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시의 사랑

Photo by Kim Dong Won

사랑이란 참 이상한 거예요.
난 사랑의 가장 농후한 징후가 현저한 시력 저하가 아닌가 싶어요.
심지어 눈이 머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러나 눈이 멀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보인다고 하더군요.
내 경험에 의하면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랑을 할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지독한 근시가 되는 것 같아요.
그 근시는 너무 지독해서
물방울 두 개가 분명하게 윤곽을 그리며 나란히 서 있는데
왼쪽 물방울에 시선을 뺏기면 오른쪽 물방울이 흐릿해지고
오른쪽 물방울에 시선을 뺏기면
바로 곁의 왼쪽 물방울이 시선에 들어오질 않게 되죠.
그러니 사랑을 할 때는 사람들 모두가 지독한 근시가 되는게 틀림없어요.
사랑이란 한마디로 어느 경우에나 모두 근시안적 사랑이란 얘기죠.
생각해보니 그녀와의 사랑도 근시안적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별로 멀리 앞을 내다보지 못했죠.
그런 점에서 보면 그녀는 더더욱 심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던게 그녀는 나보다 더욱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요.
눈이 아주 나빴거든요.
언젠가 그녀의 도수 높은 안경을 한번 써봤는데
나는 그때 술안먹고 안경만 써도 세상이 빙빙돌 수 있다는 걸 처음 경험했어요.
그러니 그녀가 초점을 내게 맞추는 순간
그녀의 눈엔 나밖에 뵈는게 없었을 거 같아요.
나의 집안, 나의 주머니 속사정, 나의 더러운 성깔,
그 모든 게 내 곁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너무 근시여서 그걸 전혀 볼 수가 없었죠.
그러니 사랑하고 싶다면
사실은 콧대를 낮추어야 하는게 아니라
시력을 낮추어야 해요.
근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시력을 낮추면 사랑이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랑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안보일 때가 많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시력만 낮춘다고 될 일도 아니예요.
그래도 내게 사랑이 가능할까 알고 싶다면
이 글의 위아래에 걸쳐 놓은 사진 두 장을 한번 들여다 보세요.
물방물 하나만 선명하게 보이시나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사랑의 가능성은 있어요.
만약 사진에서 물방울이 모두 선명하게 보인다면
당신은 사랑은 포기하세요.
당신은 구제불능이예요.

Photo by Kim Dong Won

5 thoughts on “근시의 사랑

  1. 사랑에 빠지면 늘 원래의 저는 없어지고 또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었죠.
    이건 평소의 내가 아닌데..싶을정도로요.^^
    언제든 평소의 조용한 성격과는 달리 사랑은 적극적으로 표현했어요.
    그게 받아들여지던 안받아들여지던 일단은 솔직해졌었죠.
    이제 다시 사랑에 빠질일은 없겠죠. 아쉽지만..^^

    1. 저희집은 반대예요. 늘 남편이 저더러 “나 사랑해?”라고 묻죠. 전 원래 그런 물음엔 찬물을 끼얹는 성격이라(못됐죠.ㅋㅋ)”아니? 사랑은 무슨..그냥 친구처럼 편안한 사이야~”
      이성으로 느껴진지는 오래되었으니까요.오래된 연인처럼.^^
      그래도 가족간의 사랑이란건 있지요.^^

    2. 두 분이 아주 기가막힌 사랑의 단서를 제공하셨습니다.
      “사랑은 오래되고 숙성되면 편안한 친구 사이가 된다. 마치 깊은 강처럼 그들의 사랑은 그들 사이의 저 깊은 곳을 소리없이 고요하게 흐른다.”
      제가 요걸 주제로 글을 쓰는 날, 두 분이 사랑의 소재를 제공하신 겁니다.
      우히히, 신난다. 가만히 앉아서 글의 소재도 건지고.

    3. 사실 편안한 친구같은 사랑이 제가 꿈꾸는 사랑이긴해요.
      불꽃같은 사랑은 서로 힘들잖아요.^^
      집착도하게되고..이만큼해줬는데 이만큼 안해주면
      서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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