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열이란 이름의 새싹 – 황동규의 시 「봄비를 맞다」

나는 아플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고, 또 나이가 들어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시인 황동규의 시 「봄비를 맞다」도 그런 경우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시를 읽어본다.

‘휙휙 돌아가는 계절의 회전 무대나 갑작스런 봄비 속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때는 벌써 지났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자 마음이 말했다.
‘이마를 짚어봐.’
듣는 체 마는 체 들으며 생각한다.
어제 오후 산책길에 갑자기 가늘게 비가 내렸지.
머리와 옷이 조금씩 젖어왔지만
급히 피할 수는 없었어.
지난가을
성긴 잎 미리 다 내려놓고 꾸부정한 어깨로 남았던 나무
고사목으로 치부했던 나무가
바로 눈앞에서 연두색 잎을 터트리고 있었던 거야.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정신이 싸아 했지.
머뭇대자 고목이 등 구부린 채 속삭였어.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어떻게 막겠나?
뭘 뵈주려 한 것 아니네.’
이마에 손 얹어보니
열이 있는 듯 없는 듯.
감기도 봄비에 정신 내주고 왔나?
일어나 커피포트에 불을 넣는다.
—황동규, 「봄비를 맞다」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전문

시인은 갑자기 비가 내렸고 그 비를 맞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언듯 읽으면 마치 비를 피할 곳이 없어 비를 맞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시의 맥락을 보면 사실은 죽은 것으로 여겼던 나무에서 새잎이 난 것을 보았고 그것을 보느라 비 피하는 것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인이 고사목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 나이 때문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 이러한 경우 우리는 나무에 난 새잎을 나도 아직 늙지 않았다는 억지 논리의 근거로 삼고 나이를 부정하려 든다. 부정한다고 지워질 수 있는 것이 나이가 아니란 측면에서 이는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황동규의 대응은 정반대이다. 그의 시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몸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몸의 힘겨움은 봄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나이에서 온다. 시인은 나이가 가져온 몸의 쇠약을 인정하고 있다.
나이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대응은 나이의 부정이 아니라 나이로 인하여 쇠약해진 우리의 몸이 열어줄 수 있는 또다른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바로 잎을 낸 고사목 앞에서 도달한 “이 세상에/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는 인식이 그러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나도 아직 늙지 않았다는 인식과는 다르다. 이러한 인식은 늙어서 버려진 것의 쓸모를 생각하게 만든다. 알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쓸모를 갖고 있다. 사하라 사막에서 일어난 먼지 바람은 멀리 지중해로 날아가 그 바다의 플랑크톤에게 공급되는 영양분이 된다. 먼지가 쓸모가 있으리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늙고 쇠약해진 몸은 쓸모를 갖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고사목에 핀 잎은 세상 모든 것의 쓸모를 환기시킨다.
시인은 고목에 난 새잎에서 세상 모든 것의 쓸모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 나이의 미덕일 것이다. 고목의 새잎이 얼마나 마음을 울렸겠는가. 시인이 “정신이 싸아 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시인은 그 감동의 순간을 경계하고 있다.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어떻게 막겠나”라고 말하는 고목의 속삭임은 나이가 열어준 세계 인식을 특별한 것으로 보려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이다. 그것이 나이가 열어준 지평이 아니라 그 또한 자연스런 현상의 하나일 뿐이라는 얘기로 들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나이가 가져다준 인식을 경계하자 그 경계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바로 감기가 가져온 미열이 고목의 새잎에 해당되는 세상이다. 젊은 날에는 봄비쯤 맞아도 몸이 감기로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들자 봄비를 맞은 몸이 감기로 반응을 한다. 바로 그때 감기는 시에서 고목의 새잎에 대응된다. “감기도 봄비에 정신 내주고 왔나?”라는 시인의 말은 바로 나이가 열어준 새로운 세상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구절이다. 그 세상에선 나이가 들면 고목의 새잎처럼 봄비를 맞은 몸에서 미열이 돋는다. 나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시인에게만 포착되는 세상이다.
나이가 들면 봄비만 맞아도 감기가 들고 몸이 아프다. 하지만 나이의 시력으로 잘 보면 그 감기가 가져온 미열이 몸에서 고목의 새잎처럼 돋는다. 아마도 누구나 커피 한 잔으로 그 새잎에 향을 더하고 싶을 것이다. 시인이 “커피포트에 불을 넣”은 이유이다. 황동규 시인이 나이가 들어서도 참 시를 잘 쓴다.
(2021년 7월 13일)
(인용한 시는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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