고 꽤 오랫동안 그 사각의 경계를 벗어남이 없는 딸로 그 구성원을 바꾸며 전체적 구조에서 서로 중첩이 되고 만다.
오규원은 이렇게 말한다. “저기 있는 소나무, 저기 있는 돌, 저기 있는 철쭉, 저런 게 진리가 아니라면 진리가 있을 데가 없습니다. 도시에서 책 속의 명제를 찾는 거나 자연 속에서 사물의 진리를 찾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도시든 자연이든 인간을 그리는 거울임은 똑같다는 것이지요. 나는 자연이든 도시든 어느 쪽도 칭송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말은 그가 그의 주변 세계에서 사유를 구하듯이, 나도 나를 중심으로 한 나의 주변 세계에서 사유를 구할 수밖에 없으며, 그 두 세계가 서로 중첩되어 환치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로 들렸다. 실제로 이번 여행은 날이미지의 나라로 떠난 여행임과 동시에 내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나를 돌아보는 여행이기도 했다.

4
나는 마루에 앉아 오규원의 시집과 시론집을 읽는다. 이것이 바로 이 여행의 시작이다. 보통은 이 경우, 내가 책을 읽고 있는 장소는 지워지고 시인의 시세계로 걸음하는 여행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오규원의 날이미지 나라로 걸음을 떼면 그 여행은 다른 여행과 달리 내가 서 있는 지금의 이 자리가 곧바로 여행지로 중첩되어 버린다. 그 때문에 날이미지의 나라로 떠났는가 싶었는데 나는 여전히 우리 집의 마루에 앉아있다. 그 마루에는 안락의자가 하나 놓여있다. 보통 나는 그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오규원은 오늘 나를 마루에 앉히고 안락의자를 마주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는 ‘안락의자의 시’를 써서 내게 내민다. 그 시는 안락의자를 가리켜 “네 개의 다리 위에 두 개의 팔걸이와 하나의 등받이 사이에 한 사람의 몸이 안락할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작지만 아늑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규원은 그러한 표현이 “인간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한 사람의 몸이 안락할 공간”을 “새끼 돼지 두 마리가 배를 깔고 누울 아니 까마귀 두 쌍이 울타리를 치고 능히 살림을 차릴 공간”으로 바꾼다. 그러나 그는 이를 곧 ‘낭만적 관점’이라며 버리고 “안락의자가 형광등 불빛에 폭 싸여 있다”로 바꾼다. 이러한 취하고 버리고는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그 반복의 끝에서 그는 결국은 쓰기를 버리기에 이른다.

… 아니 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지 않다 안락의자의 시를 보고 있다
─「안락의자와 시」 마지막 부분

만약 그의 쓰기에 상응하는 것이 나에게서 읽기라면 나 또한 이 여행을 그의 여행안내서에 맞추어 가져가려면 읽기를 멈추고 ‘안락의자의 시’를 보는 것이 무엇인지 짚어내 여행의 행로를 그 방향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방향의 길은 아직 분명하게 시야가 열리질 않는다. 그러자 나는 오히려 읽기에 더 집착을 한다. 그가 쓰다가 버린 ‘안락의자의 시’를 황급히 다시 줏어, 그것을 다시 읽어간다. 안락의자는 “네 개의 다리 위에 두 개의 팔걸이와 하나의 등받이”를 가진 그 구조로부터 시작하여 “방의 평면이 주는 균형 위에 중심을 놓고”안정감있게 놓여있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새롭게 이미지를 쏟아낸다.
나는 일단 그것이 가장 놀랍다. 내 눈에 그 자리엔 언제나 형광등 불빛이 아주 밝아 안락의자의 다리 아래쪽까지 환히 비추는 정적 광경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규원은 그 광경을 안락의자가 형광등 불빛을 너무 ‘가득’ 안고 있어, 불빛이 “팔걸이로 등받이로 기어오르다 다리를 타고 내리는 놈들도 있다”는 동적 이미지로 전환시킨다. 그의 나라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쓰기의 시학을 버리려 하고 있다.
그의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에서 그는 이러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는 파편화된 이미지, 파편화된 개념 속에 있지 않다. 세계는 ‘전적’으로 있다. 그 전적인 존재의 본질, 존재의 언어는 왜곡되지 않은 ‘사실적 현상’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 그 왜곡되지 않은 ‘사실적 현상’이 ‘날이미지로서의 현상’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찾는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 설명만으로는 아직까지는 그냥 현실을 마주한다는 것과 날이미지의 시를 마주한다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그 둘이 똑같다면 굳이 시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어지지 않는가 하는 의문의 대답을 곧장 구할 수가 없다.
여행의 첫걸음을 떼자마자 나는 적잖이 당황한다. 그 당황으로 나는 무심코 책상을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여행의 다음 행로로 들어와 있었다.

내가 무심코 아니 유심코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혹은 톡톡 두들긴 그 소리는
봄에 닿거나 여름에 닿거나 가을
겨울에 닿는다 순간 이 지구에서
수백 년 동안 일어난 일이 없는
진동의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나비가 난다 아니 비가 오고
자작나무와 느티나무 잎이 썩는다
─「탁탁 혹은 톡톡」 부분

책상을 탁탁 혹은 톡톡 두드리는 것은 아주 작은 몸짓이다. 그러나 이 시에선 그 작은 몸짓의 진동이 봄을 부르고, 여름을 부른다. 나는 이를 봄이나 여름과 같은 계절도 작은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그 작은 몸짓의 구체성을 그대로 흘려보낸다. 우리는 그런 작고 미세한 동작을 놓치고, 그 미세한 동작이 뭉쳐서 만들어낸 확연하고 큰 결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눈길을 준다. 우리들이 그냥 지나치던 거실의 안락의자와 마찬가지로 그 작고 미세한 동작이 사실은 하나의 커다란 완결된 우주를 안고 있다. 그래서 오규원은 “책상을 탁탁 혹은 톡톡 두들긴 그 소리는/순간 탁탁 혹은 톡톡의 우주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안락의자와 같이 늘상 보지만 그냥 지나치는 것이나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작은 몸짓이 하나의 우주를 이룬다는 그의 생각은 아직은 몸에 잘 체감이 되질 않는다. 날이미지의 나라는 내가 앉아있는 이곳과 중첩이 되는 듯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아득하게 멀어 보인다. 나는 여전히 답답하다.
나는 잠시 마당으로 나선다. 마당에 나가니 우리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대니가 그곳에 서 있다. 그 순간은 다시 오규원의 날이미지 세계와 중첩이 된다. 우리집 마당과 달리 그는 한 마리가 아니라 강아지 세 마리가 길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강아지 세 마리가 네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습니다

쭉 쭉 뻗고 있는 길 한가운데 네 다리로 서서 딛고 있습니다
─「시월 俗說」 부분

자명한 진술처럼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이 또한 우리들을 당혹시키는 자명한 진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제 당황하고 있는 내 앞으로 오규원이 나선다.

내 시를 읽는 다수의 독자가 가장 당황하는 점은 시의 투명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태까지의 애매한, 불투명한 시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투명성 자체가 엄청난 억압이 되는 것이지요. 즉 그것이 추상적이든 피상적이든 간에 의미로 점철되어 있는 시에 익숙한 사람에게 해석을 해주는 시구가 없는, 살아 있는 현상만을 제시하는 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직관에 의해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명시적인, 누군가가 정해주는 그런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나는 다시 오규원의 시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자명한 진술 가운데서 교묘한 언어적 장치 하나가 눈에 띈다. 내 눈을 잡아끈 것은 두 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네 다리’이다. 강아지가 네 다리로 서고, 인간이 두 다리로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 나는 서다의 사고 속에서 다리를 지워버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여 서다라는 말이 그 말을 가능하게 해주는 다리라는 말을 삼켜 버린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좀더 확대하면 우리는 말을 하는 듯 하면서도 오히려 말을 지우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아마도 갸우뚱하겠지만 그렇게 우리들이 습관화된 말 속에서 지워버린 말을 가장 선명하게 되찾을 수 있는 예가 오규원의 시이기도 하다. 가령 나무의 그림자가 짧아졌다라는 말은 어떤 현상을 드러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현상을 그 말 속에 고착화시키고 가두어 버린다. 그 순간 우리는 “나무가 몸 안으로 집어넣는 그림자가/아직도 한 자는 더 남은 겨울 대낮”(「나무와 돌」)의 풍경을 잃게 된다.
난 화들짝 놀란다. 내가 여지껏 우리 집 강아지 대니의 멀쩡한 다리를 지운채 그 강아지를 여기저기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 있던 나의 작은 몸짓도 그렇다. 그런 몸짓을 보일 때면 항상 내 머리 속에는 생각이 가득할 때가 많았다. 그 작은 몸짓은 어떻게 보면 내 생각이 가득 실린 몸짓이며, 그 몸짓은 나의 생각과 맞물려 있다. 아마도 내가 눈이 밝았다면 분명, 그 작은 몸짓 속의 우주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항상 그것을 그냥 ‘무심코’ 지나쳤다. 마치 강아지에서 다리를 지우고 여기저기 끌고 다녔듯이. 우리는 종종 그렇게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할 때가 많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와 이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골목을 내려다 본다. 저녁이 지나고 골목에는 어둠이 찾아온다. 어느 집의 창인가에 불이 들어오고, 지붕들이 그저 윤곽만을 남긴채 어둠 속으로 묻혀간다. 나는 다시 내가 서 있는 세계에서 오규원의 세계로 건너간다.

오늘, 이 골목은 어둠이 담벽에 기대어 서 있다
오늘, 이 골목은 어둠이 창을 사각형으로 만들어 들고 서 있다
오늘, 이 골목은 어둠이 지붕을 지우고 허공을 들고 서 있다
─「골목 2」 전문

나는 “어둠이 담벽에 기대어 서 있”는 부분은 가로등에 비친 무엇인가의 그림자가 담벽에 걸쳐진 풍경의 변주로 이해를 한다. 그때 담벽에 비친 그림자는 충분히 어둠으로 환치될 수 있다. 그건 가로등이 켜진 어두운 밤에만 생기는 거니까. 그렇게 되면 그 그림자는 어둠을 짊어질 수 있게 된다. 그 그림자를 보는 것으로 곧장 어둠을 연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골목에 깔린 어둠을, 담벽에 서린 그림자의 어깨에 얹어 골목에 세워두자, 그 어둠이 “창을 사각형으로 만들어 들고 서 있”게 되고, 또 그 어둠이 “지붕을 지우고 허공을 들고 서 있”는, 내가 평상시 보던 어둠과는 다른 풍경을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풍경의 변화보다 더 내 시선을 끄는 것은 사실, 행이 바뀔 때마다, 그 맨앞자리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오늘’이란 말이다. 오규원은 그 오늘이란 말한마디로 그 풍경이 내일은 또다른 이미지로 샘솟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제 밤이 왔으므로 나는 일단 하루를 넘겨 여행의 일정을 다음 날로 잡는다. 다음 날, 나는 일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발을 멈추고, 바깥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창으로 동네의 놀이터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예전에 수퍼를 운영했었지만 중풍을 맞은 뒤로 그 일을 그만두고 저는 다리를 끌고 불안한 걸음으로 찾아와선 오전 시간을 그 놀이터에서 보내곤 하는 그 아저씨가 안보인다. 다른 동네로 이사갔다고 들었는데 가끔 와서 술을 먹고 소란을 피우는 한 아저씨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 놀이터엔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내가 그렇게 놀이터를 살펴보고 있는 동안, 오규원은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선다. 나는 놀이터를 살펴봄과 동시에 그의 산책길에 함께 나선다.

산골무는 보지 못했다
원추리는 보지 못했다
더덕은 보지 못했다
무덤은 있었다
─「산b」 전문

놀이터에서 누군가가 안보인다는 것은 누군가의 부재를 뜻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부재의 빈자리엔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가득 차 있다. 오규원의 산책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덤이 있을 때는 무덤의 자리는 무덤으로 채워지지만 원추리를 보지 못한 경우, 그 자리는 빈자리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원추리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진다. 즉 보지 못했다고 하여 없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비워져 있는 그 자리가 그 길에서 늘상 보아왔던 것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 그 자리를 채운다.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오늘을 채우지만, 보지 못한 자리는 기억이 채운다. 없다거나 보지 못했다고 하여 그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아무도 보이지 않는 놀이터에 온갖 기억이 그득해 보이고, 오늘 있는 것이라곤 무덤밖에 없는 오규원의 산책 길도 오히려 더욱 그득해 보인다. 아무도 없다거나 보지 못했다는 말이 존재의 자리를 깨끗이 지워버리던 그간의 습관적 세상을 생각하면 이건 분명 그의 날이미지 나라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이곳만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놀이터가 떠들썩해진다. 어디선가 아이들이 몰려나왔다. 여전히 그 두 아저씨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놀이터를 버려두고 다시 오규원의 또다른 산책길을 따라 나서 본다.

산앵두는 보지 못했다
산골무는 보지 못했다
원추리는 보지 못했다
더덕은 보지 못했다
무덤은 있었다
─「산」 부분

산앵두가 덧붙여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산b」와 똑같지만 전의 시가 완결된 시편이었던 것에 반하여 이번의 시는 전체의 일부분이다. 푸른 색은 항상 푸른 색일 것 같지만 그러한 푸른 색의 주변을 다른 색들이 둘러싸는 순간, 그 푸른 색은 홀로 완결되어 있을 때의 푸른 색이 아니다. 즉 전체적 문맥에 따라 똑같은 대상도 그 의미를 달리한다. 전의 시에서 보지 못했다는 언술은 산책을 할 때마다 그 길에서 마주쳤던 것들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켰지만 이번의 경우엔 그 산책길에서 본 것과 대비되어 그것들에 대한 기억보다, 그것들의 부재라는 색채로 나에게 와닿는다. 아이들이 들어찬 놀이터가 왁자지껄해지는 순간,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두 아저씨는 기억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없는 부재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똑같은 것이라도 그것의 위치를 어디로 잡는가에 따라 그 채색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오규원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는 우리가 “곧잘 언어가 의미하기보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의미로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으며, 아울러 “언어가 의미를 결정하기보다 언어체계가 의미를 형성한다는 점”도 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의미화하고 조직화하는 존재가 언어”라는 점을 인정하고, 언어를 가리켜 ‘존재의 집’이라는 한 철학자의 말도 수긍할 수 있지만, “이 존재의 집을 구조적으로 지난 날과 다르게 고쳐 인간인 ‘나’만이 아닌, 세계와 함께 언어를 ‘사는’ 방법이 없을까?“를 되묻는다. 그러한 생각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구축된 그의 날이미지 나라에선 보지 못했다라는 말이 존재의 자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저장소로 작용하기도 하며, 그 말이 또한 그러한 의미로 고착되지 않고 때로는 존재의 부재를 가리키는 말로 유연하게 바뀐다.
바깥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면서 마당이 후두둑 거리는 빗소리로 가득이다. 빗줄기가 심해지면서 빗방울이 유리창에까지 튄다. 나는 다시 오규원의 세계로 나선다.

빗방울 하나가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순간 유리창에 잔뜩 붙어 있던 적막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유리창과 빗방울」 부분

우리 집 마당에는 몇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배나무와 은행나무, 그리고 감나무이다. 넝쿨장미의 줄기도 무성하다. 한여름엔 모두 온통 푸른 잎으로 무성하다. 마당의 나무들을 한참 바라보다 나는 다시 오규원의 날이미지 나라로 들어선다.

떡갈나무 하나가
떡갈나무로 서서

잎과 줄기를
잎의 자리와 줄기의 자리에
모두 올려놓았다
─「숲과 새」 부분

나의 세상에선 배나무와 은행나무, 감나무, 그리고 넝쿨장미가 모두 살아있지만 실제로는 살아있다기 보다 배나무는 배나무로,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로 굳어있다. 오규원의 날이미지 세상에선 그의 떡갈나무가 잎과 줄기를 무성하게 피운 상태로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잎과 줄기를/잎의 자리와 줄기의 자리에/모두 올려놓”으며 살아있다.
비는 여전히 계속 내리고 있다. 비가 오니 세상 모든 것이 다 젖는다. 난 비오는 마당과 바깥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다 오규원의 날이미지 나라로 눈길을 돌린다.

비가 온다, 대문은 바깥에서부터 젖고 울타리는 위서부터 젖고 벽은 아래서부터 젖는다
비가 온다, 나무는 잎이 먼저 젖고 새는 발이 먼저 젖고 빗줄기가 가득해도 허공은 젖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시도 젖지 않는다
─「비」 전문

오규원에게 있어 언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하나는 일상 언어가 갖고 있는 경직성이다. 오규원의 설명을 빌리자면 “우리의 언어행위는 대부분 반성 없이 개념화하는 그것이고, 그 개념화된 것은 살아 있는 것의 ‘열린 세계’와 대응하기 힘든 굳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그렇게 굳어 있는 안락의자와 강아지, 어둠, 떡갈나무 등이 그의 날이미지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있는 대상으로 바뀌는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날이미지의 나라가 갖는 이러한 매력과 함께 그의 나라는 사람들의 오해를 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바로 그의 시가 실제와 혼동될 여지를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 여정에서 사실 그런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강아지의 경우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 혼동이 초래되는 것은 우리들이 그의 시가 독자적으로 구축된 또다른 하나의 세계, 그것도 언어로 이루어진 시란 것을 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극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려진 그림에서 그것이 그림이란 아주 근본적인 사실을 잊어먹는 경우와 동일하다.
오규원은 그런 오해가 답답하다. 세상은 젖고 있지만 허공은 젖지 않고 있고, 비가 오는 그 세상을 말하고 있는 그의 시도 젖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자명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비가 그쳤다. 나는 잠시 자전거를 타고 바깥으로 나간다. 내가 사는 집에서 자전거로 한 10분 정도가면 천호동의 한강 둔치가 나온다. 자전거의 속도에 의존하면 난 약간의 무리를 할 경우 여의도까지도 한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잠실까지만 가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온다. 잠실 대교 아래쪽에서 바라보는 저녁 풍경이 좋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바라보면 남산 타워의 위쪽으로 걸려있는 해가 멀찌감치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던 나는 어느덧 오규원의 날이미지 나라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허공에 크고 붉은 해를 하나 그렸습니다
해 바로 아래 작은 산 하나를 매달아 그렸습니다
해와 산은 캔버스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산 귀퉁이에는 집을 하나 반쯤 숨겨 그렸습니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가 창을 드르륵 엽니다
지나가던 새 한 마리가
집에 눌려 손톱만하게 된 나를
빤히 쳐다보다 갑니다
─「그림과 나 2」 전문

그림의 세계는 말 그대로 그린 세계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하면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그 그림이 실제의 현실과 아주 유사할 경우, 우리는 그림을 실제로 오인한다. 그 오인의 순간, 우리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건 실제가 아닌 그림이며, 때문에 아무도 그림 속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집에 들어가 창을 드르륵” 열고 있다. 그림의 떡을 먹을 수 없듯이, 그림의 집으론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당혹스럽다. 그 당혹감은 바로 그림과 실제의 오인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오인을 하면 우리는 그림을 그림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처럼 마주한다. 시를 시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처럼 마주한다. 그림을 그림으로 마주하고, 시를 시로 마주하면 얼마든지 우리는 그 세계의 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오규원이 꿈꾸는 날이미지의 시는 바로 그렇게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며 거처하는 그림 속의 집일 것이다.
나는 잠실의 한강둔치에서 보낸 시간을 접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와서 보니 지붕 너머까지 키를 키운 은행나무가 유독히 커보이고 잎들은 무성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나무를 바라보다 오규원의 날이미지 나라에서 그림 한 점을 얻었다.

천지간에 큼직한
나무 한 그루 그립니다

줄기는 오로지 하나만 있고
몸은 둥글게 부풀어
몸이 온전히 나무로 꽉 찬 나무입니다
─「그림과 3」 부분

나는 집으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끈적한 땀을 말끔히 씻어낸 나는 선선한 저녁 바람을 동무삼아 동네로 나선다. 지나다 보니 담쟁이가 담벽을 타고 올라간 집 한채가 눈에 들어온다. 담쟁이는 담벽을 맨위까지 모두 뒤덮고 있었다. 그 순간 이미 나는 동시에 오규원의 날이미지 나라로 들어와 있었다.

지상의 모든 담이
벽이 끝나는 곳이 하늘이다
여기저기 엉겨붙어
담의 끝까지 간 담쟁이가
불쑥 몸을 드러낸 하늘 앞에
전신이 납짝해져 있다
하늘에는 담쟁이가
엉겨붙을 담이나 벽이 없다
─「하늘」 전문

나는 생각에 잠긴다. 보통 담이나 벽은 막혀있는 길의 상징이다. 그러나 오규원의 세상에선 담쟁이가 그 담과 벽에 엉겨붙어 길을 간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담과 벽은 길을 막는게 아니라 오히려 길이 되어 버린다. 우리에게 하늘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 볼 때 그곳을 훨훨 나는 자유를 꿈꾼다. 그러나 오규원의 날이미지 세상에서 그것은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허방이 되어 버린다. 그는 담과 벽엔 길을 내주고, 담쟁이의 발걸음 끝에서 하늘의 자유는 허방으로 버려버린다.
실제로 담과 벽에 길이 없다면 그것만큼 당혹스러운 경우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늘을 날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담과 벽에 막히면서, 항상 그 담과 벽에 엉겨붙어 길을 내며 살고 있으니까. 하늘과 같은 자유로운 공간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앞을 가로막는 담과 벽에 엉겨붙으며 살고 있으니까.
오규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담과 벽이 담쟁이의 길이란 것을.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나무들이 대지의 푸른 불이며, 대지의 별들이라는 것을. 또한 나무들이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나무가 새와 같이 ‘하늘의 아래’에 속하며 시간을 나르는 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과 또 그렇게 알 수 있는 것을 그대로 시로 쓴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나무가 대지의 푸른 불이며,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이런 시적 인식은 오랜 역사 기간 동안 대부분의 시인들이 해온 시적 대상의 의미화 작업이다. 얼핏 보기에 대상을 명확히 밝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작업은 사실은 대상을 수없이 파편화하고 덧칠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아마도 담과 벽은 담쟁이의 길이다라고 못을 박았다면, 우리는 그 말의 사유에 묶였을 것이 뻔하다. 오규원은 그러한 “사고의 근본인 은유적 사고의 축을 버리고, 그리고 그 언어도 이차적으로 두고, 세계를 ‘그 세계의 현상’으로 파악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물론 그 대답이 날이미지의 시였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오규원의 그 담쟁이를 얘기했더니 나와 같이 사는 여자는 내 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담쟁이가 가끔 하늘을 보면서, 그 자유의 허상으로 목을 축이며 길을 가지 않았을까. 하늘이 없었다면 담쟁이도 가는 길을 잃지 않았을까.
날이미지의 나라에서 그의 시는 아무 것도 규정함이 없이 우리의 사유로 샘이 솟고 있었다.

5
날이미지의 나라에서 돌아온 나는 다시 오규원의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를 펼친다. 생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그의 제자 박형준이 그에게 “선생님은 날이미지와 관련해 어떤 시를 쓰실 건가요”하고 묻는다. 그가 대답한다.

……날이미지 시의 궁극이 목표로 하는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하는 시입니다. 내 마음이 아무 것도 안 가진 채,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그득하다면 시가 아무 것도 말 안하고 그냥 그득한, 그러한 모든 걸 말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이제 오규원은 이 세상에 없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더 이상 그의 시도 새롭게 접할 수 없다. 그는 세상에서 텅비어 버렸다.
나는 내가 떠났다 돌아온 날이미지 나라로의 여행을 다시 곰곰히 돌아본다. 우리 집 마루의 안락의자와 우리 집 강아지 대니, 우리 동네 골목으로 매일 찾아오는 어둠, 또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되고 잎이 무성한 은행나무, 그리고 우리 동네 어느 집의 담과 벽을 덮고 있던 담쟁이가 머리 속을 지나간다. 모두 오규원의 시들과 맞물리며 중첩되어 있었다.
그가 텅비어 버린 세상에 그가 그득했다.

(『시와반시』, 2007년 가을호)

10 thoughts on “세상에 그가 그득하다 – 오규원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

  1. 날이미지가 이런 말이었네요

    생활과 계절과 연관지어…그냥 시를 쓰던 제가
    어떤 멋진 영화를 보는 듯이 참 글에 매료 되네요
    저도 눈에 들어 오지 않던 들꽃이…키작은 민들레가…촛불이…담쟁이 넝쿨이
    소재가 되는 것을 보고 작은 생명의 기운에 시인은
    이미지의 이중성을 키우는 능력이 있어야함을 느끼곤해요
    제가 많이 모자라지만 이렇게 배우니 감사할 뿐이에요

    나무는 꽃피는 불꽃
    인간은 말하는 불꽃
    동물은 떠돌아다니는 불꽃…이라고 노발리스가 표현한 것도
    날이미지화 시키면 어떨까요

    돌부스러기 하나에도 눈길 주면서 더 기도하며, 겸허하게 삶을 살고 싶네요

    오규원님과 동원님과의 여행~ 계속 되었으면 좋겠어요…
    봄인가봐요~!

    1. 그건 아마 오규원님 이외엔 누구도 넘보지 못할 세계가 아닌가 싶어요.
      그냥 우리는 오규원님이 펼쳐놓은 세상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것 같아요.

  2. 시에서 살아있는 이미지를 보는듯 제 머릿속에도 생생히 그려지네요.
    특히 저 눈송이와 전화는 마치 제가 그런 전화를 받은것 같아요.
     
    좋은 시를 읽고 마음에 감동을 받고 여운이 깊게 남는건
    살아가면서 어떤 일로 힘들어할때 ‘아! 제가 바로 그래요. 제 마음이 그래요.’하며
    마음에 위안을 주는 사람을 만난듯 가슴이 후련해지죠.
    오규원 시인님은 그런 분이셨을거같아요.

    1. 보통은 그런 경우 자신이 느낀 감정을 얘기하는데
      오규원의 시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죠.
      그런데도 그 순간 시인의 마음을 그대로 공유할 수 있으니 정말 대단한 시인이예요.

  3. 동원님의 하루 일과를 시와 함께 보는 것 같아요.
    시인이나 평론가나 소설가나 그외 분들에게 전 경외감을 느껴요.
    섬세한 관찰력 그것을 글로 풀어 놓는 매력, 인간에 대한 애정 등등..
    시에 대한 이해와 보는 관점에 대해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1. 그러고 보니 이번 글은 시와 제 생활을 아주 밀접하게 엮어놓았네요. 모든 사람들이 시를 자신들 생활 속으로 끌고 들어가 그냥 밥먹고 잠자는 일상처럼 누리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1. 녜, 책이 와서 여기에 올렸어요.
      또 내가 좋아하는 시인에 관한 글이기도 하고…
      글들을 좀 정리해서 올려야 하는데 사진 갖고 노는게 재미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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