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층에서

Photo by Kim Dong Won
2007년 11월 18일 서울 올림픽아파트에서

아는 사람이 올림픽아파트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집에 가서 사진도 찍고 놀다가 왔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말 24층이 있을까 하고
같이 간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보니 정말 24층이 있었습니다.
(실수해서 엘리게이터라고 칠뻔 했습니다.)
24층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밤이라 세상이 까맣지만 앞동의 계단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까마득하게 키를 키우고 있습니다.
불을 밝힌 바깥의 아파트들이 유리창에 달라붙습니다.
하지만 거실에 밝혀놓은 불빛이 창으로 달려나와
창에 달라붙은 아파트의 윤곽을 희미하게 뭉개버립니다.
집안에 있을 때면 불빛이 아무리 약해도
집안의 불빛이 집밖의 그 무수한 불빛을 일거에 발아래 눌러버립니다.
바깥의 불빛은 흐릿하게 꼬리를 내리고 맙니다.
밤의 불빛은 까만 어둠 속에서만 선명하게 빛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투명한 창에 내 그림자를 얹어 까맣게 윤곽을 그립니다.
그러자 내 그림자의 윤곽 속에
앞동의 아파트가 계단의 불빛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앞동 아파트의 그 까마득한 높이가 모두 내 그림자 속에 담깁니다.
불빛으로 키운 그 높이를 보장받고 싶어
앞동 아파트의 계단 불빛은
나의 까만 그림자 속으로 들어와선 나가려 하질 않습니다.
‘내가 네 그림자의 등뼈가 되어줄께.
그러니 나를 네 그림자 속에 품어 빛나도록 해줘.’
불빛들이 애원합니다.
오, 내 그림자 대단한 걸.
24층으로 놀러가서
내 그림자를 까맣게 유리창에 걸어두었더니
앞동 아파트의 불빛들이 그 그림자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새로 이사온 집을 들여다 봅니다.
잠깐 그렇게 구경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림자 바깥의 불빛은 눈이 침침해져서
제대로 안이 보이질 않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불빛들이 내 그림자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러고 놀다가 왔습니다.

9 thoughts on “24층에서

  1. 가시고나니 눈이왔어요^^
    하얗게…,
    날씨도쌀쌀해지는데 커피나 와인생각나시면 24층을 이용해주시와요^^

  2. ‘엘리베이터 24층에 놀러간 부부’
    흐, 두 분 재밌으세요.
    그림자만 대단한 게 아니라,
    어디서든 즐거이 노니는 그 능력이 대단하시구요.
    거긴 첫눈이 내렸다죠?
    여긴 그저 그냥 춥습니다, 쌀쌀맞게.

  3. 순간 엘리게이터가 24층까지 올라간다고 생각하니까 가슴밑바닥이 서늘한 걸.^^

    어제 첫눈 뿌릴 때 저 24층 통유리로 보는 세상을 참 멋졌겠지.
    높이가 가져다주는 풍경은 도회적인 것 같어.

    1. 멋진 말이다. 24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도회적이다… 그 말.

      사실 도시 사람들은 엘리게이터 속에서도 살아남는 끈질긴 사람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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