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합창단은 2023년 9월 10일 일요일, 간토 대지진 100년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모 공연에서 노래했다. 마지막 곡의 노래를 부를 때 합창단 그날이 함께 했다. 공연은 100년전 도쿄에서 있었던 지진과 그 자연재해를 빌미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거짓 분노를 조장하여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의 야만을 기억하고자 했으며 기억의 환기를 통해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기억과 위로의 시간은 행위극과 노래로 채워졌다. 공연은 인사동의 천도교 중앙대교당 앞 마당에서 있었다.
리허설 때 지휘자 임정현은 이소선합창단과 합창단 그날이 함께 부를 노래를 레가토로 부르라고 주문했다. 음과 음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부르라는 그 말은 마치 이 기억이 끊이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을 음악의 형식에 실어 부르라는 소리로 들렸다.
이소선합창단은 두 곡의 노래를 불렀다. 첫 곡은 <진달래> 였다. 때로 꽃은 내가 살고 자란 곳의 다른 이름이 된다. 진달래는 그냥 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산하이기도 하다. 합창단은 반주 없이 오직 목소리만으로 <진달래>를 불렀다. 마치 척박한 산에서도 잘자라는 진달래처럼 반주 없는 현실에서도 노래는 아름답게 꽃피었다.
노래가 시작되어 “눈이 부시네”라고 했을 때, 나라는 잃었지만 이국땅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던 이 땅 민중들의 삶이 그 꽃에서 보였다. 그러나 노래가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라고 하자 이제 진달래의 자리에서 보이는 것은 도쿄땅에서 일본인들의 손에 억울한 죽음으로 내몰린 6천명이 넘는 이 나라의 동포들이었다. 노래는 100년전 도쿄를 살았던 이땅 국민의 삶과 죽음을 모두 기억하고자 했다. 기억이 된 노래가 합창단이 그날의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작은 위로였다.
합창단은 두 번째 곡으로 <산디니스타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노동자가 꿈꾸는 세상을 그린다. 노래는 “우리가 지은 밥과 옷들과 쌓은 벽돌 모두가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오고 기쁨과 자유 평등 누릴 때” 바로 그 세상이 우리들이 꿈꾸는 노동자의 세상이 될 것이라 알려준다. 100년전 조국을 떠나 도쿄에서 생활하던 조선인들이 꿈꾸는 세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에게 돌아온 것은 지진의 혼란 속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타국에서 삶을 마감해야 하는 비극이었다. 밥도, 옷도 필요 없다. 이제 그 영혼들이 꿈꾸는 세상은 학살자들이 그들의 죄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것이 첫순서에 놓여있을 것이다. 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통한의 죽음들이 다시 깨어난다.” 산자의 기억으로 깨어나 일본의 사죄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마지막 노래는 <너를 위하여> 였다. 이소선합창단과 합창단 그날이 함께 불렀다. 노래는 그날의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두 합창단이 입을 모아 시작한 노래는 “너를 위하여 저 산이 다가와 피흘리며 쓰러져 불길 속으로 눕고 우리는 노여워 바람찬 이 밤 떠나지 못하네”라고 했다. 그 날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려면 단순히 한두 사람의 기억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땅의 산하가 모두 분노의 불길 속에 일어나 바람이 찬 밤에도 그 기억의 시간을 지켜야 한다. 노래는 “네가 묻힌 밤 기억하리라” 말하며 그 세월을 ‘억만년’으로 다짐한다. 억만년이라 했으니 한 사람의 생이 아니다.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며 끊이지 않는 기억이 될 때만 가능한 세월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바로 그 억만년의 기억이다.
그러나 기억만으로 희생자에 대한 위로를 다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위로의 궁극적 끝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잘알고 있다. 바로 우리의 분노앞에 일본이 반성하고 무릎꿇고 그때의 영령들에게 진정으로 사죄하는 것이다. 그 사죄만이 용서를 가져오고 그때의 용서만이 새로운 평화의 세상에 대한 시작이 될 수 있다. 두 합창단의 노래는 때문에 노래로 요구한 일본의 사죄이기도 했다. 국가가 자국민의 죽음을 방치하고 외면하고 있을 때, 노래가 나서 일본에 사죄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