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의 구멍, 그리고 나뭇잎

Photo by Cho Key Oak
2007년 10월 10일 남한산성 동문 성곽에서


당신이 오기 전까지
그건 그냥 성곽에 난 하나의 구멍이었죠.
가끔 사람들이 지나가며
성곽의 그 구멍으로 바깥 세상을 엿보곤 했어요.
구멍은 항상 텅비어 있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성곽 밖으로 새어나갈 때면
한번도 그 시선을 가로막는 법이 없었어요.
그러나 당신이 오던 날
그건 구멍이 아니라 하나의 화폭이었죠.
당신이 오던 날,
성곽의 구멍은 그림의 꿈으로 설레고 있었죠.

당신이 오기 전까지
난 그냥 아직 푸르거나
이제 가을빛에 막 물든 나뭇잎에 지나지 않았죠.
성곽을 오르던 사람들이 가끔 구멍으로 바깥을 엿볼 때면
나는 혹시나 당신이 아닌가 하여 힐끗힐끗 눈을 맞추곤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무심히 나를 지나쳐
바깥으로 새어나가곤 했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렸지만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 당신은 없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몇년이 지나갔어요.
그리움에도 무게가 있어,
매년 당신을 기다리긴 했지만,
가을이 깊어지면 언제나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기다림을 성벽밑으로 접곤 했어요.
그런데 올해는 10월 초입의 어느 날 드디어 당신이 내게로 왔죠.
당신이 오던 날,
성곽의 구멍은 더 이상 텅빈 구멍이 아니었죠.
구멍은 그날 그림의 꿈으로 가득찬 화폭이 되었어요.
그 투명한 화폭에 그림으로 가득찬 것은 바로 나였죠.
아직 푸르게 만져지는 여름의 흔적과
그 여름내 따가운 햇살을 하나하나 져며 만들어낸
가을빛의 내가 그 화폭 속에 그림으로 채워졌죠.

당신이 오던 날,
성곽의 구멍은 화폭이 되고,
난 그 화폭의 그림이 되었죠.
구멍에선 시선이 바깥으로 새기 마련이지만
당신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어요.
당신의 시선은 바로 내가 선 그 자리에서 딱 멈추었죠.
드디어 나는 당신을 만나고 그날 당신과 눈을 맞추었죠.
그 순간 나는 당신의 눈속으로 뛰어들었고,
당신 속의 내가 되었어요.

이제 고백하지만
나에겐 오래 전에 전해들은 전설이 하나 있었어요.
내가 그림이 되면 당신과 눈맞출 수 있고,
그럼 그 순간 당신 속으로 뛰어들어
당신 속의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전설을 들은 뒤로 그게 나의 꿈이 되었죠.
올해 10월의 어느 날 그 꿈이 이루어졌어요.

8 thoughts on “성곽의 구멍, 그리고 나뭇잎

    1. 저 사진은 forest님이 성곽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더니 찍었더라구요.
      저는 그때 아래쪽에서 성문 여기저기를 찍고 있었죠.
      둘이 같이 사진찍으러 다니니까 이런 건 아주 좋네요.
      제가 놓친 분위기를 건져다 주니 말예요.

  1. 사랑표 연잎으로 동원님을 알게되었고,
    또 동원님의 영원한 동지이신 forest님도 알게되어 즐거운 날이 많았습니다.^^

    올 가을도 여전히 쓸쓸했지만 두 분으로인해 자주 웃음지었네요.
    특히 귀여운 꽃경내님은 두 분의 따님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가족처럼 느껴지더군요.ㅋ
    저도 저렇게 멋진 사진찍고싶고 아름다운 글도 쓰고싶어요.
    책을 많이 읽으면 가능할까요?
    부럽습니다.

    1. 어, 저는 평등공주님 글에서 삶의 한가운데 서 있는 굳건한 글을 보곤 하는데요.
      저는 삶을 부단히 벗어나려 애쓰지만 평등공주님은 삶 자체를 바꾸려 부단히 애쓰고 계시잖아요.
      그건 존경스런 글이예요.
      우리 모두 자기 삶을 굳건하게 밀고 나가자구요.
      평등공주님 글이 제게 희망이 되니 제 글도 그냥 평등공주님께 위안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밤 되세요, 평등공주님.

  2. 깊어가는 가을밤, 가을의 전설 하나를 들려주시네요.
    동원님이 갑자기 이야기 들려주시는 ‘할머니’ 되셨어요. ㅋㅋ
    아름다운 부부의 사진과 글의 조화, 사뭇 멋집니다.

    1. 강변CGV에서 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 중에 남자가 작곡한 곡에 여자가 가사를 붙이는 장면이 나와요. 그 장면에서 필을 받았다죠.

  3. 뭔가 완성작을 보는 느낌이네.

    글이 너무 아름다우면 사진에 시선이 가지 않고
    사진이 너무 아름다우면 글이 잊혀지는데
    이번꺼는 사진과 글이 어제 본 영화처럼 잘 조화를 이룬 것 같아 아주 맘에 들어.
    작곡가와 작사가가 다른 사람인데 둘이서 아름다운 하나의 곡을 만들어낸 것 같아 좋다.
    화음이란 참 아름다운 것이구나..
    다음에 산성에 가면 그리움이 만들어내는 화폭을 감상하다 와야겠다.

    1. 어제 영화볼 때 퍼뜩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
      사진 한 장을, 작곡은 되었지만 작사가 안된 음악으로 생각하고 내가 가사를 붙여 곡을 완성해야 겠다고…
      사실 사진 한 장으로 글을 쓰긴 어려운데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으니까 그게 가능하군.
      네가 들여다보던 구멍 속에 저런 풍경이 있었군 하고 사진을 보니 그 재미도 아주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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