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자리에서 14년째 혼자 살고 있는 차주일 시인이 내게 물었다.
–자기는 설거지 안하고 그릇 계속 무더기로 쌓아 가면서 한달간 버텨봤어?
내 대답은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 정도라는 것이었다. 차주일이 그 하루나 이틀을 비웃듯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아직 혼자 사는 삶의 경지에 이르려면 한참 멀었어.
내게는 그 말이 무엇에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는 자유의 세상이 왔는데 왜 자유를 향유도 못하냐는 힐난으로 환치되어 들렸다. 그 힐난은 내가 혼자 사는 거처로 돌아왔을 때 시인의 이의제기에 힘을 얻은 아주 구체적인 불만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한끼의 식사를 하고 난 뒤 막 설거지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시인이 무서운 것은 그의 생각으로 세상 것들을 물들여 그릇을 선동한다는 것이다. 부엌의 싱크대에 무질서하게 쌓여 설거지 거리로 뒹굴고 있던 그릇 중 하나가 내게 반발했다.
–우리가 그래 밥먹고 나면 당장 치워야 하는 설거지 거리로밖에 보이질 않나? 밥먹을 때는 우리 덕에 좋았지. 그렇지만 식사만 끝나면 우리는 빨리 씻어서 치워야하는 설거지 거리로밖에 상대를 안해주지. 너는 피곤한 몸으로 거처에 돌아온 날엔 씻지도 않고 침대에 쓰러져 잠에 들곤 하던데 왜 우리는 한번쯤 그런 순간을 살면 안되냐. 우리는 네가 먹다 남긴 국물이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냄새좀 풍기면서 방치의 자유좀 살면 안되냐고?
나는 너네 언제 차주일이 만난 적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때로 선동은 내가 들은 말을 통해 내 몸에 묻어 거처로 들어올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거처로 올 때 말들을 잘 털어냈어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럴 때는 대거리하지 말고 물러서야 한다는 것도 내가 안다. 나는 일단 설거지 거리를 싱크대에 그대로 방치하기로 했다.
며칠 전에 집에 갔을 때 딸이 잔소리를 했다. 먹고 나서 부엌 탁자에 그대로 방치한 귤껍질을 가리키며 먹었으면 껍질은 좀 쓰레기통에 바로 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때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었다. 그렇게 그게 심기에 거슬리면 자신이 치우면 될 일 아닌가. 그러면 자신은 집안이 깨끗해져서 좋고 나는 내가 치우지 않아도 되서 좋으니 이중으로 좋은 일 아닌가. 왜 자신이 치우면 이중으로 좋을 일을 내게 잔소리를 해서 서로 마음이 상하는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일까. 그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딸이 또 잔소리를 하면 시인의 선동에 넘어갔던 그릇들의 목소리를 빌어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그냥 좀 놔둬. 귤껍질이 당장 썩어 냄새를 풍기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 놔두면 잠시 향기를 풍기면서 방향의 선물로 집안에 또다른 봉사도 해주 잖아. 그리고 먹고 나면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운명이 뭐가 그리 좋다고 그렇게 버리라고 잔소리냐. 놔두고 지나가며 볼 때마다 조금 전에 속을 먹던 순간을 껍질에 감사하는 시간으로 가질 수 있으면 껍질이나 우리에게 모두 좋은 거 아니냐.
우리는 암암리에 깨끗함이 관장하는 질서의 울타리에 갇혀 산다. 질서는 모두 우리를 억압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편리를 내세워 그 질서의 억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아주 작은 억압을 가끔 무너뜨릴 때 우리는 큰 불편을 감당하지 않고도 자유를 호흡할 수 있다. 차주일이 한달 동안 설거지를 하지 않고 부엌에 설거지를 방치했을 때, 사실 그는 그 자유를 호흡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싱크대에 방치된 설거지 거리는 게으름이 아니라 깨끗함을 절대적 원칙인양 내세우며 부엌을 억압하고 있는 질서에 대한 항거 같은 것이다. 그 항거가 바로 자유이다.
하지만 자꾸 눈이 간다. 시선이 싱크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 거리를 힐끗 거린다. 오랜 세월 우리의 몸에 밴 의식이 우리의 마음을 저걸 치워야 하지 않나 하는 굴종의 습관 쪽으로 기울이기 때문이다. 질서의 울타리 너머 자유의 세상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