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어제로 보내보라 — 황인숙의 「희망」

Photo by Kim Dong Won

희망이란 내일이 좋았으면 하는 기대이다. 당연히 그것의 시제는 미래형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항상 내일이나 그 이후에 놓여있는 그 희망을 어제로 가져다 놓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제가 좋았다
오늘도 어제가 좋았다
어제가 좋았다, 매일
내일도 어제가 좋을 것이다.
—황인숙, 「희망」 전문

내가 이 시를 들여다보며 생각을 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말하자면 나는 이 시에서 이번에 두번째로 또 한번의 물을 우려낼 작정인 셈이다. 멸치는 보통 한번 국물을 우려내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시의 경우엔 그렇질 않아서 시가 던지는 파장의 방향에 따라 지속적으로 그 물이 우러날 때가 있다. 이 시도 그렇게 나의 머리 속에서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의 느낌과 달리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밀고 있었다.
이번의 생각 속에서 나는 황인숙의 「희망」을 희망에 대한 시인의 견해가 아니라 “시인의 희망”으로 받아들여 보았다. 가령 나에게 지금 현재의 희망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좋은 렌즈를 하나 장만하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결국 그 얘기는 나에게 현재 내가 꿈꾸는 좋은 렌즈는 없다는 얘기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식의 희망은 있을 것이며, 그 희망은 따라서 현재는 없지만 미래에 채워지길 바라는 오늘의 빈자리인 셈이다. 그런 식으로 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면 다들 그 앞에 각자 결혼이나 집장만 같은 나름대로의 희망을 답으로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똑같은 시인의 똑같은 시를 다시 접했을 때 나는 바로 그런 질문을 시인 앞에 던져 보기로 했다. 황인숙의 희망은 무엇일까? 나는 그렇게 묻고 「희망」이란 제목의 시를 그 답으로 읽어나갔다.
그러자 시인의 희망은 어제가 좋았으면 하는 기대로 읽힌다. 즉 시의 첫구절은 어제가 좋았다고 말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로 수용되었다. 그 희망은 거듭 강화된다. 오늘도 어제가 좋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시인의 희망이다. 그 희망의 강화는 계속되어 매일 어제가 좋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이어진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내일도 어제가 좋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곁들여진다.
희망을 내일이나 그 이후에 놓고 바라볼 때는 오늘의 빈자리가 보인다. 왜냐하면 오늘의 빈자리에서 그 빈자리를 채우는 내일을 꿈꾸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오늘의 빈자리는 어제도 비어있었다. 그러나 희망을 어제로 보냈더니 그 빈자리가 보이질 않고 꽉차있다. 어제가 좋았는데 그 좋은 어제에 어디 빈자리가 있겠는가.
희망을 내일에 두었을 때, 그제와 어제로부터 이어진 오늘의 빈자리가 너무 커보이거든 희망을 내일이 아니라 어제로 보내보라. 그러면 꽉찬 충만의 어제가 우리 곁에 있을 지니.
(인용한 시는 황인숙 시집,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사, 2003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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